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0화(90/300)
90화 도둑잡기 (3)
사키 료조와 산하나, 두 사람밖에 없는 클래스에 냉한 공기가 돌았다.
“말해 봐, 선배. 어째서 당신 이름이 교직원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건데?”
“…….”
잔뜩 날이 선 사키의 취조에 산하나는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이 태연자약한 반응. 사키가 입매를 비틀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사키 료조는 산하나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눈곱만큼도 특이점이 없던, 평범한 인상에 분위기의 2학년생. 교과서 같은 평범함은 뒤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릴 것 같았다.
성격도 모나지 않고, 언동도 가볍지 않았다. 거기에 산하나는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자신의 의견을 덧대지 않는다.
사키는 도를 넘은 평범함에 도리어 위화감을 느꼈다. 사키의 직감은 사소한 것조차 쉽사리 놓치지 않는다.
한 번 가슴에 새긴 표목은 끝없이 관찰하고 분석해야 성미가 풀린다. 싸늘하기 짝에 없는 절궁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발로이자 잔재였다.
사키는 눈을 크게 뜨며 산하나를 응시했다. 안개 속에 몸을 묻은 듯 흐릿한 인상. 지금 보니 참 가증스럽단 생각마저 들었다.
산하나는 안경알을 번뜩이며 빤히 사키를 바라볼 뿐,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사키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사키는 그리 말하며 손톱으로 종이 한 장을 톡톡 두드렸다. 산하나는 시선을 사키의 손끝 쪽으로 옮겼다. 교직원 명부에 정확히 적힌 세 글자.
⌜산 하 나⌟
살짝 저물어 검게 그을린 노을빛이 교실의 벽면에 스몄다.
“아니, 그냥 말이 하기 싫은 건가?”
“…….”
“산. 하. 나. 선배. 아니, 서류상 직책으로 불러 드려야 하나?”
산하나의 이름을 단음절로 똑똑 끊어 발음하는 사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산하나 교수님.”
“푸하.”
산하나의 입술 사이로 건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조소에 사키는 뒤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사키의 눈동자에 새파란 적의가 점화됐다.
“…당신 뭐야.”
팽팽한 긴장이 맞물려 분위기 사나웠다. 한참을 미소를 흘리던 산하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음, 사키. 그… 조금 전 회의 때문에 힘이 들어간 건 알겠는데, 너무 긴장한 거 아닐까?”
“…뭐?”
“그래도 그렇지. 동명이인을 착각하는 게 너답지 못한 것 같아서.”
산하나는 그리 말하며 사키가 짚은 서류에 눈길을 줬다. 입가엔 은은한 호선을 머금은 채. 사키는 당황한 기색으로 재빨리 서류를 훑었다.
크게 흔들리는 사키의 동공. 서류에 적힌 이름은 분명 산하나가 맞았다. 하지만.
‘…달라.’
서류 귀퉁이에 조그맣게 적힌 인물의 거취 및 동선이 명백히 산하나와는 다르다.
하물며 축제 기간 동안 동명의 교수는 타지로 출장을 나가 있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내가 이걸 놓쳤다고?’
그러나 마냥 자책하기엔 회원 가입 약관 동의란처럼 글귀가 너무나도 작았다. 오히려 한 번 슬쩍 보고서, 알아챈 산하나가 용할 정도로.
‘설마 정보 조작?’
교직원들의 행적 및 정보들은 아카데미의 아공간 시스템으로 자동적으로 네트워크에 입력되기에, 외부의 간섭이 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심지어 사키 자신조차 정보의 열람만 가능할 뿐,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순 없다. 아공간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은 학원장의 고유 권한이다.
그렇다면 현 학원장인 메디아가 연루되었을까? 그 가능성을 계산해 봤지만,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이다. 사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을 추슬렀다.
‘말도 안 돼…….’
치밀할 정도로 꼼꼼하다 자부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을 놓쳤다니. 몇 번을 되짚어봐도 믿기지 않는 오판이었다.
사키는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산하나가 부드럽게 말을 뗐다.
“괜찮아, 아무리 너라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지, 기계도 아니고. 안 그래?”
산하나의 어조는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사근사근했다. 사키는 민망함으로 떨리는 입술을 씹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산하나의 입매. 불과 한 살 차이일 텐데 상당한 연력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직전까지 격화됐던 경계심이 허물어짐을 느꼈다.
“사키, 네 본국인 일본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은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많거든. 글자가 세 개잖아?”
“…아, 네. 아니, 응.”
“아마 빌런 대책 회의 직후라 힘이 잔뜩 들어가서 그런 걸 거야. 심각한 잡도리를 하다 보면 이런 오해야 부지기수지, 뭐. 아카데미 내부에 적들이 도사린다잖아? 오히려 너처럼 바짝 경계심을 세우는 게 맞는다고 봐.”
“…….”
“아무튼, 오해가 풀린 것 같으니까 난 이제 가 볼게.”
미처 수습되지 않은 의념들과 싸한 기분이 가슴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사키는 죄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장이 역전되어 버렸다.
사키로선, 누군가에게 수그려 본다는 건 생경한 감각이었다. 혀에 쓴맛이 돌고 가슴에 매캐한 연기가 들어찬 것 같았다.
사키는 취조를 계속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여기서 더 꼬리를 물어봤자 수치심만 더해질 뿐이다.
‘젠장…….’
산하나는 묘하게 웃고는 발끝을 문 쪽으로 틀었다. 잠깐의 어색한 공기.
문 앞에 다다른 산하나가 돌연 고개를 반만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키.”
“…응?”
“인생 선배로서 한 가지 조언해 주자면.”
산하나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새겼다. 그녀의 도톰한 안경알이 한 차례 빛나더니 나지막이 입을 뗀다.
“검마같이 눈치 없는 남자애는 직접 감정을 표현해 주지 않으면 모를 거야.”
“…뭐, 뭐!?”
사키의 얼굴이 한순간에 화악 붉어졌다. 그녀는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 탓에 말이 더듬어졌다.
“난 개인적으로 사키 널 가장 응원하거든! 어쨌든, 나 진짜 갈게! 시험 잘 봐-!”
“자, 잠까……!”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하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산하나. 그리고 그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키. 어스름한 저녁이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 * *
새벽녘의 동이 지평선에서 느릿하게 트기 시작한다. 나는 그 장경을 난간에 걸터앉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에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은 퀭하고 심신이 피곤에 찌든 상태. 그러나 참 오늘만큼은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게…….
“하, 기말고사는 상관없는데, 하필 조장이.”
레이첼이다.
하필 많고 많은 생도들 중,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상대와 같은 조에 배정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할 게 태산인데 예기치 않은 스트레스가 덤으로 딸려 왔다.
내가 그녀를 기피하는 이유는 실로 단순하다. 나랑 상성이 안 좋거든. 전에 중간고사를 같이 치르면서 확실하게 느꼈다.
다시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성격.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걔가 나한테 던지는 노골적인 추파가 부담스러웠다. 존나게.
번호는 어디서 알았는지, 틈만 나면 자기 방에서 렛플릭스 보자는 둥 라면 먹고 가라는 둥 같잖은 유혹 문자를 보내왔다. 내 번호는 어느새 공공연하게 퍼진 모양이다.
내 답신은 당연히 차단. 그럼에도 다른 번호로 다시 문자가 날아온다. 심지어 매번 자신의 본명을 당당히 밝히면서.
웨폰에게 물어보니까 레이첼은 내가 차단할 때마다 새로 개통한단다. 핸드폰째로.
레이첼 가라사대, 열 번 찍어서 안 넘어오는 남자는 없다나.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위로를 건네던 웨폰. 그의 얼굴엔 측은함이 진하게 머물러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첨언도 덧붙이며 엄지를 치켜세워 명복을 빌어주었다.
레이첼의 이런 추파들은 플레이어였던 나로선 의도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녀는 나와 감정적인 맺음이 아닌, 순전히 강한 핏줄이 필요할 뿐이다. 옷고름을 느슨하게 여미는 것도, 교태를 부리는 것도 더 강한 종자를 확보키 위함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난 레이첼의 표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하필이면 레이첼 걔는 녹스와의 대련, 머메이드 토벌, 마오 랑에게 승리하는 것까지 전부 직관한 몇 안 되는 생도다.
우월한 종자를 갈망하는 창성가의 일원으로선 내가 맛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만하다.
‘원래는 그 대상이 레온이었는데.’
하트형 동공이 머릿속을 스치자 전신이 전율하듯 떨렸다. 자칫하면 창성가로 끌려가 빈 쭉정이가 되어 나올 것이다. 나는 몸가짐을 단단히 하기로 재차 마음을 굳혔다.
참고로 레이첼은 연애 경험이 많아 보이는 겉인상과 달리, 모태솔로다.
짐작건대, 게임사가 캐릭터성에 반전을 넣어 보려 했던 것 같은데…….
“모쏠…….”
나는 머리를 긁적이곤 다시 침대에 등을 묻었다.
너무나도 일은 기상의 반동이 뒤늦게 몰려왔다. 원래보다 못해도 세 시간을 일찍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점차 묵직해지는 눈꺼풀을 거부하지 않은 채, 눈을 감으려던 즈음.
롤린’ 롤린’ 롤린~ 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롤링 인 더 딥~!
갑작스레 울리는 용감한 아이돌 누님들의 기상나팔 소리.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짜증 섞인 시선이 곧바로 벽시계를 향했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여름이라 동이 일찍 터 오르긴 해도 새벽.
수탉도 목청을 떨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이 시간에 누구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핸드폰의 인위적인 조명이 안구를 한 번 쨍하게 때렸다.
[사키 료조] [원딜] [019-XXXX-XXXX]눈을 얇게 떠 확인해 보니 상대는 료조. 종종 실없는 문자는 보내오는 그녀지만 전화가 걸려 온 건 처음이었다.
‘근데 얘가 이 시간에 깨어 있다고?’
그런 의문도 잠시, 낮 시간대에 맨날 잠만 자니 밤잠이 사라진 거겠지. 예전에 웨폰과 얘랑 대화를 어깨너머로 듣기도 했고.
나는 텅 빈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
빌런 색출 회의의 종래에 걸려온 전화다. 이상한 점을 발견해 급하게 전화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곤함이 진하지만 어차피 료조도 밤잠을 설쳤을 텐데, 부장이나 돼서 엄살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뭐야, 안 자고 있었어?
자고 있을 시간에 전화를 건 당사자가 이런 대사를 치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뻔 했다. 나는 치솟는 감정을 갈무리하곤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생각보다 일찍 깼어. 너는?”
⎯나, 나야 원래 밤잠 없는 편이라서.
“그건 그렇고, 이 시간에 갑자기 웬 전화야. 자료 조사하다가 뭐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한 거야?”
⎯…….
그리 묻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용무 있을 때만 너한테 연락하는 줄 알아?
곧이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새초롬한 답변.
생각해 보니 그렇네. 신중한 료조 성격상, 중요한 건은 구두로 설명할 테고. 문자로는 보통 농담 따먹기를 했으니까.
‘그러면 왜 이 시간에 전화한 거지?’
내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료조가 머뭇거리다 툭 말을 뱉었다.
⎯…그냥 시험 잘 보라고 전화한 거야.
“…아.”
꽤나 달라진 태도에 나는 새삼 놀랐다.
그 이성적이고 냉철한 료조가 이렇게 살가운 말을 전할 리가 있을까?
그녀의 평소 행실에 비추어 봤을때 좀 아니지 싶다. 다른 심중이 있겠다만 료조의 속내를 헤아리긴 나로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뭐, 응원의 말이니 좋게 좋게 받아들여야지.
⎯아, 아무튼… 끊을게.
“잠깐.”
⎯어, 어, 왜?
“너도 잘 봐라.”
⎯…….
다시 한번 인 새벽녘의 침묵.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폰 화면을 봐도 통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떨떠름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이내 단말마가 들려왔다.
⎯응, 고마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뚝- 하고 끊기는 전화.
나는 턱주변을 긁적이다 책상 위로 폰을 던졌다.
좀 더 잘까 했지만, 은은했던 태양이 높게 타오를 조짐이 보였다. 기말고사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