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2화(92/300)
92화 기말고사 (2)
최설아의 동공이 경악으로 이지러졌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 하. 안녕 얘들아! 나는 이번 기말시험, 너희 조를 담당하게 된 김 교관이라고 해! 하루뿐이지만 잘 부탁할게.”
호아킨 아카데미에서 최설아는 김 교관으로 통한다. 그렇다고 최설아란 이름이 본명은 아니었다.
군단장과 계약하면 인간성을 팔아넘긴다. 인간 시절의 이름도 그에 포함된다.
“…….”
따가운 눈살이 최설아의 옆얼굴을 두드렸다.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는 강검마.
그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레이첼의 눈가에 적의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검마의 눈길을 다르게 인식했다.
‘연상녀에 대한 환상.’
장승처럼 키만 크지, 굴곡이라곤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외모다. 한데 강검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심지어 동공에는 묘한 감정마저 맴돌았다.
상황이 빚은 오해로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치정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중계될 듯한 분위기였다.
최설아는 애써 시선들을 무시해 보지만, 몸과 말투는 뻣뻣하게 굳어 갔다.
‘왜, 하필 저 미친놈, 아니 미친분 조에 배정된 건데!?”
최설아는 속으로 뇌까렸다. 욕설은 섞지 않았다.
혹여 속내를 들킬까 싶어서.
강검마의 눈은 생각을 읽듯, 차갑고 고요했다. 감정이 완전히 걷힌 검은 동공. 슬쩍 마주치기만 해도 두려움이 차오른다.
‘에휴,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최설아는 불안함을 숨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 내가 아무리 미인이어도 그렇지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부끄러워, 얘들아!”
“미인은 개뿔, 보라색 호박같이 생겨서는.”
레이첼이 코웃음 쳤다. 미소를 머금은 최설아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맺혔다.
귀한 집 딸내미라고 교관을 대하는 태도가 영 말이 아니다.
“흐음- 가슴에 지방이 잔뜩 꼈다고 예쁜 건 아니란다, 단무지 머리 생도!”
“이 멀대 같은 년이!”
레이첼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자 최설아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하늘 같은 교관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어!?”
“하, 뭐? 하늘은 지랄. 가슴은 돌바닥처럼 판판한 게!”
“어휴,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내가 너희랑 동행하는 이유를 까먹었어? 나, 너희 조 담당 교관이야, 담당 교관. 안전사고뿐만 아니라, ‘체점’도 내가 한다고. 괜한 성질 부려서 조 전체 점수 까먹지 말고 조용히 하자, 응? 입만 다물어도 반은 간다잖니.”
“…….”
아카데미 밥만 5년 먹었다. 이런 자존심 드세고 지체 높은 생도의 기를 누르는 법은 진즉부터 깨우쳤다.
‘연대 책임.’
레이첼은 눈을 치뜨며 최설아를 노려봤다. 욕지기라도 씹는지 어금니를 빠드득 가는 모습.
그러든 말든 최설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무장들을 수거했다. 주군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린 권력의 맛을 그녀는 이렇게라도 느끼고 있었다.
댕⎯ 댕⎯
종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특별관의 꼭대기에 매달린 철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곧이어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던 거대한 문이 불길한 소음를 내며 열렸다. 문 너머에 드리운 시커먼 배경.
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마력의 공명에 생도들은 침음을 흘렸다. 불안함이 차오른 눈빛들.
하지만 최설아의 얼굴엔 진한 향수가 머물렀다. 시집살이 중 친정에 들를 때의 기분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그녀의 입꼬리가 절로 치솟았다.
“자, 가 볼까!?”
최설아가 신이 나서 앞장섰다.
강검마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뒤따르고, 레이첼과 산하나도 날개처럼 그의 양옆에 따라붙었다.
* * *
“우와, 제대론데?”
“아이-씨, 좀 천천히 가! 뒤에서 감시나 하러 온 거 아니야!? 어느 교관이 맨 앞에 서!”
앞장서서 걷던 최설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에 노성을 빽 지르는 레이첼. 비척비척.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푸하, 밖에선 그렇게 날뛰더니 안에 들어오니 정신을 못 차리는 구나? 외유내강이 아니라 외강내유네, 완전~”
“하아- 하아- 너, 나가면 뒤져 진짜.”
최설아는 레이첼의 시근덕거림을 무시한 채, 소풍이라도 온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빌런인 그녀로선 이 음험하기 그지없는 환경이 고향 집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반인반마였으니 마력 친화도가 평범한 인간에 비해 월등히 높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마력의 찌꺼기 정도만 남았으려나?
최설아가 담당 교관으로 배정됐을 당시, 무슨 모략이 있나 싶었다. 반푼이지만 빌런은 빌런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삶에 대한 애착만이 차 있을 뿐, 수상쩍음은 글쎄… 그 외엔 별 고민 안 하는 것 같았다.
‘인간성을 팔아넘기면 단순해지나?’
뭐, 구린 흉금을 품었다 한들, 최설아 혼자선 별다른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낌새가 느껴지면 따끔한 칼맛을 다시 보여 주면 될 일이다. 나는 최설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예사롭진 않네.’
암전막을 뚫고 들어온 직후, 보인 건 광림이었다.
나무, 바위, 개천이 고루 분포된 풍경.
하나 녹음의 색이 완전히 바랜 회백색으로만 이뤄진 광림이었다. 거기에 발을 디디면 바닥을 메운 자갈들이 퍼석퍼석하게 부스러졌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마경의 축소판이 이 정도면, 게헤나는 어느 정도인 거지?’
공기도 맵싸한 게 가슴을 텁텁하게 한다. 아마 마력의 여향이겠지.
아고르나 마인을 만났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털이 곤두설 정도로 기류가 사나웠다.
실제로 레이첼은 특별관에 입장한 후부터 말이 줄어들고 있다. 안색이 푸르죽죽한 게 어지간히 공기가 탁한 모양이다. 신체는 단련할 수 있어도 속까진 단련할 수 없으니.
반면, 하나 선배는 말없이 다리만 움직였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아직까진 버틸 만한데 확실히 고되긴 해……. 검마, 너는 멀쩡해 보이네.”
“완전 멀쩡한 건 아니고, 피부가 좀 따갑긴 해.”
“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너는 좀 따끔거리고 마는구나, 하하…….”
하나 선배는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미약하게나마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보건대, 슬슬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하나 선배는 마력 친화도는 딱히 없는 것 같군.’
같은 동아리 부원 중 미심쩍다고 할 수 있는 그녀다. 최설아처럼 잠입한 빌런이란 가능성을 지우진 않았지만, 반응이 마냥 연기는 아닌 듯하다.
‘좀 더 지켜보자.’
나는 선배를 잠깐 힐끔 보곤 도로 앞을 바라봤다. 정처 없이 회백의 광림만 펼쳐져 있을 뿐, 그 어떠한 이정표도 없었다. 첫 번째 체크 포인트가 어디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에 흩뿌려지는 마력이 방향 감각에 교란을 주는지, 어째 제자리만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 방증으로, 바스러진 자갈길에 우리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넉넉할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이대로라면 1시간도 촉박할 거란 걱정이 들었다.
방향, 위치, 지리 그 어느 것도 어림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실격이야.’
조원들끼리 머리를 맞댄다고 마땅한 해결책이 나올까? 야생마 같은 레이첼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고, 하나 선배도 좀 낫다 뿐이지 낯빛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조원 중 그나마 맨정신인 건 나 하나. 그동안의 일 때문에 마력에 내성이 생겼나? 어찌됐든, 당장에 가장 중요한 건 아니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조장인 레이첼이 제 역할을 번듯이 못하니, 어느새 내가 조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동아리 부장만으로도 귀찮은데 기말 시험 때마저 대신하고 있다니…….
그렇다고 어영부영 이번을 넘기자니 시험 보상이 어떤 것일지가 마음에 걸렸다. 혹독한 만큼 포상을 후하게 주는 것이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이다.
“…흐음.”
검신 가호의 감응력을 발휘하자니 사시미가 품에 없어 감각권이 많이 좁아졌다. 그래서 최설아를 겁박해 사시미를 탈취할까 생각했다.
다만 그것은 명백한 실격 사유다. 혼자 있으면 주저 없겠으나, 보는 눈이 둘이다. 나는 혀 뿌리까지 올라온 아쉬움을 침과 삼켜 냈다.
그렇다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역시,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태생이 한국인인 나로선 ‘빨리빨리’가 익숙하다. 나는 발걸음을 계속하며 생각에 잠겼다.
뾰족한 묘수가 없을까?
편하고 빠른 효율적인 방법.
‘마력 감지만 가능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마력과 감지라는 두 단어를 연신 중얼거렸다.
가닥이 잡힐 듯 말 듯 한 느낌.
……!
바로 그때 전류가 왼쪽 관자놀이를 지나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최설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최설아는 크게 흠칫하더니, 곧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찾았다.’
뉴스에서 봤던 장면이 스쳤다.
공항에서 마약을 탐지하던 개들.
나는 최설아에게 마주 미소 지어 보였다. 최설아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자신의 가까운 앞날을 직감했다는 듯.
* * *
같은 시간.
저벅, 저벅.
레온을 필두로 한 조원들이 광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뒤를 지친 기색으로 걷는 두 여인, 사키 료조와 2학년 랑 클래스 소속 에리오 파인. 거기에 인자한 인상의 남교관이 꼬리처럼 붙어 있었다.
“대충 첫 번째 체크 포인트 즈음에 온 것 같은데?”
선두를 걷던 레온이 뒤 돌아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의 입가엔 새파랗게 질린 조원들과 대비되는 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료조는 간신히 숨만 가다듬고서 레온을 쳐다봤다.
‘…쟤는 힘들지도 않나?’
공기만 들이켜도 폐부가 짜릿하다 못해 아리는 환경이다. 하지만 어째 레온은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점지된 용사 후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경에 한없이 가까운 특별관에서도 말짱하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저⎯어기, 조장,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에리오 파인이 무릎을 짚으며 말했다. 분홍 머리가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가빴다.
레온은 눈만 깜박거리다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좀만 더 힘내 봐요, 에리오 선배.”
“…아.”
에리오는 가냘픈 탄식을 흘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끄덕였다. 그 모습에 료조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야, 레온.”
“응? 무슨 일이야?”
레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문제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텅 빈 눈동자. 사키의 눈썹이 한 차례 씰룩거리더니 사납게 일갈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에리오 선배가 네 장단에 맞추느라 힘들다잖아!”
“응, 그게 왜?”
“하, 왜!? 지금 네가 얼마나 독선적인지 전혀 모르나 봐?”
레온은 사키를 멀뚱히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기계 장치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나라고 선배의 의견을 묵살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는 조장으로서 완수해야 할 목적과 짊어진 책임이 있어.”
“책임? 내 눈엔 그냥 조장 완장 좀 달았다고 대장 놀이 하는 걸로만 보이는데!?”
“료조, 네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야. 근데 나는 나를 믿고 따르지 못하는 조원까지 끌어 줄 생각은 없어.”
“…뭐?”
“네가 속한 여행 동아리 분위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내게 검마 같은 모습을 기대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윽고 사키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더니 노성을 내질렀다. 찰나였으나, 민활한 궁사의 눈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강검마를 언급했던 순간, 레온의 안광에서 서늘함이 깃들었다. 그의 눈에서 강검마를 향한 명백한 적개심을 보았다.
“여기서 검마 이름이 왜 나오는 건데!”
“별 뜻은 없어. 그냥 나는 검마처럼 사려 깊진 않다는 걸 말한 거거든.”
“야-!”
레온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사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판에 닿았으나,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이었다.
“뭔 저딴 놈이 다 있어!”
사키가 험악한 눈을 하고서 레온의 등판을 노려봤다.
파리한 안색의 에리오는 괜찮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옮겼다.
사키의 동공에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자, 후미를 쫓던 남교관이 나긋이 말했다.
“자자, 원래 어릴 때는 싸우면서 크는 거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조장으로서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조금만 더 힘내 봐요.”
“…….”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사키는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여기서 힘 빼는 건 바보짓이지.’
사키는 작게 끄덕였다. 남교관은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녀는 멈췄던 발걸음을 재차 뗐다. 저벅저벅. 세 명의 걸음 소리가 회백색 자갈밭에 스몄다. 남교관은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흐음.”
의뭉스레 읊조리던 그의 안광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마력을 감지하는 용사라.”
교관은 음습한 고리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