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3화(93/300)
93화 기말고사 (3)
색이 완전히 바랬던 광림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광야가 펼쳐졌다.
보기만 해도 막막한 회백색 풍경임은 조금 전 숲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 탁 트인 시야가 주는 상쾌함이 있다.
“하아, 하! 드디어 그 미친 숲을 빠져나왔다!”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레이첼과 하나 선배의 얼굴이 한결 환해졌다, 한참을 멀미하다 배에서 내린 사람처럼. 나 역시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덜었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력이 뒤섞인 공기가 폐부에 차올랐다. 따끔거렸던 처음과 달리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금세 내성이 쌓인다. 이름에 마(魔)가 껴서 그런가?
당시엔 부끄럽다고만 생각했던 이름인데, 왠지 모르게 덕을 보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강검마가 특이체질이라든가. 다만 후자는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문득 강검마란 이름을 지어 주신 이곳의 부모님이 떠올렸다. 이를 드러내며 호쾌하게 축하해 주시던 아버지.
-‘으하하하. 검마, 너는 우리 서리 강 씨의 자랑이다! 역시 이름이 좋으니 복을 타고났구나. 장하다, 우리 아들!’
더 이상 기억에 없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아련하고 그리운 감정은 가슴 깊은 곳에 연무처럼 깔려 있다.
나는 코를 찡그렸다. 그런 내막들은 차차 밝혀 나가면 된다.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 데 집중하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코를 킁킁거리며 마력을 탐지하는 최설아. 허우대만 인간이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개다.
시선을 느낀 최설아는 민망한지 볼을 긁었다. 한껏 움츠러든 그녀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녀는 혹, 누구에게 들킬까 조곤조곤 속삭였다.
“…북서쪽에서 짙은 마력이 느껴져요, 검마 님. 그쪽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첫 번째 체크 포인트가 나올 거 같아요……!”
검지를 곧게 뻗어 방향을 가리키는 최설아. 예상보다 제 역할을 잘해 주는 그녀였다. 나는 최설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끄덕였다.
“수고했다.”
“헤헤, 감샴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말에도 최설아는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반응이 딱 주인이 멀리 날린 원반을 주워 온 애완견과 비슷했다.
최설아는 5군단장의 종속으로서 살아왔으니 수동적인 태도도 일견 납득됐다. 하나 당연히 의심을 지우진 않았다.
지금이야 겸양 떨며 굽신거리지만 언제 뒤통수를 갈길지 모르는 족속이 빌런이다. 살인에 대한 이유도 없고, 거리낌도 갖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나에 대한 앙심은 고이 간직한 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 보이는 거겠지.
‘그래도 얘 덕에 숲길을 헤매진 않았으니까.’
나는 눈동자를 들어 올려 벌판을 바라봤다. 실내임에도 지평선이 머나먼 곳까지 뻗어 있었다. 지면에 넘실거리는 마력이 공간에 간섭해 확장시킨 건가 싶다. 아니면 말고.
‘…뭔가 좀 이상한데.’
한참 지평선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사시미라도 품에 있다면 감각권을 십분 발휘할 테지만, 당장은 타고난 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있잖아, 검마야.”
잠깐 생각을 고르고 있자 하나 선배가 조용히 다가왔다.
“어, 선배.”
“…그게 아무리 봐도 레이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서 그러는데,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생각보다 길도 빨리 찾은 것 같고. 제한 시간까지 아직 30분 남았잖아. 네가 가서 물어라도 봐 봐.”
나는 힐끔 레이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토하고 있다. 우리 중 유달리 힘들어하는 모습.
전생에 스치듯 읽었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병균에 취약하다던 토막 상식.
신진대사가 활발해 병균의 증식도 빠르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력은 인간한테 바이러스 같은 건가?’
가설이 맞는다면 어째서 레이첼이 저토록 새된 숨을 쉬는지 얼추 알 만했다. 아카데미 내에서 그녀보다 건강한 생도는 내가 아는 한에선 없다.
나는 하나 선배에게 감사를 건네곤 레이첼에게 바투 가까이 갔다. 다가서자 레이첼은 숨을 길게 끌어 쉬는 와중에도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하아, 하아. 미안 미안. 모처럼 조장이 됐는데, 하필이면 검마 네 앞에서 못난 꼴 보여서 좀 쪽팔리네.”
레이첼은 흐려지는 목소리에 애써 강단을 섞었다. 이 정도 일은 별스럽지 않다며 도리어 걸음을 재촉한다.
“…….”
까먹고 있었는데, 레이첼이 조장이다. 그래선지 비척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엔 책임감이 엉겨 있었다.
평소의 언행이 빗치스럽긴 하나, 그녀 또한 창성의 계보를 잇는 어엿한 영웅이다. 게다가 용사인 레온을 따라 마족과 맞서는 메인 히로인 중 한 사람.
훗날이긴 해도 인류를 대신한다는, 사명과 책무가 각각 그녀의 양어깨에 걸려 있다.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레이첼도 대단하긴 하지.’
불특정 다수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는 건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지금에야 그런 자각은 전혀 없이, 내 편두통 유발제 역할만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리 헥헥대는 건 보기 안쓰럽다. 자칫하다 픽 기절해 버려서 시험 내내 업고 다녀야 할 것 같다. 레이첼의 튼실한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내겐 없다.
“잠깐, 레이첼.”
“으, 응?”
나는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레이첼.
그녀의 탄탄한 이두근이 손아귀 안에서 꿈틀거렸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자.”
레이첼은 당황한 기색으로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동글동글해진 하트형 눈동자. 새삼스레 싹싹하겐 못 대해 줘도, 작은 휴식 정돈 제안할 순 있다. 어찌 됐든, 같은 조니까.
“어차피 얼추 다 온 것 같다. 그러니까 10분 정도만 쉬었다 가도 될 성싶은데.”
“…거의 다 왔다는 걸 검마 너는 어떻게 아는데?”
아리송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레이첼. 설명이 너무 불충분했다.
그렇다고 최설아를 남몰래 마력 탐지견으로 썼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충 얼버무리자. 나는 눈썹께를 긁으며 말을 받았다.
“나, 감이 좋잖아. 중간 고사 때 마인 출몰을 가장 먼저 눈치채기도 했고.”
“으음, 그건 그렇지.”
“그리고 시간 좀 늦으면 어때.”
“으, 응?”
“어차피 실격해도 당장 낙제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다음 시험 잘 보면 되는 거니까. 조장이라고 너무 부담 갖지 마라.”
“…….”
기말시험에서 실패한다 한들, 레이첼의 안위보다 중요친 않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용사 레온의 오른팔 격인 대영웅이 될 재목.
애먼 곳에서 몸이라도 상하면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칠지 모른다.
“레이첼, 너뿐만 아니라 하나 선배도 힘들어 보여서 한 말이야. 조장인 네가 판단할 일이지만, 난 휴식에 한 표. 하나 선배도 그렇지?”
그리 묻자 선배는 말없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나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나와 선배를 얼굴을 번갈아 보는 레이첼.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발아래에 둔 채로, 작게 끄덕였다.
“…그럼 3분만.”
“3분 카레야? 속 아플 땐 제대로 쉬어 줘야 돼. 10분, 어때?”
레이첼이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었다.
금발한테 카레라고 해서 그런가? 아까 최설아가 단무지라 놀렸을 때도 격하게 반응하던 그녀였으니.
레이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평소처럼 말갛고 건강한 웃음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눈가를 닦아 내곤 우렁차게 말했다.
“그래! 10분 가즈아~!”
나는 속으로 옅게 웃었다.
‘이제 좀 레이첼답네.’
하나 선배는 그제야 풀썩 주저앉았다. 나도 잿빛의 나무 둥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멍하니 앉아 있자 최설아가 스리슬쩍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훠이훠이 저어 쫓아낼까 했으나, 녀석이 엉덩이 붙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최설아는 소리를 차단하려는 듯이, 무릎을 잔뜩 끌어 올리고서 조그맣게 말했다.
“…저 검마 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어느새부턴가 최설아의 입에는 극존칭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말을 뗄 허락을 구하듯 조용히 있는 그녀. 나는 미심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뭔데?”
“…그게.”
최설아는 잠시 말을 추리더니 입을 열었다.
“검마 님은 어쩜 여자 후리시는 스킬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 리스펙함다!”
“…….”
최설아는 칭찬을 바라듯 자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인간성이 깎인 그녀로선 어떤 의미로 말한 건지 모르겠으나, 내겐 비아냥으로 와닿았다. 나는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너, 한국에서 살 거면 말부터 다시 배워 와라.”
최설아는 다소 충격을 받은 듯이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정강이를 감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죄죄, 죄송합니다. 사, 살려 주세요.”
“…….”
…최설아 얘,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안 짤리고 있는 거지?
* * *
짧은 휴식을 마친 뒤, 우리는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길게 뻗은 척박한 광야. 생명의 냄새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넓게 둘러보아도 우리 이외의 다른 조는 보이지 않았다. 1, 2학년을 아우른 만큼 그 수가 많았는데, 중간 이탈자가 꽤나 많은 모양이다.
‘우리도 이 녀석 아니었으면 진즉에 탈락했을 거야.’
최설아는 은연중에 내 옆에 바싹 붙어 방향을 알렸다. 이런 험지에서도 인간 네비게이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근데 생각해 보니 중간에 기권한 조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야 최설아가 있지만, 다른 조는 아닐 거잖아. 나는 불현듯 궁금해져 걸으며 물었다.
“야, 이거 시험 중간 이탈자는 어떻게 복귀하는 거지?”
“아, 그거는 말이죠. 잠시만요, 어디 보자… 여기 있을 텐데.”
최설아는 내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공간 주머니 손을 찔러 휘적휘적 무언가를 찾더니 이내 작은 함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새까만 상자. 유저 시절에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뭐냐?”
“이건 마력 호출기예요! 이렇게 뚜껑을 열면, 짜잔!”
최설아는 자랑스레 함의 위 뚜껑을 젖혀 보였다. 쌍팔년도 오락실에서나 볼 법한 옛스러운 빨간 버튼이 떡하니 가운데 박혀 있다.
“요 버튼 보이시죠? 요거를 누르면 소지자의 위치가 행정실 스크린에 떠오른대요.”
“특별관에서도 가능하다고? 어떻게?”
“…어, 그게 원리는 저도 잘 몰라요. 영웅 협회 측 연구소에서 제작하고, 교육 용도로 아카데미에 보급하는 거라서……. 들리는 말로는, 아티팩트(artifact) 중 하나를 열화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아, 참고로 이 아공간 어깨 가방도 협회 측에서 교직원들에게 다량으로 제공해 준 거예요!”
최설아는 어깨 가방을 집게손가락으로 들며 자랑했다. 자신이 발명한 것인 양 보람찬 표정을 짓는 모습.
나는 깔끔히 무시하고서 새까만 함과 가방을 관찰했다. 최설아는 입매를 축 늘어뜨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열심히 설명해 드렸는데, 칭찬 한마디 정돈 해 주셔도 좋았을 텐데…….”
“…….”
무어라 한마디 할까 하다가 도로 시선을 옮겼다.
‘협회 측에서 벌써 이런 걸 만들고 있다고?’
아티팩트.
마법과 가호가 구분되지 않던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유물. 미지의 힘이 내재된 아이템으로, 그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한다. 현대까지 잔존하는 수도 열이 채 안 된다지.
국보 대접을 받는 몇몇 S급 무장들을 ‘따위’로 만드는 세계 유산.
그래선지 한 국가가 소지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으로, 취급과 관리는 국제기구인 영웅 협회에서 하고 있다.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하자면, 국가 간의 밸런스를 유지키 위함이었다.
‘개중 하나를 열화 버전으로 개발하고 보급한다라…….”
어째 긍정적인 전망보다 불길한 의문들이 떠오른다. 왜냐면,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아는 정보가 없거든. 이 부분은 아마 정사의 후반부 즈음에 밝혀지지 않을까 싶다.
‘근데 이거 비싸려나? 보급품이긴 해도 모태가 아티팩트인데. 팔면 꽤 쏠쏠할 것 같은데.’
내가 입맛을 다시자 눈치챈 최설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재빨리 휙, 뒤로 감추어 버린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녀는 울먹울먹한 눈망울을 장착하고선 말했다.
“이이, 이건 안 돼요. 산재보험을 소지자 앞으로 달아 놔서, 잃어버리거나 하면 제가 변상해야 된다구요오.”
목소리가 애절했다. 악마한테 인간성은 팔아넘겼으면서 불쌍한 척, 시늉을 한다.
거기에 산재보험이다, 박봉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거다 뭐다 지껄이는 게 어이가 없었다.
빌런 주제에 그런 것들을 꼬박꼬박 챙겨 가며 산다니. 존나 우습다.
그리고 내가 강도라도 되나? 본관이 ‘서리 강’이긴 하지만… 그냥 눈여겨봤을 뿐이다. 그렇게 최설아가 봉급쟁이의 애환을 토해 내는 사이.
“차, 찾았다! 첫 번째 체크 포인트!”
맨 앞에서 걷던 레이첼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