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6화(96/300)
96화 기말고사 (6)
콰광⎯!
귓전에 스미는 파공성. 귀울림이 심하다.
“으…….”
사키는 간신이 눈꺼풀을 떴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핏물이 망막을 빨갛게 물들였다. 잡히는 시야가 얇고 붉다. 핏물을 닦아 내려 해 보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곧이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보려는 료조.
하나, 짧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전신을 달구는 듯한, 어마어마한 통증에 도로 몸을 누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잠기지 않았다면 신음 대신 비명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고, 일어난 거지?
인간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기억을 상실하기도 한다. 사키는 몸을 추스르는 것에서 정신을 깨우는 것으로 목표를 선회했다.
사키는 타고난 직관으로 잃은 기억을 되살리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머리를 굴릴수록 안구와 뇌가 따가웠다. 호흡도 탁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그녀는 하나씩 짚어 갔다. 서서히 가늘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사태를 반추한다.
사키는 살짝 눈을 내렸다. 쇄골을 박살 내고 틀어박힌, 구불구불한 칼날의 소검.
그것을 본 순간, 흐릿했던 기억의 윤곽이 단숨에 구체화됐다.
그때, 파공성이 재차 고막을 때렸다. 사키는 시선을 소리의 발원지로 옮겼다.
‘…레온?’
핏물을 뒤집어쓴 채로 저항 중인 레온의 모습. 그는 부서져라 어금니를 깨물며 허리를 바로 세운다.
레온이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공기가 흔들렸다. 아직 기적의 가호를 완전히 통제하기 전이지만 파괴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필사적인 공격들은 마력의 막에 막혀 버렸다.
사키는 격전을 눈에 담아 두면서 시야를 넓혔다.
여기저기 새겨진 상흔과 움푹 꺼진 벽면, 바닥으로 하여금 일전이 어렴풋이 짐작됐다. 사력을 다했음은 분명했다.
상대는 만전 상태의 빌런, 반면 레온은 무장조차 없다.
따라서 그 결과는 참담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후후, 제아무리 용사 후보라 해도 결국 레온, 너도 인간이구나? 이거 너무 기대 이하인데……. 퍼머쉬 님의 그릇으로 뭔가 부족할 것 같기도 하구. 그리고 무엇보다… 이딴 녀석의 손에 아고르 님이 죽으셨단 말이야? 그 교수 새끼, 가라 치는 거 아니야? 넌 어떻게 생각해, 폴?”
에리오는 레온의 옆구리 살을 잡아 뜯으면서 남교관, 폴에게 물었다. 폴은 실눈을 가늘게 치떠 레온을 살피다, 말을 받았다.
“음- 그래도 마경의 생태계와 얼추 비슷한 이곳에서 에리오 님의 공격을 20분 넘게 받아 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무장도 반납한 상태로 말이죠. 아고르 님의 죽음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급하게 빙의하시느라 빙의체와 상성이 안 좋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게다가 당시 현장엔 검제도 있었다 하니, 교수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닐 겁니다.”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건가. 그래도 맨손으로 잘 버틴 걸 보면, 마냥 빈 쭉정이는 아니긴 하지. 하- 퍼머쉬 님이 이 녀석한테 빙의하시고 적응만 잘하신다면 일이 잘 풀릴 텐데.”
“새주군께서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원래 주인인 아고르 님이 서거하시고, 오갈 데 없는 우리를 받아 준 다음 계약까지 해 주신 분 아니야. 덕분에 우리는⎯”
무언가 느껴졌는지, 에리오는 대화를 끊고 스윽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시선의 끝이 사키를 향했다.
“어, 뭐야. 일어났어?”
급기야 에리오의 눈매에 불길한 고리눈이 걸렸다.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안광에 사키는 등골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
“폴, 나 잠깐만 사키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레온 걔 숨 안 끊어지게 잘 보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에리오는 하늘하늘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죽음의 냄새도 자욱해진다. 스산한 전율이 전신을 저민다.
‘이렇게 죽는 건가.’
얼마 전까지의 사키의 삶은 큰 재미도, 흥취도 없었다. 무료한 일상의 반복과 삭막한 가정환경에 허무만이 속에 겹겹이 쌓여 갔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전선의 첨단에 있는 영웅은 더 일찍.
사키 료조가 호아킨 아카데미에 순순히 입학한 것은 인류를 위한 헌신이 아닌, 죽음의 명분을 찾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키는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았다. 삶에 미련과 애착이 생기게끔 해 준 고마운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발치까지 다가온 에리오는 사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뗐다.
“많이 아파?”
에리오의 말투와 눈동자엔 짙은 건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빗장뼈에 박힌 칼자루의 끝동을 콕콕 건드렸다. 치 떨리는 아픔에 반사적으로 입술이 벌어졌다.
“크윽…….”
“와, 그래도 대단하다. 그 순간에 가호를 발현해서 독이 전이되는 속도를 늦추다니. 게다가 얼마 안 가서 정신까지 차리고. 근데 어차피 죽을 거니까 운이 좋은 건가, 안 좋은 건가. 뭐, 어찌 됐든 대단하단 건 인정해 줄게.”
“…….”
“널 속이려고, 내가 연기까지 했잖아. 완전 대상감이었는데, 그치?”
에리오는 킥킥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키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목소리를 짜냈다.
“…왜… 이런 짓을…….”
“푸하하하-!”
사키가 우거지상을 지으며 묻자, 에리오는 느닷없이 광소를 터트렸다.
음흉하고 불길한 웃음소리가 탑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 순간, 에리오의 얼굴에 빠르게 표정이 사라지더니, 동공에 차가움이 돌았다.
“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직 너도 애는 앤가 봐. 하여간, 요새 애들 머리만 빨리 굳지, 발상은 여전하다니까.”
에리오는 사키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단단히 미쳤어.”
사키가 사납게 을러 댔다. 에리오는 한 팔은 무릎에 턱을 괴고서, 다른 손으론 칼자루를 지그시 눌렀다.
“어때, 많이 아파?”
사키는 소리 없는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몰려오는 경련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 반응을 에리오는 건조한 눈으로 관찰하더니 낮게 말했다.
“네 눈엔 내가 미친년으로 보이겠지만, 난 그저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야. 아, 그리고 내가 널 찌른 이유는 단순해. 사키, 너한테 실망했거든. 넌 날 몰랐겠지만, 난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얼마 전까진 너와 내가 동류라 생각하기도 했고.”
“…….”
“넌 눈치 못 챘겠지만, 예전부터 너를 쭉 지켜봐 왔거든, 그 특유의 권태로운 눈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근데 와중에 몇 번을 들킬 뻔했는지 몰라~. 같이 다니던. 이름이 강검마였나? 걔가 그렇게 눈썰미가 좋더라고.”
칼자루를 타고 핏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하여튼, 너도 나처럼 인류에 회의감을 갖는 것 같아서 퍼머쉬 님께 소개해 드릴까 했어. 우리 주군께선 너처럼 감정이 모자란 친구를 매우 아끼시거든. 근데 웬걸? 갑자기 나한테 업히라며 등을 보이는 거 아니겠어? 그때 결심했지. 아, 얘도 결국엔 한낱 인간이구나~ 하고.”
에리오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어서 그녀는 웅크린 몸을 일으키곤 기지개를 쭉 켰다.
“이 정도 수다 떨어 줬으니, 저승 가는 길은 별로 안 외롭겠지? 그럼 수고~.”
홱 몸을 돌리고서 휘휘 손만 젓는 에리오. 그런 뒷모습을 쳐다보는 사키의 얼굴엔 혈색이 가시고,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살고 싶어.’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기도했다.
비로소 산다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함께 무엇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제발.’
신이 없다는 건 알지만.
‘누구든 좋으니.’
그래도 듣고 있다면.
‘도와줘.’
부디 이 목소리가 닿기를.
타다닥!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사키는 무게를 더해 가는 고개를 겨우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썹이 떨렸다. 죽기 직전의 주마등일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사람이었다. 새치가 듬성하게 자란 검은 머리의 소년. 그가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자신을 쳐다봤다.
따뜻한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흐른다. 사키는 아른거리는 초점을 다잡아 가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검… 마야.”
새카만 배경이 시야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사키는 성대를 조였다.
“…구… 해 줘.”
강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키는 몰려오는 안도감에 정신을 맡겼다.
* * *
“검마 님-! 같이 가요오!”
돌연 발를 놀려 단숨에 계단을 가로지르는 강검마의 뒤꽁무니를 쫓아, 최설아가 탑의 5층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단 호흡을 다듬었다. 그간 편리한 마법만 사용해 와서 신체 단련은 개나 줘 버렸기에 체력이 말이 아니었다. 눈앞이 희뿌옇고 목젖이 시큰했다.
“어? 혹시 설아니?”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감미로우면서도 불길한 말투. 최설아는 호흡을 미처 고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이름을 짧게 끊어 불렀다.
“…에리… 오 님?”
에리오 파인. 그녀도 빌런인 만큼 본명은 아니었다. 다만, 항상 자신을 저 이름을 소개하니 에리오라고 아름아름 불릴 뿐이었다.
군단장을 모시던 빌런 중 대선배 격에 해당하는 여인. 짬도 높지만, 화 속성 마법을 다루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주군이 죽은 뒤, 행방이 묘연했는데 설마 생도로 위장했을 줄이야.
그 옆에 있는 남 교관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폴이었던가? 실눈캐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사내. 저자도 아고르의 종마 중 한 명이었다.
‘저 두 사람이 왜 같이 있지?’
난데없는 상황에 최설아는 반가움 대신 황당함을 느꼈다. 반해, 에리오는 크게 손뼉까지 쳐 가며 최설아를 반겼다.
“어머 어머, 이런 곳에서 보니까 반갑다, 얘! 그동안 잘 지냈어?”
“…아, 예, 뭐.”
최설아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원래 친했던 빌런은 아니기도 하고,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았다. 최설아는 상념을 재빨리 수습하곤, 주변을 살펴보았다.
레온은 땅에 장난감처럼 내팽개쳐져 있고, 저 먼발치에선 하늘색 머리의 여생도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근데 잠깐. 저 여생도, 검마 님이랑 같은 동아리에 가깝게 지내던 사이 같은데……?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이곤 시선을 옮겼다.
“!”
눈길이 닿는 곳에 강검마가 등을 보이며 서 있다.
일말의 표정이 없는, 무채색에 한없이 가까운 기세. 그 모습을 본 최설아는 전신 곳곳에 소름이 돋아났다.
임계를 뛰어넘은 분노는 차갑다 했던가.
강검마의 상태가 딱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최설아는 살고자 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지 않았던가.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그녀였다.
그런 삶에 집착적인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짙은 죽음의 냄새가.
적어도 최설아의 눈에는 물리적인 형태를 띠며 강검마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앞쪽에서 에리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설아야! 너도 이참에 퍼머쉬 님이랑 계약할래? 너같이 얌채 같은 애는 새로운 주군이 필요한 법이잖아. 내가 퍼머쉬 님께 잘 이야기해 볼게!”
“…….”
최설아는 주춤 물러서며 침묵했다.
‘지도 아고르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군단장과 계약해 놓고서, 얌채는 지랄.’
에리오는 아리송한 얼굴로, 갸웃했다. 이어서 그녀는 슬쩍 강검마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친근하게 말했다.
“그 앞에 있는 검은 머리 친구. 사시미 검성이었나? 철각을 꺾은 천재 생도. 장난 아니더라. 근데 어쩌지, 아무리 너라도 이런 환경에서 빌런 세 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심지어 무장도 없는데. 봐 봐, 용사 후보라 불리는 레온 이 녀석도 완전 걸레가 됐잖아.”
웃음을 흘리며 눈짓으로 레온을 가리키는 에리오. 그 옆의 남교관의 입매에도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
비소와 조소가 난무하는 가운데, 강검마는 말없이 손을 뒤로 뻗었다. 뒤편에 있던 최설아가 흠칫했다.
“어, 어?”
최설아는 그의 손바닥과 뒤통수를 한차례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챘다.
최설아는 숨을 집어삼키면서 머리를 굴렸다. 뇌가 팽이처럼 핑그르르 도는 느낌.
짧은 찰나, 그녀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소거하고, 재단했다. 여기서 어느 편에 붙어야 할지를.
가능성을 따져 본다면, 여기서 강검마의 뒤통수를 치고 저쪽에 붙는 게 살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하물며, 강검마는 자신을 개처럼 부려 먹던 소년 아닌가. 복수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터다.
그러나 이 섬뜩한 감각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이 느낌은 무어란 말인가. 기류는 점점 사나워져 이내 역류하기 시작한다.
최설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동자에 결의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손을 아공간 주머니 찔러 넣고는 휘저었다.
키리링⎯
아공간 주머니에서 매끈한 검 울림이 끌려 나왔다. 최설아의 손에는 뽑아 든 사시미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최설아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시미를 높게 들었다.
“검마 님을.”
빌런 최설아는 칼을 받치며 청했다.
“제 새로운 주군으로 모십니다.”
“…….”
말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 대신.
꽈아악.
강검마는 사시미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