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8화(98/300)
98화 결심 (1)
에리오의 큼지막한 눈동자가 한층 더 커졌다.
‘저… 저, 괴물 새끼는 뭐야!’
강검마가 강하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얼마 전, 아공간 대련에서 대륙의 별을 꺾은 불세출의 천재.
사람들은 그를 이리 불렀다, 사시미 검성.
농담조가 어느 정돈 섞여 있긴 했어도 특출남 하나는 진짜인 강검마였다.
그렇기에 여러 변수를 계산하고, 조우 시 대처 방안을 연구했는데. 각고한 노력이 한순간에 거품처럼 터져 버렸다. 다리에도 힘이 탁 풀려 버려 오금이 달달 떨렸다.
당사자였던 폴은 눈치 못 챘지만, 격전을 관망하던 에리오는 경악했다.
상정을 벗어난 강함. 게다가 강검마가 뿜어내는 압력은 전의마저 소멸된다.
어떻게 저러지? 그것도 얼굴에 솜털이 뽀송뽀송한 열일곱 살이 말이다. 애당초 나이를 떠나서 저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가.
전력의 밑바닥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존재.
괴물, 아니…….
“악마.”
머리로만 중얼거리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멈췄다.
저벅⎯ 한 걸음.
강검마의 발끝이 에리오를 향한다. 차게 식은, 텅 빈 눈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오, 오지 마!”
에리오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선다.
하지만 강검마의 발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악마야, 오지 마!”
그 말에 최설아가 코웃음 쳤다. 빌런인 주제에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벅⎯ 또 한 걸음.
새파랗게 죽어 버린 에리오의 안색.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머리를 헤집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급기야 에리오는 이를 악물어 정지된 사고를 일깨웠다.
구색이야 어떻든 죽음을 면해야 한다.
일단 살아남은 다음, 그다음에 훗날의 복수를 도모해야 한다. 에리오는 실낱같은 냉정을 되찾아 가까스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줄행랑?
직전에 강검마의 터무니없는 검속을 봤는데,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마법을 시전해서 공세를 퍼부은 다음 도주?
하지만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마력이 없다. 에리오는 시선을 반갈죽된 폴에게로 옮겼다.
‘…설마 쟤가 마력을……?’
생각해 보니 폴 이 새끼, 발동도 미처 못 했으면서 캐스팅 준비를 했었다. 심지어 체력이라도 빼놓는다며 호언장담해 놓고, 한 큐에 몸이 갈린 무능함을 보인 폴이였다.
제아무리 마력이 진하다 한들, 총량이 무한하진 않다. 펑펑 써재끼면 결국엔 동이 나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질적이다. 폴이 죽기 전 사용한 마력이 그리 방대하진 않았는데, 어째서? 찰나의 의문. 하지만 해답을 금세 알아챈 에리오였다.
에리오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눈길을 사시미에 두었다.
칼날에서 살기가 포악스레 뿜어나와 일대의 마력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당키나 한 건가 싶었지만, 현실이었다.
“…….”
와중에도 저 미친 괴물은 가까워지고 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곧 그녀는 정신을 잃은 사키의 머리칼을 덥석 움켜잡고는 들어 올렸다.
“한 걸음만 더 오면 이년 목을 바로 따 버릴 줄 알아!”
에리오는 순식간에 흙을 날카로운 칼로 조형하고는, 사키의 턱선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강검마의 발걸음이 정지했다.
그래, 인질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지. 에리오는 사키를 방패막이 삼아 살금살금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에리오가 계단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돌연 그녀의 시선이 사키를 훑었다. 분명 쇄골에 박혀 있던 단도가 사라진 모습. 가슴팍의 자상에서는 피만 흐르고 있었다.
“이, 이게 뭔?”
에리오의 동공이 한껏 열린 그때, 사키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프다. 이제 그만 놔라.”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키는 품 안에 숨긴 검을 꺼냈다. 그리고 칼자루를 역수로 고쳐 잡고서 뒤쪽을 향해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푸욱!
“커어어억-!”
구불구불한 칼날이 배꼽의 꿰뚫고 창자를 들쑤셨다. 곧바로 쇠에 묻은 독이 혈관을 타고 격류한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에리오는 한참 동안을 고통 낀 비명을 내지르다 이윽고 무릎이 지면에 부딪혔다.
사키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리다 벽을 짚었다. 앞으로 고꾸라진 에리오가 고개만 들어 물었다.
“너 대체… 어떻게?”
사키가 힘을 짜내 옅게 웃어 보였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탁한 숨을 내뱉으면서 뇌까렸다.
“하아, 하아… 너도 아까 연기질 했으면서, 나라고 못 할까. 그리고 원래 절궁가는 대대로 독에 내성을 키워… 화살촉에 독을 묻혀 적을 노리는 게, 궁사의 편법 중 하나거든.”
사키는 무질서한 호흡을 한번 가다듬었다. 가지런해지진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숨이 끊길 것 같았다.
“…정신 나간 년.”
에리오가 일그러진 목소리로 욕을 지껄였다. 독이 목까지 전이되어 보라색 혈관이 돋혀 있었다. 얼굴 근육만 꿈틀거릴 뿐, 신체 기관 대부분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사키도 체력을 완전히 탕진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애써 꿋꿋이 허리를 세우며 말을 덧붙였다.
”가호로 독의 전이를 막은 게 아니라, 하아, 하아… 심장박동을 느슨하게 했을 뿐이고. 근데 1초라도 타이밍이 엇나갔으면, 진짜 요단강을 건널 뻔하긴 했어…….”
에리오가 하복부를 틀어쥐면서 눈을 사납게 치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선 생기가 빠르게 가시고 있었다. 독성이 뇌까지 퍼져 기능이 서서히 정지되기 시작했다.
“…아, 아.”
눈꺼풀이 감긴다. 새카만 암전막이 빠르게 시야에 드리운다.
짧은 신음, 그것이 에리오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곧바로 생명 반응이 완전히 꺼졌다.
“하아, 하아.”
사키도 기운이 빠진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앞쪽으로 기울 때.
덥석.
단단한 감촉이 사키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살짝 눈만 들어 올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토록 찾던 얼굴이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다 죽어 가는 건 난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냐. 그래도 타이밍 맞게 구해 줘서 고마워.”
“…….”
“그리고 며칠 전에 들어주기로 했던 부탁 말인데.”
사키는 희미하게 웃으며 도로 가슴팍에 얼굴을 폭 묻었다.
“이렇게 좀만 더 있게 해 줘.”
* * *
료조는 내 품에 몸을 기댔다. 하얗다 못해 핏기가 완전히 가셔 창백해진 낯빛과 혼탁한 호흡. 하지만 그 숨소리마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잦아들고 있었다.
“료조!”
“…….”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료조는 입만 몇 번 뻐끔거리더니 갑자기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기침이 계속될수록, 상처와 입에서 피가 울컥거렸다. 나는 다급하게 료조의 상태를 점검했다.
가슴께를 찢고 들어간 들쭉날쭉한 검상. 급소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듯 하지만, 치명상임에는 분명했다. 탑 내부의 음습한 공기 때문인지 출혈이 멎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살짝 시선을 옮겼다. 료조도 료조지만, 열 걸음 정도 거리에서 널브러진 레온의 상태가 더 안 좋았다.
용케도 살아 있다 싶을 정도로. 옆구리가 파이고, 팔 한 짝은 걸레처럼 거덜이 나 있다.
당장 조치해야 한다. 지체되면 두 사람의 목숨이 사이좋게 날아갈 것이기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급박한 상황에 낭패감만큼 도움 안 되는 감정은 없다. 나는 두 사람의 용태를 눈으로 훑고서, 재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일단 출혈부터 잡는다.’
나는 교복 겉옷을 벗었다. 곧이어 옷단을 사시미로 그은 다음, 맨손을 북북 찢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최설아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태가 긴박함에도 신기하다는 듯 지켜보는 모습.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도 측은지심, 연민 등의 감정이 소실된 얼굴을 보니 잠깐 빡이 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감정의 흔적만 남았을 텐데. 타박할 시간이 아깝다.
‘쟤가 사시미를 넘겨서 상황을 넘기기도 했고.’
사실 최설아에게 무장을 달라 손을 뻗은 건, 나름의 도박이었다. 그녀가 사시미를 안 줬으면 그 자리에서 난 바로 끝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최설아는 동료였던 빌런을 버리고 나를 택했다.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종마의 증표 때문인지,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알 턱 없지만. 덕을 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때, 마침 레이첼과 하나 선배도 5층에 들어섰다. 수척한 안색이던 레이첼은 일전의 현장을 보더니 크게 놀랐다. 그리고 내게 곧바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명은 나중에 할게. 레이첼, 하나 선배, 저기 레온 좀 이쪽으로 데려와 줘.”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일단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최설아도 그들을 거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쟨 눈치가 없는 듯 있단 말이지.’
계속 멀뚱히 쳐다만 봤으면 진심으로 부아가 치밀었을 텐데. 내가 눈짓하기도 전에 퍼뜩 움직인다.
레온에게 다가간 레이첼의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완전히 피떡이 된 채로 숨만 가냘프게 쉬고 있었으니까. 레온과 교류가 잦은 그녀로선 표정이 어두워질 만도 하다.
레이첼은 하나 선배와 최설아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원래라면 터프하게 들쳐 업고 왔을 그녀이나, 자칫 힘을 줬다간 레온의 뼈대가 뒤틀려 버릴 테니.
세 사람은 최대한 조심스레 레온을 내 앞까지 끌고 와 누였다. 가까이서 본 레온은 예상보다 더 좋지 못했다.
부러진 뼈대가 팔꿈치를 뚫고 삐져나왔고, 옆구리에선 료조 이상의 출혈이 보였다. 응급 처치가 아니라 수술을 해야 할 판이다.
“…레온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레이첼이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받았다.
“아니, 안 죽어.”
“…어?”
“살릴게.”
낮은 어조로 말하자 레이첼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뭘 하면 돼?”
“일단 레온은 뼈부터 맞춘 다음 치료해야 해. 이 상태면 몇 분 안 가서 진짜 큰일 날 수도 있거든.”
“으, 응.”
레이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하나 선배에게로 시선을 옮기고서 말을 계속했다.
“선배랑 레이첼은 레온 자세 틀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응, 알았어.”
격앙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대답해 주는 선배에게, 나는 옅은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선배도 속뜻을 눈치챘는지 마주 미소 짓는다.
“나는 뭐 할까… 요?”
한 명씩 지시를 내리고 있자 최설아가 쭈뼛쭈뼛 옆에 붙어 물었다. 원반을 던지길 바라는 개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한 그녀에게, 나는 방금 찢어 둔 천을 던지며 말했다.
“너… 아니, 김 교관님은 이걸로 료조의 상처 좀 지혈하고 있어요.”
최설아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료조의 상박을 천으로 감아 꽉 압박했다.
레이첼과 선배도 무릎 꿇은 채 레온의 팔뚝을 단단히 붙들었다.
“후.”
짧게 숨을 뱉었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살점을 찢고 나온 뼈마디를 집어넣고, 조립해야 한다. 생선 뼈만 끊어 봤지, 사람 뼈를 맞춰 볼 줄이야…….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레온의 눈꺼풀을 열어 보았다. 안력이 풀려 초점이 없었다.
이른바 콤마 상태가 이런 걸까? 손 까딱 잘못하면 쇼크사로 곧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얘를 이렇게 그냥 놔둬도 어차피 죽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도 해 보는 수밖에.
계획은 이러하다.
[전이의 가호]로 [무통의 가호]를 흘려 넣어 레온의 몸체를 마취시킨 뒤, 재빠르게 부러진 뼈를 조립. 곧바로 [재생의 가호]도 주입해 뼈와 살점 세포를 증식시킨다. 일단 계획 자체는 흠잡을 데 없다.혹자는 물을 것이다. 이 모든 걸 의사도 아닌 내가 할 수 있겠냐고.
지구였다면 당연히 불가능했을 무모함이다. 하지만 이 세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검신의 가호.’
가호가 발현되면 거짓말처럼 머리가 차게 식고,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저 두 요인으로 동작의 정밀성을 높혀 버린다.
다만, 무통의 가호를 병용하지 않는다면 내게 격통이 몰려오겠지. 피 토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남을 살려 낸다라…….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왜 그래야 하나 싶지만, 얘가 죽으면 마왕은 누가 막나? 레온의 고유 가호인 [기적의 가호] 빼곤, 마왕을 무찌를 방도가 없다. 왜냐면 시스템적으로 막아 놨으니까.
‘어휴, 씨발.’
더군다나 무통의 제한 시간도 7초 남짓밖에 안 남았다. 7초를 초과하면 레온의 마취가 깬다. 그 안에 모든 처리를 해야 한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전생에 횟집 사장이었던 내가… 이 세계에선 외과 의사?’
절로 나오는 한숨을 집어삼키고서 무라사메를 깨물었다. 레온을 치료하려면 비는 손이 없었기에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나는 턱을 까딱여, 검집을 털었다.
[기지를 발휘하여 정신(精神)의 격이 상승합니다.] [억제력을 사용해 사용자에 맞게 조정을 시작합니다.]지이잉⎯
[검신(劍神)의 가호 ‘영(英)’이 발현됩니다.]나는 곧바로 레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몇 초 뒤, 신속한 처치 덕에 료조와 레온은 안색이 나아지는 게 보였다.
뼈도 대충 붙고 흐르는 피도 적었다.
“커억!”
다만, 나는 코피가 인중을 타고 턱 끝까지 길게 흘렀다.
“검마야!”
힘없이 레이첼의 품에 폭 안겨 버리는 나. 따뜻했다.
“…하하, 씨발.”
전신이 잘근잘근 씹어 먹히는 듯한 고통이다. 한데 나는 웃음을 흘렸다. 고통 경감률 2.5단계의 덕을 톡톡히 보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