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9화(99/300)
99화 결심 (2)
늦은 밤.
창 너머로 들어온 달빛이 사키의 이마에 스몄다. 눈부신 월광에 그녀의 눈꺼풀이 슬며시 열렸다.
“으윽…….”
짧은 신음이 사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눈이 트이자, 몸에 마비감이 가시고 후 통이 일거에 몰려왔다.
사키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환희에 찬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오! 일어났네, 사키!”
“…웨폰?”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반기는 웨폰. 사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여긴 어디고, 얘는 왜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어리기도 전, 설명충 스피드 웨폰의 입이 뱁새처럼 움직였다.
“야이-씨, 너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알아? 거의 삼 일 가까이 누워 있었어!”
“…뭐, 사, 삼 일?”
“어, 평소에 그렇게 자면서 잠이 계속 오냐?”
사키의 동공이 순간 멍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말시험에서의 참상들이 떠올랐다.
에리오에게 기습을 당하고, 똑같이 되돌려줬었지.
받은 만큼 돌려준다. 그것이 사키의 본 성정이었으니까.
‘…근데.’
사키는 미간을 누르며 기억을 되뇌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이 기분은 뭐지? 중요한 걸 까먹은 것 같은데.
생각이 길게 이어지자, 웨폰이 의자에 도로 앉으며 툭 말을 뱉었다.
“사키, 넌 부장한테 목숨을 빚진 거야. 레이첼한테 들어 보니까, 검마가 너랑 레온을 바로 응급 처치 했다잖아. 부장에게 치유 계열 가호도 있는진 몰랐는데, 의사들 말로는 조치가 보통이 아니었나 봐. 완전 혀를 내두르던데?”
“……?”
사키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날, 자신이 했던 행동과 말이 대번에 떠올랐기에.
강검마의 품 안에 폭 안기면서.
-‘이렇게 좀만 더 있게 해 줘.’
저런 말을 씨불였다.
‘…아.’
사키의 머릿속이 한순간 백지장처럼 하얘지더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둔중한 아픔에도 참았던 비명을 터뜨렸다. 그녀의 두 발이 번갈아 이불을 뻥뻥 찼다.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쪼그라들고 있었다.
“…사, 사키!? 왜 그래, 갑자기!”
웨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급히 물었다. 사키는 대꾸하지 않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등줄기를 타고 진땀이 쭉 흘렀다.
‘미친.’
두 글자에 현재 상황이 완벽히 요약됐다.
그런 세상 오글거리는 대사를 쳐 놓고서, 어떻게 검마 걔를 본단 말인가. 스스로가 했던 행동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대가리가 깨질 것 같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아니, 차라리 이대로 깨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이라도 걸려, 모른 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절대 기억에 가까운 명석한 두뇌가 말했다. 그때의 일은 너무도 또렷한 현실이라고.
사키는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동공이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회전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웨폰이 근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하는 건가……. 맨날 세상 도도한 척은 다 했던 쟤도 저럴 정도면… 기말시험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웨폰은 한참을 혼자 말하더니 이내 어깨를 떨었다. 그의 반응에 사키가 뾰족한 시선을 쏘아 냈다.
“근데 넌 야밤에 왜 여기 있는 거야, 정신 사납게! 뭐, 구경났냐, 어!?”
단순한 화풀이였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수치심 때문에 피를 토할 것 같았기에. 사키는 어조에 괜히 날을 세웠다.
갑작스러운 기함에 웨폰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사키가 앓아누운 동안, 부원들이 번갈아 곁을 지켰다. 빌런과 깊게 연루된 그녀였기에 당연한 조치였다.
그리고 때마침 오늘 저녁이 웨폰의 순번이라 군말 없이 불침번을 섰건만. 키가 눈앞에서 사납게 이를 갈아 댄다.
‘얜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영문은 모른다. 다만, 저 행동들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 때문이라고만 짐작할 뿐.
웨폰은 한 손을 뻗으면서 주머니를 황급히 더듬었다. 손에서 양갱이 딸려 나왔다.
“자, 자, 봐 봐! 네가 좋아하는 고급 양갱도 사 왔어! 그러니까, 진정해 봐!”
양갱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은 웨폰은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의 의미였다.
사키는 물끄러미 이불보에 놓인 양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곤 눈을 살짝 들어 웨폰을 빤히 쳐다봤다.
“…….”
병실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약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몹시 쌉싸름했다. 이윽고 사키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솟아올랐다.
팍―!
옹골차게 돌돌 말린 베개가 웨폰의 안면을 강타했다.
“카악!”
“넌 무슨 내가 양갱 주면 헬렐레 넘어갈 줄 알았냐!?”
조금 전까진 화풀이였다. 근데 지금은 자신을 강아지 취급하는 웨폰에게 단단히 빡이 돈 사키였다.
그녀가 베개를 하나 더 움켜쥐자, 웨폰이 손사래 치며 문 쪽으로 달렸다.
“두, 두고 보자!”
웨폰은 허공에 휘적이며 삿대질하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사키는 잠깐 멍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죄책감이 한 박자 늦게 엄습했다.
“…괜히 쟤한테 승질 부렸네.”
자신을 개 부리듯, 양갱으로 회유하려던 게 괘씸했지만.
늦은 밤까지 있어 준 얘한테 좀 심하게 대한 것 같았다.
‘나중에 제대로 사과해야지.’
점화됐던 흥분이 차츰 가라앉자 사키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웨폰이 도망가면서 내팽개친 양갱이 침대보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
한참이나 양갱을 응시하던 사키가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곤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고개를 휙휙 저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창백한 달만이 그녀를 비출 뿐, 인기척은 없었다. 확인을 마친 사키는 침을 삼킨 뒤,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턱뼈가 찌릿할 정도로 강렬한 맛이 혀를 휘감았다.
“…개맛있어.”
사키는 울음을 참으려 코를 찡그리곤, 양갱을 와구와구 먹어 치웠다.
자정의 보름달만이 그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 * *
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병원.
저벅, 저벅.
나는 복도의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오늘 불침번은 웨폰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말동무나 해 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말 많은 애인데, 혼자서 있으니 얼마나 입이 근질거리겠어.’
나는 작게 실소하며 병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이어 갔다.
기말시험으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전조 없이 나타난 빌런들로 인해 료조와 레온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보면 두 사람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도 네 가지 가호를 발현시켜, 치료하겠다는 내 도박은 성공해 둘은 목숨을 건졌다.
그 여파로 나도 정신 줄이 곧장 끊길 뻔했지만……. 고통의 경감률 덕에 입원 신세는 면했다.
사키와 레온은 레이첼과 최설아가 하나씩 도맡아 업었고 그 상태로 특별관을 빠져나왔다. 하나 선배는 무릎부터 무너져 내린 나를 부축했었다.
‘세 사람이라도 멀쩡했던 게 다행이었어.’
그렇게 끔찍했던 기말시험을 마친 뒤, 우린 바로 병원으로 직행했다.
입원 직후 곧바로, 메디아가 나를 찾아와 설명을 부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질문 공세에 나는 즉각 답하지 않고, 일단 보류했다. 다친 두 사람을 살피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메디아에게 부탁해,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 전화 통화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불안과 분노라는 양면적 감정이 교차했었다.
시험 중 또다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중간고사를 반면교사 삼아 시험 장소를 학원 내부로 틀었건만, 생도 두 명이 사경을 헤매며 복귀했으니.
메디아는 레온과 사키의 부상으로 비추어 이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는 투였다.
제아무리 특별관의 환경이 혹독하다 한들, 팔이 부러지고 살이 파일 리 없으니까.
분노로 목소리를 떨며 중얼거리던 메디아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물론, 그녀 이상으로 나 역시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빌런들을 모아 칼판을 벌이고 싶을 만큼.
하지만 격화된 감정은 일을 그르친다는 걸 알기에, 어금니를 세게 깨물며 삭여 냈다.
어차피 복수의 때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부원들이 발을 바삐 움직이며 의심 인물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까.
크게 숨을 집어삼켰다. 서늘한 밤공기가 콧속에 밀려오자 정신이 맑아졌다.
문득 시선을 복도 창 쪽으로 옮겼다. 어스름한 기운이 자욱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에 별들의 반짝임이 가려진 풍경이다.
“…….”
생각에 잠긴 채로 계속해서 걸으니, 발끝은 어느새 사키의 병실 코앞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사키의 병실에서 작은 소란이 들리더니.
벌컥!
웨폰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한차례 숨을 고르던 녀석은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부장. 뭐야, 왜 이 시간에?”
당황한 기색으로 묻는 웨폰에게 나는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너 심심할까 봐 말 상대라도 해 주러 왔다.”
“부장…….”
웨폰은 잔뜩 서러운 눈빛을 지었다. 다 큰 남자 새끼가 눈망울을 울먹거리니 묘하게 거북했다. 웨폰은 촉촉해진 눈을 비비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장, 사키 깨어났어.”
“……!”
“…보니까 부장, 네 덕에 몸은 그나마 말짱한 것 같더라. 근데 문제는…….”
“문제?”
되묻자, 침음을 흘리고 있던 웨폰이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PTSD가 생긴 모양이야.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질 않나, 베개를 던지지 않나. 원래부터 성격은 개차반이었지만, 입도 더 거칠어졌고. 심지어 달래 보려고 양갱을 건넸는데 대번에 거부하더라니까? 상황이 많이 안 좋아 보여, 부장”
“…….”
고통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폭 흘리는 웨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 뭐지?’
료조한테 먼지 날리게 두드려 맞은 녀석이 베개 좀 맞았다고, 입을 댓발 내밀며 투덜거린다.
웨폰이 말이 맞는다면, 그를 대하는 료조의 태도는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유해진 감이 있었다.
그리고 양갱을 물린 것도 대충 얼버무리려는 웨폰의 대응이 기껍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한데, 웨폰 얘는 대저 PTSD로 판단하곤, 저 혼자 안타깝다는 얼굴로 끌끌 혀를 찬다.
내가 만약 료조였으면 바로 강냉이를 털어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둔하니까 료조가 지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가상했기에 나는 굳이 물꼬를 트진 않았다.
그저 고구마 방지캐인 료조가 느끼고 있을 고구마가 무척 안타까워, 속으로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이참에 전할 말이 떠올랐다. 워낙에 긴박했던 나날이었던지라 대화를 나눌 짬이 마땅치 않았다. 거기다 때마침 사키도 눈을 떴으니, 타이밍은 적절했다.
나는 웨폰에게 물었다.
“그 뭐야, 빌런 색출은 어디까지 진행된 거야?”
기말고사 기간도 끝물이다. 거기에 방학이 곧이니 더 이상 지체하면 계획이 수틀린다.
의중을 짐작했는지 웨폰은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부원들뿐만 아니라, 중간에 레이첼도 발 벗고 나서서 의심 가는 교직원들 대략 다섯 명 정도는 추려 냈어.”
“그 사람들이 확실한 것 같아?”
내 물음에 웨폰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머리도 잘 굴러가고, 신중한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실상 확답이었다.
‘다섯이라…….’
기실은 분명 다섯을 훌쩍 넘겠지만, 그들만 뽑아 내도 감자 넝쿨처럼 통째로 굴러 들어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골똘히 여러 생각들을 하다가 시선을 웨폰 쪽으로 돌렸다. 내 입술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웨폰, 나랑 내일 방과 후에 시간 되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괜찮지?”
“어, 시간은 괜찮은데. 사키 일어났는데, 내일 방과 후는 애들 데리고 이리로 다 같이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너,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쟤 성격도 모르냐? 료조, 쟤가 우르르 몰려온다고 좋아할 애로 보여?”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웨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의 눈썰미에 탄식했다. 모쏠인 나보다 머저리인 사람은 얘가 처음이었다.
눈썹을 좁힌 채 쳐다보자 웨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고.
“근데 내일 갈 곳이 어디야?”
나는 맑은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학원장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오래된 격언을 실행할 시간이다.
방학식까지 남은 며칠, 나는 빌런 새끼들을 족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