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
성황의 아이들-10화(10/469)
010. 붉은 전장 (1)
-나의 소중한, 영혼을 바쳐 사랑할, 단 하나뿐인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이국의 왕자가 마침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속삭였을 때, 소녀는 벅찬 가슴을 가눌 길 없어 그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것은 언젠가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었던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 * *
갑자기 탑에서 끌려 나와 포박된 채로 안대를 차고 한참을 걸었다. 얇은 신에 닿는 감촉은 차고 딱딱한 돌바닥.
서늘한 아침 공기 사이로 생소한 쇠의 냄새를 맡으며 아멜리아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소리, 아니 군인들의 소리. 이따금 마찰을 일으키는 병장기들과 터지기 전의 둑처럼 응축된 기묘한 열기.
이윽고 눈을 가린 검은 천이 풀리자, 그녀는 자신이 성벽의 중앙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아라, 아멜리아.”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오랜 시간 가려져 있던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곧 성벽 위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장궁수들과 보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문 안쪽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로한의 창기병 부대가, 성의 양옆으로는 길게 도열한 수천의 보병 부대가 전투의 개시를 기다리며 조용한 흥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 너머의 평원에 개미 떼처럼 진을 치고 있는 연합군의 군대. 연합군의 깃발들 가운데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신성제국 델크로스의 깃발까지.
그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은 뒤에야 아멜리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안대를 들고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로한의 왕 레오나드.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국은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하여 그녀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자. 죄 없는 그녀를 모함하고 폐위하여 수년간 싸늘한 탑 안에 유폐한 장본인이었다.
레오나드는 지독하게 메마른 아멜리아의 눈을 바라보다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끌어 올렸다.
“그래, 억울한가? 나를 원망하느냐? 그러나 이것은 모두 저 죄 많은 제국의 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응보다. 너는 이 성전의 원흉이 아닌가.”
아멜리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실은 거짓이라는 것을, 단지 허울 좋은 끼워 맞추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진정한 원흉은 누구인가, 말하는 자도 듣고 있는 자도 그것이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
성벽 위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그녀의 볼품없이 짧아진 장밋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레오나드는 잠시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다,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 끝을 매만졌다.
“로메인의 계획은 반도 성공하지 못했다. 너의 그 빌어먹을 아비가 잘도 저 왕국의 너구리들을 포섭했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거칠어진 뺨을 쓸어내리고, 이윽고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니 네가 대신 그 대가를 치러야지. 지금 너의 목을 베어 이 전쟁의 효시로 삼을 것이다.”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아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고통만이 가득했던 삶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다만 적어도 연합군이 이 잔인한 자의 야망을 꺾어주길, 그가 바라는 것을 어느 것 하나 손에 쥘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아주길. 그 순간 그녀의 바람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전선에 소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까마득히 먼 연합군의 진영이 술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진영에서 튀어나온다.
기마병 단 1기. 개전의 징후도 없이 이루어진 돌발적인 돌진이었다.
레오나드는 엉거주춤 그녀의 목을 쥔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연합군의 진영을 살폈다. 소란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적의 진영 쪽에서도 예정에 없는 우발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잠시 후 연합군의 진영에서 한 무리의 기마병단이 연이어 달려 나왔다. 급하게 선두에 선 기사를 쫓는 모양새였다.
“저자는…….”
선두에 선 기사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자, 로한의 진영에서도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기사의 검은 갑주와 등에 메인 거대한 태도. 그리고 옆에 끼고 있는 몇 자루의 단창까지.
최근까지 전선에서 악명을 떨치던 유명한 자가 혈혈단신으로 성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검은 악마!”
“델크로스의 검은 악마다!”
“황태자다! 델크로스의 황태자다!”
우우웅-
검은 갑주의 기사가 단창 하나를 뽑아들었다. 단창이 불길한 검붉은 오러에 휩싸이자, 성벽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친놈인가? 아직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창을 던지겠다고?
“쏴, 쏴라! 궁수들은 뭣들 하는 거냐! 저놈을 어서 쏴!”
당황한 레오나드의 명이 떨어지자.
휘리리릭-
하늘을 시커멓게 덮으며 공중으로 치솟은 화살들이, 잠시 후 무시무시한 가속을 받으며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 그러나 역시 사정거리가 조금 모자랐다. 기사는 단창을 조준한 자세 그대로 유유히 화살 밭을 지나쳐 달렸다.
“이런 젠장……!”
궁수들이 재빨리 화살을 재장전하는 동안 50미터는 더 거리를 좁힌 황태자가, 드디어 조준하고 있던 단창을 집어 던졌다.
콰아아앙!
오러를 흩뿌리며 무서운 기세로 날아든 창이 성문 바로 앞바닥에 내리꽂힌다. 간발의 차로 성벽에 닿지 못했지만, 깊게 패여 나간 땅을 보는 병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 저게 인간이냐?”
“발사 준비! 발사 준비!”
수백 발의 화살이 다시 일제히 허공으로 치솟는다. 황태자는 등에 메고 있던 태도를 뽑아들고, 오러로 넒은 검막을 만들어 화살 대부분을 튕겨냈다. 그러나 집중적으로 퍼부어지는 엄청난 양의 화살을 모두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히히히힝! 말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는 낙마하여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한 바퀴 구르고 일어나는가 했더니.
쿠아아아앙!
또다시 날아든 단창이 이번에는 성벽의 정중앙에 제대로 틀어박혔다.
“이런 미친……!”
갑주에 두어 개의 화살이 꽂힌 채로, 검은 기사는 다시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속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온몸에 검붉은 오러를 피워 올리며 계속해서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집요한 모습은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재장전을 기다리는 기사단장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출렁였다.
아멜리아는 성벽에 서서, 레오나드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로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었다. 무감할 대로 무감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가늘게 떨렸다.
그녀 스스로도 포기한 자신의 목숨을, 그 누군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지가 될 것이 분명한 곳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오고 있다.
휘리리릭-
화살의 비가 다시 한번 황태자를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에 이에 맞선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진영을 무단이탈한 황태자를 쫓아 달려온 한 무리의 기사들이, 황태자에게 공격이 집중된 사이에 겨우 그를 따라잡아 일제히 방패를 들었기 때문이다.
타다다다다닥. 방패를 얽어서 만든 차폐막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못쓰게 된 방패를 집어 던진 정체 모를 기사 하나가, 무려 황태자 전하께 악을 지르는 소리다.
레오나드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닿을 수 있을까? 이곳까지 닿을 수 있겠느냐?”
황태자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원을 둘러 진을 만든 기사들은, 그 상태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직사 거리에 들어와 두서없이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지만, 일행 모두가 상당한 수준의 오러 유저인지 번갈아 검막을 펼쳐가며 용케도 성벽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황태자는 바닥을 구르다가 투구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맨얼굴을 드러낸 채 정신없이 화살을 쳐내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와 나이를 먹으며 조금 더 날카로워진 턱선. 아멜리아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생소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화살에 스치기라도 했는지 옅은 금발의 반이 피에 젖어 있다.
“…모레스.”
어릴 때부터 서로 간에 정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저 아이는 저렇게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닿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의 서로 닮은 회색 눈동자가 마주치는 동시에.
순간. 모레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푸욱-
오른쪽 가슴으로 후끈한 통증이 전해졌다.
“……!”
아멜리아는 고개를 내려 가슴에 박힌 단도를 응시했다. 초라한 드레스 위로 붉게 번져가는 핏자국이 마치 피어나는 꽃잎처럼 비현실적이다.
단검을 쥔 손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오나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절망적인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입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네가 저들에게 그렇게 소중하다면, 어쩌겠느냐. 내가 보내주는 수밖에. 하나…….”
“…….”
“…절대로 너를 무사히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투욱.
레오나드의 손아귀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성벽 끝에 서 있던 그녀는, 슬쩍 밀쳐지는 것만으로 손쉽게 성벽 밖으로 밀려났다.
“아멜리아!”
저 멀리서 모레스가 비명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뒤집힌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짓말처럼 평온한 파란 하늘이다. 새 한 마리가 구름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의식이 멀어졌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 비명 소리,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살이 갈라지는 소리.
“…아멜리아, 아멜리아! 누님! 정신 차려!”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아멜리아는 눈을 떴다.
쿨럭! 기침을 내뱉음과 동시에 가슴이 타는 듯이 쓰려온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양측의 병력이 충돌하는 전장의 한가운데. 모레스가 누워 있는 아멜리아의 옆에 주저앉아, 건틀렛을 벗은 손으로 단검이 꽂힌 가슴께를 누르고 있다.
“모……!”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단검이 폐를 상하게 했는지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리고, 울컥울컥 입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쉬….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누님. 상처가 벌어진다고. 떨어질 때는 어떻게 잘 받은 거 같은데, 찔린 곳이 그리 좋지 않아서…….”
자꾸 버둥거리려는 아멜리아를 가만히 내리누르며 모레스가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잠시 후면 아버지가 올 거야. 그 양반한테는 이런 상처 따위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어. 누님도 잘 알잖아?”
그러는 동생의 얼굴도 긴장으로 창백해진 것은 마찬가지. 그는 아멜리아를 안심시키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확신을 주고 싶은 듯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 참아. 아멜리아. 조금만 더 견디면, 아버지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거야…….”
아아, 성황 폐하. 아버지.
그를 생각하자, 메말랐을 아멜리아의 눈가에 수년 만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끝까지 레오나드와의 혼사를 반대하여 결국 의절을 하다시피 출가를 한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기별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아멜리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죄책감을 용케도 알아챈 모레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멜리아. 그 양반은 늘 누님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어. 조금도 누님에게 화나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얼굴 보면 그냥 모른 척하고 웃어주기만 해. 알았지?”
“…….”
“얼마 전 로건을 잃고 어찌나 낙담을 하던지, 좀 무서울 정도였다니까. 누님까지 잘못되면 그 양반이 어디로 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 양반한테는 누님이 필요하다고.”
모레스답지 않은 부드러운 어조에 아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방금 전부터 아멜리아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있었다. 초점 없는 회색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얘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걸까.
“…그리고 이참에 대충 사과도 좀 해둘까. 어릴 때 철없이 누님한테 막말하고 괴롭힌 거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모레스를 찬찬히 살피던 아멜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주 보고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등 뒤 갑주에는 이미 수십 개의 화살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그 자신이 흘린 피였던 것이다.
아멜리아는 그가 성벽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화살 빗속으로 뛰어들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어째서 그녀에게는 다른 상처가 없는지, 어째서 화살 하나 스치지 않았는지.
그 찰나의 순간, 모레스는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아멜리아를 위해 쏟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전하!”
“아무튼 맨날 지멋대로 튀어 나가지? 응? 황태자님아, 너 여기서 나가면 두고 보자!”
“폐하께서 곧 오십니다! 전하!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아멜리아는 조금씩 잦아 들어가는 모레스의 숨소리를 느끼며 무력하게 흐느꼈다.
아아. 나 때문이구나.
내가 제멋대로 로한으로 와버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계속해서 불리한 외교를 해야 했고, 황태자인 나의 동생은 빤히 예정되어 있는 사지를 향해 달려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그들의 짐이 되어 죽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