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5)
성황의 아이들-105화(105/469)
§ 105. 오르토나 내전 (4)
공화파의 순교자.
공화파 최후의 검 앞에서 내뱉기에는 조금은 과격한 표현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공화 진영은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심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으니.
갑작스러운 소년의 발언에 오히려 저스틴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가엘은 화를 내는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소년의 말은 시류를 제대로 꿰뚫는 것이었던 터.
처음 중앙 오르토나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 약간의 혼란은 있었지만 오르토나는 이내 안정을 되찾았었다.
약 2년간 신정부는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해왔고, 지방의 귀족들을 향한 회유도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적어도 왕당파의 잔당이 어중간하게 건드리는 정도로 쉽게 내전이 불붙었을 리는 없다.
오르토나의 내전에는, 공화파의 몰락을 바라는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대륙의 권력과 자본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거대한 손이.
이제 와서 걸출한 소드 마스터 혼자 날뛰어 본들 그 결과를 바꿀 수는 없을 것. 총명한 베니시오 왕자가 깊이 절망하여 매일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오르토나 국왕의 요청에 의해 브르타뉴 군대가 참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차분히 울리는 소년의 목소리를 가엘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공화정부 수립 후, 브르타뉴로 망명한 오르토나의 국왕은 그들에게 서쪽 영토의 일부를 약속했다. 백 년도 전에 오르토나에 할양된 그들의 옛 영토를 말이다.
브르타뉴 왕실이 발 벗고 나서기에는 충분한 구실이다.
“그러나 애초에 백 년 전 영토 할양을 중재한 것이 바로 델크로스의 성황이죠. 이번 반환 건 역시 그들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르토나의 상인 연합 역시 거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왕당파를 지지하고 있다.
왕당파의 묵인하에, 수도를 포함한 오르토나 남쪽 지역 일부를 독립된 자유무역지대로 선포하겠다는 명목이다. 그 자유무역지대는 물론 델크로스와의 접경 지역이 될 것이다.
“역시 겉으로는 아세인 대공을 주축으로 형성된 상인 연합이지만, 아세인은 어디까지나 델크로스를 사이에 끼고 움직여야 하는 제3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국이 아니라면 굳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는 겁니다.”
가엘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를 향해 소년은, 그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담담히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델크로스 제국이 있습니다. 장군.”
천년의 성국, 델크로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군주가 다스리는 땅이자, 오르토나의 공화정부를 누구보다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을 곳.
가엘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거스를 수 없을, 시류 그 자체를 만들어가는 대륙의 보이지 않는 손.
소년이 의미 없는 싸움이라 말한 이유는 그것이다. 델크로스가 공화정을 없애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이미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가엘은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을 뜻밖의 사람에게 확인받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아직 어린 친구가 참으로 훌륭한 식견을 가지고 있군.”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할 거냐고?
공화파 잔당의 수장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베니시오 왕자가 결단을 내릴 때까지다.
공화파의 순교자가 될 거냐고?
물론 그는 공화파 최후의 검. 공화파의 완전한 상징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공화파가 완전히 몰락했다고 제국이 여길 수 있도록.
“자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의미 없는 몸부림으로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때로는, 알고 있음에도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는 걸세.”
가엘은 이미 그의 끝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번지는 희미한 미소를 본 소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자, 자아. 이쯤에서 이제 그만들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오늘 장군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어서 돌아가서 쉬셔야죠.”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공기를 보다 못한 저스틴이 호들갑을 떨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내일 상쾌한 기분으로 만나 아까의 위험수당을 다시 의논하는 겁니다.”
가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위험수당? 그것이라면 이미 포기한 것 아니었던가?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저스틴의 얼굴이 순간 진지해졌다.
“무려 왕당파에 신성 제국이 손을 보태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덕분에 위험이 배가 되었으니 수당 역시 당연히 원점에서 재논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가? 가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년이 서늘한 눈으로 저스틴 단장을 노려보았다.
“누가 개입을 했건 결과가 달라지나? 대체 뭐가 당연하다는 거지?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면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 야…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아무리 임시라지만, 넌 지금 애스트로스 용병단이라고! 왜 번번이 장군님의 편을 드는 거야?”
저스틴이 정말로 억울해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가엘이 저도 모르게 그를 거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단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적어도 그는 진심을 말했네. 그러니 내일 다시 차근히 의논해 보세.”
그러나 소년은 단호했다.
“저자의 진심을 믿으십니까?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기억이나 감정조차도 스스로 왜곡시킬 수 있는 자입니다.”
“와… 바트, 너 정말 이러기냐?”
저스틴이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가엘은 잠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다가, 난데없이 소년으로부터 신성력을 나눠 받기까지 한 후에야 겨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트, 요즘 참 너답지 않은 거 아냐?”
가엘이 용병단의 막사를 떠난 후,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저스틴이 소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슬쩍 미간을 구겼을 뿐이다.
그 역시 최근에는 평소의 자신과 많이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적당히 용병단에 힘을 보태는 정도로 끝냈을 것을, 앞장서서 적장의 목을 따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단지 가엘 장군이 대단히 피로해 보인다는 이유로 남들 앞에서 잘 쓰지 않는 신성력까지 사용했지.
무엇보다도 가엘 장군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것저것 질문하고 참견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소년은 어쩐지 가엘 장군이 대단히 신경 쓰였다.
저 사람은 동부 최강의 검. 분명 누구보다도 강한 어른이건만 이상하게도 자꾸 막연하게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이상한 기분을 느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내전이 길어지고 있지. 이제 상인 연합에서도 서서히 투입하는 자본을 조절하게 될 거야.”
저스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렇다는 말은?”
“슬슬 다른 의뢰를 알아보라는 거다.”
소년은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는 막사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르토나의 영토는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과육을 찢어 나눠 먹는 일만이 남았을 뿐.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예견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애스트로스 용병단을 고용하여 후원하던 밀로 백작이 돌연 고용 중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선이 예상외로 팽팽하게 유지되자, 밀로 백작의 뒷배였던 아세인 대공이 그에게 압박을 넣었으리라.
조만간 다른 용병단을 보내겠다는 답을 받았지만, 가엘이 보기에 앞으로 그로부터 더 이상의 후원은 없을 듯싶었다.
그리고 애스트로스 용병단이 철수하기 전날, 단장 저스틴은 가엘을 찾아와 그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네었다.
“그간 장군님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은 용병단의 특별한 고객님께만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손톱만큼 작은 보석이 들어 있었다.
이름 없는 잡보석처럼 보였는데, 희고 깨끗한 것이 햇빛을 받자 제법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이건 어디 쓰는 건가?”
“행운을 비는 부적입니다. 지니고 있으면 피로가 풀린다더군요.”
“……?”
어딘가의 이교도가 할 법한 말이다.
가엘은 별생각 없이 넘겨 버렸지만, 그로부터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단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심코 상자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닌 후, 그간 만성적으로 쌓여 있던 피로가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러와 주변의 기운에 민감한 가엘은 그 효과가 정말로 부적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신성력을 나눠 받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곧 보석은 그가 늘 들고 다니는 아르쥬나의 검집 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애스트로스 용병단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전선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 가엘은 더 이상의 용병단 충원 없이 홀로 전선을 유지하다시피 하며 6개월가량을 더 버텨냈다.
* * *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 검을 쳐낸다.
짓쳐 들어오는 창을 피하고 연이어 눈앞의 적을 베어낸다.
더 이상 오러가 흐르지 않는 아르쥬나는 날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이제는 숫제 베는 게 아니라 적의 살을 뜯어내고 있었다.
눈앞이 일순 흐려졌다가 시야가 회복되었다.
정신, 차려!
오러가 고갈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 가엘은 숨을 쉴 틈도 없이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휘둘렀다.
이 손이 아르쥬나를 무겁다고 느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쳐낸다. 피한다. 찌른다. 벤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긴 시간 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그러다 보니 문득 쏟아지던 화살비가 멈추어 있었다. 조용해진 사위를 알아챈 가엘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공화파의 진영에서 서 있는 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의 주위를 풀 플레이트를 차려입은 여러 명의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창술에 특화된 정예 부대인 듯, 길쭉한 방패와 날카롭게 벼려진 창을 겨누는 기세들이 예사롭지 않다. 검 날이 무뎌지고 오러조차 없는 그는 아마도 저 기사들의 간격을 넘어 갑주를 뚫어낼 수 없을 것이다.
가엘은 끝을 예감했다.
“과연 동부 최고의 검이라더니 명불허전이오, 가엘 장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덩치가 좋은 다른 기사들보다도 키가 머리 하나는 큰 자다.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왕당파 연합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닷새라는 시간이 걸리다니…….”
닷새. 생각보다 오래 버텼구나.
지금쯤이면 그가 빼돌린 일행들이 국경을 넘어 멀리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벌었을 것이다.
가엘은 그제야 몸에서 힘을 빼고 검을 든 팔을 늘어뜨렸다.
“…귀관은?”
“나는 천년의 성국 델크로스의 친위대 3기사단장, 사일러스 아젠. 당신 하나를 위해 부러 여기까지 파견되었소. 이런 식으로 목숨을 거두게 되어 매우 안타깝소만.”
보통이 아닌 자라 생각했더니, 과연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자였다.
갑주와 창의 양식이 조금 낯설다 했더니, 설마 델크로스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곧 가엘의 사방에서 창이 날아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전 방위에서 날아든 창 모두를 피할 수는 없었다.
콰드득.
급소를 노리고 들어온 창들이 박혀드는 파육음이,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커다랗게 들려왔다.
완전하게 소모되어 버린 그의 몸은 빠르게 남은 생명을 쏟아냈다.
가엘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아르쥬나를 받아들며, 사일러스 아젠이 그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당신의 무위를 기억하겠소. 부디 편히 쉬시길.”
그렇게 공화파 최후의 검, 가엘은 안드레스 평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천천히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 뭔가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가엘도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죽음 직후 몸을 떠난 그의 영혼이 눈부신 하얀빛에 휘감겼고, 그것이 무척 포근했다는 정도의 감상이 남아 있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가볍게 쓰다듬었던 것도 같다.
[그리 미련하게 버틸 필요가 있었느냐?]조금은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한 물음.
가엘은 누구인지도 모를 그에게 괜히 미안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요령이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 그는 그렇게 사는 방법뿐이 알지 못했다.
작은 한숨 같은 기척과 함께, 이윽고 목소리는 그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아들아.]아들?
의아해할 틈도 없이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점멸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 * *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하니 자신이 델크로스인으로 다시 태어날 줄이야.
그것도 모든 일의 원흉인 델크로스 성황가의 1황자가 되리라고는.
‘…이제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작은 아이의 단정한 얼굴에 깊은 고뇌의 기색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