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6)
성황의 아이들-106화(106/469)
§ 106. 적국의 황자로 사는 법 (1)
카프란 대주교의 외동딸이 유학길에 아비 없는 아이를 배었다!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카프란은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의 딸 타티아나는 어릴 적부터 예쁘고 똑똑하여 카프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소녀였다.
신성력이 없어 고위 사제가 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행정부 요직 하나 정도는 꿰차고 휘두를 정도의 재원이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큰돈을 들여 브르타뉴의 대학으로 유학까지 보내었건만.
아직 나이도 어린 것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을 하고.
아이를 가져?
그는 뒷골을 잡고 분을 억눌렀지만, 정작 배가 불러 돌아온 그의 딸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제 일생에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분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아버님.”
그게 지금 외동딸을 유학 보냈다 뒤통수를 맞은 애비에게 할 말이냐!
그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딸을 호적에서 파내 버리고 싶었지만, 타티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행복에 겨워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난리를 쳐도 들어먹는 눈치가 아니다.
‘…일단 그 죽일 놈을 찾자. 찾아 죽이자!’
카프란 대주교의 눈은 딸의 미래를 시궁창에 처넣은 쓰레기를 향한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아이 아버지의 정체를 듣기 전까지는.
“나다니엘 황자… 라고?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냐?”
3황자는 수년 전 행방불명이 된 후 모두가 죽었다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거기다 불임이 아니었나?
그러나 타티아나는 확언했다.
“제가 그분을 잘못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 왔으니까요.”
“그런데 그분은 너보다 세 살은 어리지 않았더냐? 그가 맞는다면 이제 겨우 열일곱…….”
“…….”
어쩌면 정말 나쁜 것은 그의 딸이었을지도.
예상치도 못한 일로 잠시 당황했지만 카프란은 곧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마침 수도는 1황자와 1황녀, 그리고 2황자의 다툼이 물밑으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상황. 1황녀 조세피나의 세력은 영 미덥지 못하고, 2황자 브레이든의 경우는 최근 이상한 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지금까지 카프란 대주교는 1황자 카메론을 차기 성황으로 점치고 있었지만, 혹시나 이 구도에 3황자가 등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주축으로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여 그를 성황으로 추대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의 딸은 3황자의 아이를 가졌다.
성직자치고는 남다른 정치적 감각과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던 카프란 대주교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리에 3황자의 행방을 쫓으며, 한편으로 조금씩 그의 세력을 늘려가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타티아나가 건강한 사내아이, 로건을 낳았던 날.
갓난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그 환한 축복의 빛을 본 카프란은, 그의 손자가 누구보다도 강한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보여주는 다재다능한 모습들.
그 타고난 기품과 총명함.
그의 손자는 황태자가 될 것이다!
로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카프란의 눈은 숨길 수 없는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래서 그의 손자가 그 작은 머리로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카프란 대주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또 다른 생이 주어진 이유는 뭐지? 이 삶이 가지는 의미는 뭘까?’
다른 아이라면 아직은 엄마 젖이나 먹을 나이. 단정하고 예쁜 얼굴을 한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혼자 이유식을 떠먹으며 이런 고뇌를 하고 있었다.
* * *
로건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는 전생을 자각하고 있었다.
단지 신생아의 신체적인 한계로 밥 먹고 조금 고민하려 하면 졸음이 쏟아지고,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 또 자는 생활이 이어졌을 뿐.
그가 조금 진지하게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몸을 가누게 되고 나서였다.
그는 자신이 델크로스인으로 환생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충격에 빠졌다.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도 당황스러운데, 왜 하필이면.
거기다 그의 새로운 몸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엘이었던 시절부터 세기에 둘도 없는 천재라는 말을 듣곤 했지만, 이 새로운 신체는 그야말로 오러 연공에 최적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러 친화력이 높았다. 오죽했으면 아기가 밥을 먹고 잠만 자도 오러가 쌓였을까.
어머니나 사용인들 몰래 틈틈이 명상을 하며 로건은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그의 어머니 타티아나나 외조부 카프란 대주교는 오러 친화력이 그저 그런 보통의 사람. 그렇다는 말은 아마도 아버지 쪽을 닮은 것 같은데, 대체 이 몸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누구일까?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로건이 네 살이 되기 전, 한동안 수도가 소란스럽다 싶더니만 델크로스에 새로운 성황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외조부와 어머니가 로건의 손을 잡아끌고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머니?”
로건의 물음에 그의 어머니 타티아나가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로건. 우리는 마침내 그분을 만나 뵙게 되었답니다.”
그분이요?
“나다니엘 클라인. 델크로스의 새로운 성황 폐하이시자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로건.”
아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 몸의 아버지가 델크로스의 성황?
로건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도착한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황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황의 앞에 서게 된 로건은 그야말로 혼이 빠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황궁 홀.
옥좌에 앉아 로건 일행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단정한 얼굴의 청년은, 놀랍게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바트!’
기억 속의 모습보다는 키가 훌쩍 크고 더 어른스러워졌지만, 그때의 그 인상 깊었던 소년을 로건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델크로스의 건국 이념은, 주신의 대리자를 통해 이 세상에 주신의 왕국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오직 성황 한 사람에 의한 통치 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예전 가엘에게 델크로스의 상황에 관해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던 차분한 소년.
-다른 나라에 추기경을 파견하여 내정을 관리하는 것 또한, ‘주신의 대리자에 의한 온전한 통치’라는 이념에 바탕을 둡니다. 따라서 공화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순간, 제국은 건국의 목적과 내정 간섭의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조국 오르토나에 일어난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이자, 대륙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흉으로 주저 없이 델크로스를 지목하던.
-아마도 이 땅에 진정으로 공화정이 꽃피려면 우선 필연적으로 델크로스가 무너져야 할 겁니다.
그 소년이 지금 새로운 델크로스의 성황이 되어, 수많은 고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당당하게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이다.
혼란과 배신감, 그리고 슬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순식간에 로건의 작은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아이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외조부와 어머니는 순전히 그가 황궁의 규모에 압도되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서 인사를 드리지 않고 무얼 하나요, 로건. 당신의 아버지, 성황 폐하십니다.”
“…….”
“아아, 송구합니다, 폐하.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대답이 없는 것은 성황 또한 마찬가지. 바트의 회색 눈은 조금 크게 뜨인 채 가만히 로건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알 수 없는 침묵에 카프란 대주교와 타티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
성황이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로건과 시선을 맞추고 있는 채였다.
일순 그의 눈에서 묘한 은빛의 광채가 지나간 듯 보였다.
그는 그렇게 로건에게 한 걸음 거리까지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지그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마침내 입을 연 성황의 목소리는 조금 낮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건.”
그 희박한 온기가 어쩐지 무척이나 다정하게 느껴져서 로건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 *
로건은 청장미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배다른 형제인 모레스와 함께.
그리고 성황을 첫 대면한 충격이 가시자 아이는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무려 적국의 황자가 되었다.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내전을 일으킨, 그리고 마침내 조국을 갈가리 찢어버린 원흉.
그 제국의 1황자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그의 나쁜 버릇이 튀어나왔는데, 그는 델크로스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대륙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려 하는 입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델크로스를 막 멸망시킨다거나, ‘조국의 원수!’를 외치며 성황가의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겠다던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며 바트의 사정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듣자 하니 어린 시절부터 암살 위험에 시달리다 홀로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던가. 그러다 선대 성황과 형제자매가 모조리 죽어 혼란스러운 마당에, 수도가 악마종에게 잠식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황위에 올랐다 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아이는 앳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고심했다.
모든 사람의 입장을 빠르게 이해하는 로건은, 결국 그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델크로스와 성황가에 복수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황자로서 당당한 제2의 인생을 살자니, 전생의 조국의 몰락과 그의 죽음에 얽힌 악연의 고리가 너무나 깊다.
‘날더러 뭘 어쩌란 말이야…….’
아이는 머리통을 감싸 쥐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로건의 고민은 그리 길어지지 않았다. 청장미궁의 그 누군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통에.
“우아아아앙!”
“꺄아아악! 모레스 황자님!”
“의원을! 아니, 어서 사제를!”
청장미궁에서는 모레스의 울음소리와 사용인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대체 이 아이는 뭐가 문제인 거지?
어차피 다치면 자지러지게 울 거면서 왜 매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걸까?
어찌나 화려하게 사고를 처대는지, 모레스의 어머니인 1황비가 아세인으로 가출을 해버리고, 성황이 집무실을 청장미궁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가엘이었을 시절에도 조숙한 아이였던 로건은 도무지 모레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덩치는 듬직하게 큰 주제에 뭘 하든 어리바리한 형님도 하나 생겼다.
“음, 마음이 가는 곳에… 오러가…….”
“…….”
“거대한 공허 위에… 의념이… 그러니까…….”
아, 답답하다. 마사인이라고 했던가?
이 형님은 왜 이렇게 하는 것마다 어설퍼서 보고 있는 내가 더 스트레스일까. 게다가 묘하게 의기소침해 보여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어느새 로건은 마사인을 따라다니며 그를 챙기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생에 외동아들이었던 가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번잡함이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로건은 그들과 함께 옹기종기 청장미궁의 임시 집무실에 모여 앉아 호두를 주워 먹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앉은 성황은 무려 자신의 애검을 들고는 또각또각 잘도 호두를 깨주고 있다.
이 사람, 이런 성격이었던가.
“아빠마마, 부웅 해줘! 부웅!”
호두를 먹다가 질린 모레스가 성황의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린다.
이러다 버릇 나빠질까 잠시 고민을 하는 눈치였지만, 성황은 곧 한숨을 쉬며 아이를 공중으로 휘익 집어 던져 주었다.
꺄하하하하!
곧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감싸인 모레스가 둥실둥실 내려오더니, 성황의 품속으로 폭하고 떨어져 내린다.
로건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곤 했는데, 예민한 그의 감각은 저 바람이 순간순간 실체화되는 오러의 흐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로건의 몸으로 오러의 흐름을 느꼈을 때 그 친화력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성황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예전 오르토나의 전장에서도 기이할 정도의 오러 숙련도라고 느끼곤 했었지만, 지금은 숫제 성황의 몸이 오러 그 자체가 된 듯 느껴졌던 것이다. 대체 그 몇 년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까마득한 경지에 이른 것일까.
“아빠마마! 부웅! 또 부웅!”
모레스가 보채자 그는 또 아이를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냉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은근히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에 약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몇 차례 더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멍하니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성황이 로건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떠하냐. 로건?”
“…예?”
“한번 해보겠느냐?”
예?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로건의 몸은 모레스와 함께 허공을 날고 있었다.
어라?
휘이이이. 포근한 오러의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며 속도를 줄여주자, 성황이 다시 그를 위로 휘익 띄워 올린다.
로건이 천천히 떨어지는 동안 이번에는 모레스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꺄르르륵!
어, 조금 재미있는 것 같기도…….
아니, 그렇지만!
잠시나마 즐겁다고 느낀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에 빠져 있던 로건은, 문득 마사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숨을 들이켰다. 덩치가 산만 한 마사인 형님이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성황이 그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