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6)
성황의 아이들-116화(116/469)
§ 116. 스카르차피노 (3)
처음에 이사벨라는 모레스 황자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멜리아 황녀와 함께 들어온 훤칠한 소년은,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으니까.
“…어? 어어?”
막상 황궁 마차와 머리 색만 보고 모레스 황자라고 외쳤던 영애는, 부채로 가리는 것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리며 말을 더듬었다. 심지어 옆의 아가씨는 눈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눈두덩을 벅벅 비비기까지 한다.
그곳에, 마치 이야기 속에나 나올 것 같은 황자님이 있었다!
아마도 리자베스 황비를 쏙 빼닮은 날카로운 눈매나 독특한 머리 색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소년이 모레스 황자임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본래라면 제가 누님에게 맞춰야 하는 게 아닙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아, 모레스.”
“그러면요?”
“의상실 간의 위계도 중요하지. 살롱 드메르시는 델크로스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이란다.”
3황자는 다른 황자 황녀들과의 불화로 유명했는데, 지금 보니 뭔가 잘못된 소문 같았다. 팔짱을 끼고 나란히 들어오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으니까.
화사한 외모의 남매가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의상실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충격으로 뻣뻣하게 얼어붙은 영애들을 뒤로 하고, 황자와 황녀는 마담 쥬스티느의 과한 환대를 받으며 특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뱉은 영애들이 이내 둑이 터지듯 환성을 토해냈다.
“어머! 어머머머, 세상에!”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죠? 어떻게 사람이 잠깐 사이에 저렇게 바뀔 수가 있나요? 눈으로 빤히 보고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지금 보니 황자님 역시 확실하게 성황가의 일원이군요! 폐하와 리자베스 황비님을 골고루 닮으셨어요!”
“발루아의 꼬마 아가씨가 목을 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영애들의 눈이 일제히 이사벨라를 향했다.
그녀들의 시선은 이제, 뚱땡이 개망나니와 구색으로 혼담이 오가는 졸부의 딸에서, 황자의 간택을 받고 신분 상승을 앞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을 보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
이사벨라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영애들의 앞에서는 놀란 가슴을 숨기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보시다시피 저하께서는 열병에서 완전히 쾌차하셨답니다.”
“아, 네에.”
“호호,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그러나 그 이후로도, 충격으로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 이사벨라의 심장은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혼담이 오가는 상대의 근황을 전혀 몰랐다는 민망함.
외모가 변하자마자 보란 듯 자신을 퇴짜 놓았다는 배신감.
자신을 볼 때와는 다른, 아멜리아 황녀를 향한 황자의 다정한 시선.
그래서 정작 기다리던 지그스문트 대공자가 도착했을 때, 영애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격한 탄성이 터져 나왔음에도, 이사벨라는 이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순순히 즐길 수가 없었다.
“두 분 모두 의상의 톤을 조금 밝게 바꿔보는 것이 어떠신지요?”
디자이너가 여러 개의 고급 원단을 앞에 두고 제안했다.
“올해의 연회복은 최대한 붉은 빛을 피하고 연한 원단을 쓰는 것이 트렌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금 버튼이나 장신구가 평범한 금처럼 보이거든요.”
“적금?”
“예, 공자님. 이번에 아세인 공국에서 수입된 귀한 금속입니다. 저희 의상실에도 극히 소량이 입고되었을 뿐이죠. 그 고귀한 가치를 생각하면, 두 분의 드높은 품격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장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래, 적당히 알아서 하도록.”
대공자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이사벨라는 조용히 곁눈질로 그를 관찰했다.
오르덴 지그스문트.
지그스문트 변경백의 후계자이며 그 유명한 발타자르 경의 수제자. 젊고 늠름한 천재 검사.
평소 개인적인 친분 없이 큰 행사에서나 안면을 익힌 것이 다였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소문에 듣던 것 이상으로 냉철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마치 북부 영지의 차가운 공기를 델크로스까지 두르고 온 듯 한기를 풍기는 남자다.
이사벨라를 향한 그의 태도는 비교적 정중했으나 그것이 전부. 이따금 그녀의 얼굴에 닿아오는 오르덴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척박한 북부에서는 속된 말로 이사벨라처럼 눈 돌아가는 미인을 보기가 힘들 텐데.
“한데, 그렇게 고쳐서 시간에 맞출 수 있는가?”
“대공자님은 가문의 대수장을 착용하셔야 하니, 옷의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두고 사슈와 견장만 조금 손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스카르차피노 영애의 경우는…….”
거기까지 말한 디자이너가 슬그머니 이사벨라의 눈치를 보았다.
“대공자님의 연회복과 맞추려면 플라운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위의 원단을 교체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재단부터 새로 해서 다시 가봉 일정을 잡아야 할 듯하여 조금…….”
“…….”
“아, 물론 저희 의상실에서 최선을 다해 일정을 맞추겠습니다! 영애께서 조금만 양해해 주신다면 아마도 이번 탄신연에서는 두 분이 황도 최고의 한 쌍이 되시리라고…….”
이사벨라가 잠시 침묵하자 오르덴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이견은 없나? 스카르차피노 영애.”
아마 정말로 이견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아닐 터.
지난 수년간 황도의 사교계를 평정하며 나름 사람을 대하는데 도가 튼 이사벨라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보다 못한 무언가를 한없이 깔아보는 메마른 시선.
오르덴의 눈에서는 그녀를 향한 호감이나 존중은커녕, 일말의 온기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마치 모레스 황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교계의 꽃, 델크로스 최고의 미녀.
그런 찬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들이 생각하는 그녀의 주제라는 것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네. 디자이너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하죠.”
최근 연이어 예상치 못한 일이 자꾸만 생겨서일까.
오랜 사교계 경력이 무색하게, 어쩐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 * *
처음 드레스 코드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멜리아였다.
뭘 그런 번거로운 짓을 다 하나 싶었지만, 연회복 디자인에 조금이나마 포인트를 맞추는 것이 파트너에 대한 예의라나.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성진의 디자인에 맞추겠다며 몸소 의상 디자이너를 대동한 채 그를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성진은 아멜리아와 나란히 살롱 드메르시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본래라면 제가 누님에게 맞춰야 하는 게 아닙니까?”
신분이 낮은 쪽이 높은 쪽을, 연배가 낮은 쪽이 높은 쪽을 따라간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아멜리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모레스.”
“그러면요?”
“의상실 간의 위계도 중요하지. 살롱 드메르시는 델크로스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이란다. 그러니 다른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마담 쥬스티느를 오라 가라 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러자 아멜리아의 다자이너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네, 황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 의상실의 입장까지 헤아려 주시다니 이 얼마나 사려 깊으신지요! 게다가 마담 쥬스티느는 남성복 전문 디자이너이긴 하지만, 드레스를 보는 안목에도 일가견이 있는 걸로 유명하죠. 그의 말을 들으면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글쎄다, 정작 마담 본인이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그 안목이라는 것이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만.
“이번 기회에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전부터 늘 궁금했단다.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아멜리아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특히 지난번 네가 보여준 그 나비 무늬 의상은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어.”
그 옷이 좀 파격적이기는 했다.
그랬는데 막상 마담 쥬스티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아멜리아는 뭔가 크게 당황하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성진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 입을 다무는 게 아닌가.
“모레스…….”
그리고 마담이 잠시 자리를 뜨자마자 성진에게 조심스레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왜일까? 나는 어쩐지 저 사람이 조금 꺼림칙하구나.”
어라?
“…누님도 그런가요?”
“너도 이상하다고 느끼니? 왠지 자꾸 저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하게 되는구나. 분명 오러 활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음, 그렇군요.”
마왕의 말에 따르면 마담 쥬스티느는 규상세계의 몸에 본상세계의 영혼이 깃든 인간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그런 자세한 것을 알 리는 없겠지.
아마도 성진이 처음 마담을 봤을 때 그의 감이 날카롭게 경보를 울린 것처럼, 아멜리아 역시 모종의 감으로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것이리라.
성진은 새삼스레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성황이나 로건 같은 괴물들만 보다 보니 간혹 잊어버리는 것이, 실은 아멜리아 역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수련 방식이 극도로 효율적이기까지 하지.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어, 모레스.
그녀는 하루 종일 수련에 매달려 봤자, 성진처럼 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했다. 그래서 수련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정 시간 이상을 수련에 투자하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명상을 하고, 알현 시간에는 성황에게 직접 오러를 체득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편법을 써가며 연공 효율을 높인다.
그리고 거기서 절약한 시간을 다른 곳에 쏟아부었다.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교사를 초빙해 공부를 한다.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낭독하고, 아카데미의 강연장을 찾는다.
검술 한 우물만을 깊게 파도, 이런 속도라면 언젠가 충분히 대륙 강자의 반열에 들 수 있을 텐데.
대체 아멜리아는 뭘 하고 싶은 걸까. 혹시 초인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이건 목표를 향한 긴 여정이야. 복수라는 탑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가는 과정이지.
힘들지 않은지를 물었더니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어쩐지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모레스. 복수를 향해 달려가는 이 과정이 나는 무척이나 즐겁구나.
뭐, 본인이 즐기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그녀의 무재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성진은 그녀에게 나직하게 일러주었다.
“글쎄요. 어쩌면 그의 진짜 무기는 오러가 아닐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저자는 아마도 강한 자입니다. 여러 의미에서요.”
“역시 그렇구나.”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저자는 아버지의 통제하에 있으니까요.”
처음 마담을 소개해 준 것이 쌍둥이들인 것을 감안하면, 아마 지금도 아렌쟈가 그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성진의 말에 아멜리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새 원단과 디자인 북을 들고 마담이 특실로 돌아왔을 때, 아멜리아는 이전과는 다르게 가감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연회는 연한 색이 트렌드입니다아. 아마도 크림색이나 물빛…….”
“나는 이 검은색 천이 끌리는데.”
“어머, 이것은 단지 플라운스나 리본을 만들기 위한 포인트 원단일 뿐입니다아. 자, 저하아. 그러지 마시고 여기 이 원단들을 좀…….”
“하지만 마담. 어쩐지 검은색이 멋진데.”
“그러나 저하아. 적금 장신구와 함께 하려면 차라리 이 옅은 에메랄드의 원단이…….”
“모레스랑 둘이서 나란히 검은색으로 맞추면 좋겠는데.”
“저기, 저하! 주신의 대리자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축하하는 탄신연에, 이렇게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은 좀…. 누가 보면 악마 숭배자라고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마담 쥬스티느가 정색하고 외쳤다. 심지어 말끝이 더 이상 늘어지지 않는 것이, 지금 엄청 진지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아멜리아는 오히려 조금 상기된 볼을 하고서는 배시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와, 델크로스의 악마라니, 뭔가 멋져…….”
“…….”
아, 이것 역시 잊고 있었는데.
이 누님, 중2병 취향이었더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