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8)
성황의 아이들-118화(118/469)
§ 118. 스카르차피노 (5)
사근사근한 말투와 다정다감한 미소.
평소 한 송이 봄장미처럼 늘 황궁에 온화한 바람을 몰고 다니던 아멜리아 황녀가, 지금은 몹시도 낯선 표정을 지은 채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멜리아 누님?”
또각또각.
찌를 듯 예리한 기세를 온몸에 두른 그녀의 모습은 마치 사방으로 날카롭게 결정서리를 뻗고 있는 얼음꽃 같았다. 싸늘하게 식은 무기질의 눈동자가 성황의 그것을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온 아멜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성진과 청년의 간격 안에 발을 들였다.
또각.
“……!”
무형의 격렬한 공방이 오가며 잔뜩 날이 선 공기.
오러 연공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초심자를 벗어난 수준의 아멜리아에게는 무척이나 버티기 힘든 압박감일 터.
한차례 눈을 마주친 성진과 청년은,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서서히 기세를 줄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멜리아가 두 사람의 코앞까지 걸어왔을 때, 둘은 완전히 투기를 거둬들인 채 대치를 종료하게 되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청년이 아멜리아를 향해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인다.
델크로스의 귀족이라면, 성황이 각별히 아낀다고 알려진 이 아름다운 황녀님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을 것.
그런 그를 잠시 응시하던 아멜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가 먼저 예를 취해야 할 대상을 잊은 것은 아닌가요? 이 이상 성황가의 일원에게 무례를 보인다면 저도 더 이상은 대공자의 사정을 봐드릴 수가 없습니다.”
“…….”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리를 굴리는 듯, 청년의 눈에 일순 복잡한 기색이 스쳐 갔다.
아멜리아의 동생이며 성황가의 일원이라면 나오는 답은 간단한 것. 그럼에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뚱땡이 개망나니의 인상이 너무나도 달라졌기 때문일 터였다.
잠시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피던 청년은 이내 경직된 표정으로 성진을 향해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이런 뻣뻣한 놈 같으니.
“오냐.”
“……!”
청년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한차례 비웃어준 성진이 아멜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왜 여기까지 내려오셨어요, 누님?”
그러자 그녀가 성진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기세를 흩뿌리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니? 한참 재미있을 때 끼어들어서 미안해, 모레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지그스문트 대공자의 체면을 구겨 버렸다면, 사람들은 필시 변경백의 적장자를 상대로 사려 깊지 못했다며 너를 탓했을 거란다.”
“……?”
그녀의 대답에 일순 오르덴 지그스문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자신은 델크로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유망한 천재 검사로 알려져 있건만, 그럼에도 황녀는 자신의 어린 동생이 그를 이겼을 것이라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와……!’
그리고 성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멜리아 누님은 저렇게 화를 낼 때조차 천사처럼 상냥하구나!’
[…대체 네 상냥함의 기준이?]털썩!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바닥으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청년에게 협박당하고 있던 여자였다.
주변을 압박하는 무시무시한 기세에서 해방되자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고 만 것.
“아… 아아!”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목소리도 제대로 내질 못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떠는 그 딱한 몰골에 속으로 혀를 차는데, 아멜리아가 성진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레스. 내가 대공자를 데리고 자리를 피할 테니, 부디 네가 그녀를 좀 돌봐주렴. 일단 진정되면 특실로 데려가서 보호하는 것이 좋겠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님 쪽이 그녀도 안심되지 않을까요?”
성진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난처한 듯 웃었다.
“네게 그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모레스, 이번에는 네가 돕는 것이 그녀에게도, 또 남들 보기에도 좋을 거란다. 너와는 혼담이 오가는 사이니까.”
…네?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 스카르차피노 영애는 수년간 너와 탄신연을 함께한 네 약혼녀야.”
“……!”
아, 맞다, 그 스카르차피노!
어쩐지 이름이 낯설지 않다 했어!
성진이 경악하고 있는 가운데, 아멜리아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청년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그럼 지그스문트 대공자. 그대는 잠깐 저를 좀 보실까요?”
입을 꾹 다문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청년이, 잠시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노려보더니 마지못해 몸을 돌린다.
그럼 잘 부탁해.
아멜리아는 눈짓으로 성진에게 한 번 더 당부하고는 이내 청년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
어, 난감하다.
졸지에 여자와 둘만 남겨진 성진이 잠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음… 이봐, 괜찮은가?”
그러자 멍하니 앞을 향하고 있던 여자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되찾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성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레이디 이사벨라? 일어설 수 있겠어?”
성진이 몸을 숙이며 묻자 여자의 눈이 일순 커다래진다. 그러더니 어어 하고 입을 뻐끔거리다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어, 언제부터…….”
“응?”
“언제부터 절 레이디 취급해 주셨다고……!”
뭐야? 도와준다는데 왜 시비야?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성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자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으흐흑!”
성진은 기겁했다.
울어? 갑자기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런데 펑펑 울면서 그녀가 이어서 내뱉는 말이 가관이었다.
“왜, 왜 갑자기 이렇게 다정한 척하시는 거죠? 지금 놀리시는 건가요?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어?”
“매번 그렇게나 절 무시하더니! 아예 사람처럼 보지도 않았으면서!”
“…….”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왜 저랑 다르게 꼬맹이 계집애한테는 잘해준다고 소문이 다 나냐고요! 으흐흐흑!”
…잘은 모르겠지만, 개망나니 모레스의 업보에 휘말린 또 하나의 피해자였나 보다.
그 후로도 이사벨라는 한참을 울었다.
보다 못한 성진이 손수건을 내밀었더니 팽 하고 코까지 잔뜩 풀어냈다.
그리고서 하는 것이 두서없는 하소연이었다.
“흑! 으흑! 저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전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까는 막, 이상하게 너무 무섭고 진정이 되질 않아서… 흑!”
일반인이 그렇게 흉흉한 오러에 노출됐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성진은 그렇게 설명하는 대신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하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훌쩍, 정말 최악이야! 흐흑! 어쨌든 오늘 일은 절대 남들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훌쩍.”
“…….”
“훌쩍! 그래도 오해하지 마세요! 잘 아시잖아요? 전 사교계의 꽃! 그 우아하고 고고한 스카르차피노라고요!”
와, 그게 자기 입으로 할 말이냐.
성진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는지, 이사벨라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아이 씨!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려니까 완전 민망해…. 다시 생각해도 리카르도 오라버니는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훌쩍.”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훌쩍거림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때 성진은 복도 쪽으로 다가오는 몇몇 사람들의 기척을 감지했다. 의상실의 손님들인 듯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잠시 그들과의 거리를 가늠한 다음, 성진은 이사벨라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레이디 이사벨라.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계속 여기 있을 건 아니지?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어.”
이사벨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성진을 살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황자의 눈은, 이전과는 달리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온전하게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럼 실례하겠어요, 저하.”
잠시 주저하던 이사벨라는, 주섬주섬 머리며 옷매무새를 매만지더니 곧 빨개진 얼굴로 민망해하며 성진의 손을 맞잡아왔다.
한편, 아멜리아는 살롱 드메르시의 입구를 향해 오르덴을 이끌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는 그녀를 따라 한참을 걷던 오르덴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멜… 대체 어디까지 갈 셈…….”
“사적인 자리라고는 해도 제대로 예의를 갖추셔야 할 겁니다, 대공자.”
오르덴을 돌아보지도 않고, 아멜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착각해선 곤란해요. 나는 이제 성황가의 일원. 더 이상 백작가 다락방에 갇혀 지내던 그 작은 계집애가 아닙니다.”
오르덴의 무뚝뚝한 얼굴에 일순 시무룩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은… 그것은 모두 할머님의 지시였다. 그때는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너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
“하지만 가문의 모두가 거기에 동조한 것은 아니야. 우리는 그래도 너를…….”
“두 번 경고하지 않아요. 예의를 갖추세요.”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아멜리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오르덴을 마주 보았다.
“아마도 대공자와는 다시는 사적인 자리를 가지지 않을 것 같으니 지금 여기서 똑똑히 말해 두죠. 지금에 와서 지그스문트 백작가의 입장을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과도 할 필요 없어요. 난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
“어차피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니까요.”
오르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아…….”
“피차 서로 같은 생각인 것 같으니 얘기는 여기서 끝내죠. 나 역시 그대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아버님 폐하께서 그곳에서 날 꺼내주셨던 그날까지, 나는 백작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 탄신연에서 또 봐요. 살펴 가시길.”
싸늘한 축객령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잠시 아멜리아를 바라보던 오르덴은, 곧 순순히 예를 취하고는 몸을 돌렸다.
딸랑.
그가 나가고 입구의 문이 닫힌 후.
그제야 긴장이 풀린 아멜리아는 가늘게 떨리는 양손을 감싸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대했으나, 그녀에게도 역시 잠시나마 거칠게 충돌하던 기세 싸움에 노출되었던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르덴을 마주한 순간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으나, 그렇다고 그 시절의 일들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닐 터.
그래서 아멜리아는 오르덴이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를 찾아 내려온 성진이 그녀를 부를 때까지.
“누님, 왜 그러고 서 계세요?”
“…모레스.”
아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스카르차피노 영애는 어쩌고 여기까지 왔니?”
“대충 진정한 것 같아서 나왔습니다. 누님이 너무 늦는 거 같아서요.”
“설마 걱정한 거니? 어째서?”
“어째서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그런 난폭한 놈이랑 같이 나갔는데, 제가 걱정이 안 되겠어요?”
“…….”
아멜리아는 잠시 성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곧이어 작은 깨달음과 함께, 얼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듯 그녀의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너에게 나는 이렇게도 분명한 의미가 되는 거구나. 그때 그날도, 그리고 오늘도.”
“……?”
“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모레스.”
성진의 팔을 가볍게 감는 아멜리아의 손은 어느새 떨림이 완전히 멎어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특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이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서는 의외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레이디 이사벨라가 거울 앞에서 시침핀을 들이밀며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던 것.
“당장 기세를 거두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드레스 고정핀을 그냥!”
그러더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울을 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흠, 이게 아닌데…….”
이번에는 시침핀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고는, 다른 한 손을 허리에 척 걸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 시침핀이 어떤 흉기가 되는지 직접 체험하게 해드리겠어요! 그러니 당장… 헉!”
거울에 비친 성진과 아멜리아를 발견한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시침핀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는.
“꺄악!”
팔에 박힌 시침핀을 보며 비명을 지른다.
“…….”
저 사람, 사교계의 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요즘 델크로스의 사교계에서는 스탠딩 코미디 같은 게 유행인 건가?
* * *
그날 저녁,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이사벨라는 곧바로 그녀의 둘째 오라버니를 찾았다.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리카르도가 언제나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래, 잘 다녀왔니? 황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벨라야?”
“…아,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시라고요, 좀!”
팔에 잔뜩 돋아난 소름을 한차례 문지른 이사벨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은 오라버니, 오늘 의상실에서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이상한 일?”
“네, 그 지그스문트 대공자가…….”
그녀는 리카르도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순조롭게 의상을 맞추던 중 그가 갑자기 확답을 받고 싶다는 말을 한 것. 영문을 모르고 대답을 피하자 돌변하여 그녀를 협박하던 것.
“…분명 뭔가 오라버니에게 들은 것이 있을 거라고… 오라버니? 듣고 계세요?”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표정의 리카르도를 알아챈 이사벨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여동생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잘 다녀왔다니 다행이다. 이제 모두 잊고 편히 쉬려무나. 이사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