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9)
성황의 아이들-119화(119/469)
§ 119. 나비 (1)
“말씀하신 이단 재판부의 실종자 명단입니다. 저하.”
다샤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 한 장씩 넘기던 성진이 말했다.
“생각보다 수가 적은데?”
“예. 사고 규모에 비해 신원 미상의 시신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검토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헤이즈 사제에 관한 조사를 의뢰했었지만, 수일이 경과했음에도 생각보다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는 시골 깡촌 교회에서 달랑 추천서 한 장을 들고 상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암흑 교단 숙청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막 이단 재판부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암흑 교단 잔당과 이렇다 할 접점도 찾을 수 없었다고.
거기다 헤이즈는 극도로 말수 적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은커녕 업무적인 의사소통도 거의 없이, 이단 재판부 내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결코 단독으로 저지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지…….’
조나단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일단 이단 심문관 하나와 그를 구타한 두 명의 간수, 그리고 진술을 기록하던 사제 하나까지 최소 네 명이 한패였다.
거기다 지하 감옥의 죄수 대부분이 회색 역병 환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한두 팀이 벌인 짓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헤이즈에게는 분명 동료가 있었거나, 혹은 그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집단이 이단 재판부 내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계획이 어그러진 이상, 이미 줄행랑을 쳤을 가능성이 커.’
베니투스 추기경이 눈에 불을 켜고 암흑 교단의 색출에 나서고 있는 지금, 괜히 이단 재판부에 남아 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성진이 실종자 명단에 주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볼프강 하급 사제, 클레멘스 하급 사제, 인퀴지터 파비안… 흠.”
실종자 9인의 명단을 검토한 성진은 그중 다섯을 골라 다샤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들을 수소문해 보자.”
마침 실종된 인퀴지터는 하나. 거기에 회색 역병 발병 전후로 배속된 사제 네 사람을 더한 명단이었다.
“네, 저하.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에휴, 사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네?”
“…어, 아냐.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
사실 요즘 조사 의욕이 바닥을 치기는 했다.
성황이나 쌍둥이는 아마 모든 전말을 알고 있겠지. 하다못해 아렌쟈 역시 이들 패거리의 신상이나 규모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브루노 단장을 통해 이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을 때, 아렌쟈가 보내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렌쟈로서의 경력이 짧은 브루노 단장이 대충 짐작하기로는, 뭔가 인력을 벗어난 정보를 발설하는 데는 어떠한 반동 같은 것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는 결코 좋은 방향이 될 수 없다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발로 뛰라 이거지?’
아니, 답을 옆에 빤히 놔두고 이게 대체 무슨 삽질이야?
성진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서류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다샤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갑자기 주춤하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저, 그런데 저하.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응?”
“요즘 그 옷을 즐겨 입으시는군요. 그런 옷이 취향이십니까?”
“아, 이거?”
성진은 옷자락을 쭉 잡아당기며 물었다.
“다샤가 보기에도 좀 요란하긴 하지?”
아닌 게 아니라 성진은 지금 마담 쥬스티느의 최신작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호랑나비 무늬가 들어간 무지갯빛 찬란한 의상이다.
“이게 보기는 좀 그래도 생각보다 편하더라고.”
탄신연 기간을 위해 맞춘 연회복을 제외하면 아마도 이 옷이 가장 최근에 맞춘 것이다.
마담 쥬스티느의 솜씨는 꽤나 훌륭한 것이어서,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잔뜩 들어가 있음에도 성진이 가진 옷들 중 제일 편안하고 몸에 잘 맞았다.
‘거기다 요즘 키가 자라고 있기도 하고.’
아쉽게도 맞춘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발목과 소매가 댕강해질 기미가 보인다.
그래서 가급적 본전은 뽑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진주궁 내에서는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는 중이지.
“왜? 그렇게 별로야?”
“아, 아뇨. 참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다 싶어 그냥 여쭤봤습니다.”
다샤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친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다샤.”
성진이 그녀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 나간 브르타뉴인 같다던가, 베르트랑 거리의 광대 같다던가, 머리에 꽃만 달면 이교도의…….”
“…아, 아닙니다! 그럼 조사에 진척이 생기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저하!”
다샤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게 이상하냐?’
[좀 전위적이긴 하지?]확실히 디자인 분야에 문외한인 성진이 보기에도, 이 나비 무늬는 어딘가 과하게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도안이긴 했다.
살롱 드메르시에는 전문적으로 도안만 그리는 직원이 따로 있다고 듣긴 했는데, 대체 누가 이런 도안을 만드는 걸까.
* * *
“와! 너희들 봤어? 낮에 우리 의상실에 그 지그스문트 대공자가 다녀갔어!”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재봉실 안.
살롱 드메르시의 직원들은 오늘도 밀린 밤샘 작업을 하며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정말 근사한 분 아니니? 분위기 자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더라.”
“가문의 늑대 문장이 어쩜 그렇게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런 분의 에스코트라니 정말 부럽다. 난 단 하루만이라도 그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가 되어 보고 싶어!”
그러자 옆에서 그녀들의 수다를 조용히 듣고 있던 한 아가씨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 너희들은 참 부러울 것도 없다.”
“이서, 너는 부럽지 않아?”
“응, 전혀.”
이서라고 불린 아가씨는 작업 중이던 도안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델크로스에서는 보기 드문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의 눈을 가진 이국적인 외모의 아가씨였다.
“안타깝게도 스카르차피노 영애에게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질투하는 악역 포지션이거든.”
“질투하는… 뭐어?”
직원들이 어리둥절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이서. 그녀는 얼마 전 살롱 드메르시에 들어온 신입 직원이었다.
황도에 정착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녀는 간혹 델크로스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묘한 말들을 하곤 했다. 직원들은 대충 그녀의 고향식 농담인가 하고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
“무엇보다도 그녀는 대공자의 타입이 아니야.”
“…네가 지그스문트 대공자의 이상형을 어떻게 알아?”
“그래. 스카르차피노가의 아가씨는 황도 제일의 미녀 중 하나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조금은 날 선 직원들의 질문에, 서이서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타입은 언제나 정해져 있지. 순수하고 다정다감하면서, 이따금 예상치 못한 곳에서 톡톡 튀는 여자 말이야.”
“…톡톡?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흐음, 글쎄? 예상 못 한 타이밍에 그의 앞에서 넘어진다거나, 차를 엎지른다던가.”
“어엉?”
“아니면 술주정 같은 걸 하면서 울거나, 갑자기 그의 뺨을 친다던가?”
무슨 쓸 만한 정보가 나올까 싶어 쫑긋 귀를 곤두세우던 직원들이 졸지에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야, 그게? 다짜고짜 대공자의 뺨을 친다고?
그는 대륙에서 가장 유망한 검사이자 북방의 대귀족이라고. 그 자리에서 댕강 목이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킥킥킥. 이서 쟤는 가끔 진짜 이상한 말을 해.”
직원들은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다음, 잠시 놓고 있던 바느질감을 집어 들었다.
“기억나니? 이서는 지난번 개선식 때도 그랬잖아. 뭐랬더라? 로건 황자님은 얼굴은 정말 멋진데 인품이 훌륭해서 끌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뭐어? 그게 진짜야?”
“흥. 개인의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세요.”
서이서는 새초롬하게 대답하며 작업하던 도안에 다시 코를 박았다.
“그럼 이서는 역시 지그스문트 대공자 같은 분이 더 좋은 거야? 무정한 분위기의 나쁜 남자 타입.”
“글쎄, 어떨까? 오늘 보니 좀 멋있긴 하더라. 하지만 차가운 북부의 대공자가 흑발이 아니라서 조금은 의외였어.”
“……?”
북방의 대공자와 흑발이 대체 무슨 관계야?
직원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서이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도 난 오늘 모레스 황자를 보고 좀 놀랐어. 서술로 읽는 것과 실제로 보는 모습은 뭔가 많이 다르더라. 외모로는 오히려 그쪽이 좀 더 취향이랄까? 서브병이 또 도졌나 봐.”
“뭐어어?”
직원들이 순간 일제히 바느질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얘가 지금 제정신인가?
“너, 모레스 황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그… 나쁜 매력이 있는 사람과, 천하의 개망나니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쟤가 델크로스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질 않아 이런저런 사정을 잘 모르는구나!
직원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이서에게 쏟아진다.
“후후,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서는 다시 슥슥 도안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겉으로는 망나니처럼 굴지만, 알고 보면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아픔을 잘 이해해 주는 여자에게 끌리게 되는 거야.”
“…내면에 상처?”
어안이 벙벙해진 직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눈짓을 한다.
횟수를 더할수록 쟤 헛소리가 점점 다채로워지는데?
“아차! 이러다간 캐릭터 붕괴가 되겠네. 너무 입이 근질거려서 나도 모르게 그만.”
“……?”
“하긴, 지금 이런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니.”
이윽고 또 다른 나비 날개 하나를 완성한 그녀는 어딘지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뭐, 탄신연이 끝나고 나면 곧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 * *
에메랄드궁.
2황비 멜로디가 기거하는 이 화려한 별궁은, 초록이 우거진 넓은 정원과 작은 유리 온실이 있는 아름다운 궁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황궁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게 된 시슬레는 이 유리 온실 내 카우치에 파묻혀 오전 종일을 뒹굴거렸다.
“얘, 시슬레야.”
옆에서 딸의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멜로디가 타이르듯 말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시간을 보내줘서 기쁘긴 하지만,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하지 않니? 곧 폐하와의 알현 시간이란다.”
그러나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고 눈을 감은 시슬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뒤로 미루면 되죠.”
“하지만 얘야. 너무 오래 궁을 떠나 있었잖니? 모처럼의 알현인데 폐하께서 섭섭해하실 거란다.”
“돌아오자마자 인사도 드렸어요. 안 그래도 요즘 사신단 알현이다 뭐다 한창 바쁘시던데, 얼굴 뵈었으니 그걸로 됐어요.”
더없이 완고한 시슬레의 태도에 결국 딸을 설득하기를 포기한 멜로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참, 아이들은 언제 이렇게 쑥쑥 크는지 모르겠구나. 하루 종일 폐하의 옷자락만 붙잡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
“그거 아니, 시슬레? 어릴 때 넌 네 발로 잘 걸으려고 하지도 않았단다. 언제나 아버지 품에 안겨 있으려고 고집을 부렸어. 폐하께서 정무회의에 들어가실 때마다 널 떼놓느라 얼마나 진땀을 빼셨는지 모른단다.”
가만히 누워 멜로디의 손길을 받으면서 시슬레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늘 비슷한 풍경이다.
햇볕 아래 희게 빛나던 법복 자락과 그것을 쫓아가려 종종걸음치던 자신.
그리고 이따금 그녀를 확인하듯 뒤를 돌아보는 성황의 얼굴.
차라리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황비마마, 황녀님.”
그때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다가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부 전선에서 온 서신입니다.”
그리고는 시슬레를 향해 흰 봉투가 놓인 작은 쟁반을 공손히 내민다.
멜로디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머, 이번에도 오웬 황자인가?”
“예, 친히 황녀님께 드리는 서신입니다.”
시슬레는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켜, 조금 반가운 마음으로 서신을 펼쳐 들었다.
-시슬레에게.
장기 심방길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황궁에 돌아왔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쉽게도 나는 이번 탄신연에도 황궁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남부 전선은 안정되어 있지만, 아직 내가 자리를 뜨기에는 이곳의 기류가 조금은 불안하구나.
볼란타 부족과는 이제 막 교류를 트기 시작했다. 치쿠타르쿠 족장은 꽤나 점잖고 현명한 사람이라 앞으로도 좋은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단지 주변의 다른 부족장들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 언제든 다시 충돌할 위험이 다분하단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조만간 아버님과 네게 선물을 보내마.
추신. 언제나 몸조심하렴.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아버님께 의논드리는 것 잊지 말고.
옆에서 함께 서신을 들여다보던 멜로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쩜, 그가 이렇게도 널 지극정성으로 챙기는지 모르겠구나. 참으로 고맙기도 하지.”
그러나 서신을 모두 읽어 내린 시슬레의 얼굴은 더없이 어두웠다.
오웬 오라버니, 그거 아세요?
난 가끔 폐하가 너무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