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1)
성황의 아이들-121화(121/469)
§ 121. 성녀의 시련 (1)
서이서는 눈앞에 새로 생성된 하얀 방문을 열다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막 마이홈 모드를 깔고 실행했을 뿐인데, 비어 있어야 할 방 안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신 누구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무도 초대한 적 없는데…….”
그러나 침입자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홀린 듯 방 안을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견고하고, 아름답군.”
어딘가 묵직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다.
그는 반가면을 쓴 키가 큰 남자였다. 길게 풀어헤친 반백의 머리에, 마치 사제복 같이 치렁치렁한 옷을 걸치고 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하관의 주름을 보건대, 나이가 그리 적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팔랑팔랑. 파란 나비 두어 마리가 남자의 주위를 맴돌 듯 날아다닌다.
“…혹시 임펄스 소프트 관계자신가요? 하지만 아무리 사내 알파 테스트라고 해도, 개인 공간에 멋대로 침입하는 건 불법이라고요! 이봐요, 듣고 있어요?”
서이서가 경계하며 외쳤다.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벽 한쪽에 놓인 책장으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책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놀라워. 작은 집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차원이라. 이렇게 작디작은 규상세계가 정말로 탄생할 수 있다니. 그 오랜 세월 차원을 넘나들었으나 이런 건 처음 보는군…….”
그렇게 한동안 책의 질감을 음미하던 남자는, 이윽고 서이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대가 이 차원의 왕인가? 대체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든 거요?”
네? 뭔 왕요?
“…전, 그냥 마이홈 확장팩을 깐 것뿐인데요. 임펄스 소프트 직원이신 것 같은데, 원한다면 당신도 알파 테스트를 신청하세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는 듯 말하는군.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는 이런 작은 규상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오?”
남자가 말하는 규상세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가상공간을 말하는 것이려니 생각한 서이서는 눈치껏 대답했다.
“그야, 마이홈 확장팩이 이제 막 개발되었으니까요?”
“허허…….”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공허하게 울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느새 숫자가 더 늘어난 나비들이 그 소리에 반응하듯 흔들흔들 나부끼며 날아올랐다.
“그럼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묻겠소. 어째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이 그곳과 같은 것이지?”
“그곳이라뇨?”
“그 시끄럽고도 화려한 세계. 판게아 클로니클의 차원 말이오. 사물의 척도와 질량, 질감, 시간의 흐름… 모든 것들이 그곳과 동일하오만.”
서이서가 인상을 썼다.
뭐야? 이 인간, 임펄스 소프트 관계자가 아니었나?
“그야 같은 호문클루스 통합 엔진을 쓰고 있으니까요. 물리 엔진이 동일한 거잖아요.”
“엔진… 그래, 그것을 엔진이라고 하던가…. 참으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규칙들이오!”
나직한 탄사를 내뱉은 남자는, 이내 눈을 감고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마치 방 안의 공기 한 톨조차 제대로 음미하고 싶다는 듯이.
일단 회사에 신고부터 넣을까.
서이서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내 눈을 뜬 남자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란 서이서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가… 갑자기 뭐예요?”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무언가의 인연. 내 그대를 나의 새 연대기의 주인공으로 삼고 싶소만.”
“…네?”
영문을 몰라 반문하자, 반가면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입매가 길게 휘어진다.
“마침 잘된 일이라고 할까, 당신도 꽤나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듯 보이는구려.”
어느새 남자의 손에, 책장에서 뽑아낸 책 몇 권이 들려 있었다. 서이서가 미리 마이홈에 연동해 둔 전자책들이었다.
-가짜 성녀인 내게 남주가 집착한다.
-성녀는 마왕을 길들인다.
-성녀인 내가 본의 아니게 어장관리 중입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서이서의 볼이 붉어졌다.
모두가 자신의 소중한 컬렉션들이었지만, 이 편중된 독서 취향이 남들에게 보이기 썩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남자의 다음 말에 그녀의 눈이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졌다.
“최근의 나는 감수성이 제법 풍부해진 상태라,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어떻소? 부디 내 새로운 이야기의 성녀가 되어주겠소?”
…성녀?
그리고.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갑자기 푸른 날개의 나비 떼가 서이서의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 * *
황도의 신민을 사건 참고인으로 소환하는 데는 약간의 절차가 필요하다.
수도 경비대나 이단 재판부 등 특정 공권력을 가진 기관을 통해야 하며, 소환의 이유와 근거를 문서로 명백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
다짜고짜 살롱 드메르시로 찾아가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남들이 보기에 무고한 자를 추궁하는 모양새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만에 하나 도안 디자이너가 도주를 시도했을 때, 그를 합법적으로 억류할 수단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마사인의 설명이었다.
‘마사인 경, 은근히 명분에 목을 맨다니까…….’
조금 번거롭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사람을 무력으로 끌고 와야 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데에는 성진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서 그는 마사인을 비롯한 상주기사 몇몇과 함께 수도 경비대를 찾았다.
“그러니까 그 의상실의 직원이 이전의 마물… 사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성진의 출동 요청에 수도 경비대장이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소. 이는 황도의 안위를 위협하는 중차대한 일이니, 부디 수도 경비대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리오.”
마사인이 옆에서 무게를 잡으며 거들자, 성진이 거기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무엇보다도 금서로 지정한 [이계 묵시록]에 실린 마물이 도안으로 사용된 거야. 조사 여부에 따라 이단 재판부로 넘겨야 할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지.”
이단 재판부까지 언급되자, 그제야 수도 경비대장은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수도 경비대를 함께 출동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응?”
“이 요상한 건 대체 누구 옷입니까?”
수도 경비대장은 성진이 증거랍시고 들고 온 호랑나비 무늬 의상을 조금은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 내 옷인데? 왜?”
“…….”
성진을 보는 경비대장의 시선이, 골칫덩어리 개망나니를 보는 눈에서 희대의 또라이를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뭐야? 이 고차원적인 패션 센스를 못 알아보겠냐? 어?
[…처음엔 네가 제일 질색한 주제에.]입다 보니 정이 가더라. 옷은 뭐니 뭐니 해도 편한 게 최고더라고.
어쨌든 경비대장은 무장 기사 셋을 포함한 열 명의 대원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건물 입구에 도열해 있는 경비대원들을 대표로 인솔하게 된 성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랄까, 공권력이 내 손에 있으니 뭔가 든든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데 그 든든한 경비대원들이 막상 성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찔끔 놀라며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응? 얘들은 또 왜 이래?
[얼마 전에 수도 경비대원들을 쥐어팬 건 그새 잊어버렸냐?]쳇, 나도 모르는 새 공권력과 척을 진 건가.
그리고 살롱 드메르시로 향하던 성진은 곧 데스테 거리 초입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로건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정교회 쪽에서는 그 직원을 바로 이단 재판부로 압송해서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군.”
신분이야 어쨌든 로건은 현재 성 바스티안 기사단 소속. 따라서 공식적인 활동 내역은 정교회와 기사단장에게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그렇게 기사단에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났던 놈이, 돌아왔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흰 기사단 정복을 챙겨 입은 한 무리의 성기사들이 서 있었던 것.
정복에 새겨진 푸른 검과 백합을 보건대 성 바스티안 놈들인 것 같은데,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는 딱딱한 얼굴들이 하나같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말 안 통하기로 유명한 놈들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리고 고맙게도 릴리움의 기사들이 자진해서 돕겠다며 와주었어.”
그런데 로건이 그들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자, 릴리움 기사들의 얼굴이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사코 괜찮다고 사양했는데도, 황도를 위해 언제나 솔선수범하며 나서주는 이들이다. 그야말로 신민을 위해 봉사하는 성기사의 귀감이 아니겠어?”
“어어, 그래…….”
성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로건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놈들의 눈은 이제, 초롱초롱 빛나다 못해 빔이라도 쏘아낼 기세다.
성기사의 귀감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네 녀석의 열렬한 팬들로 보이는데, 내 착각이냐?
어쨌든 생각보다 대규모가 된 인원을 이끌고 성진은 살롱 드메르시에 도착했다.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 앞에 갑자기 다수의 기사들이 진을 치자, 지나가는 행인들이 호기심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기웃거린다.
마침 마담 쥬스티느가 자리에 없어, 대신 지배인이라는 자가 나타나 정중히 용건을 물어왔다.
“아아, 그 도안 디자이너 말씀이군요. 서이서라는 직원입니다.”
변변한 경력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담이 데려와 고용하게 된 직원이란다.
입사 경위가 매우 수상한 것이, 어째 마담을 함께 족쳐야 할 것 같은데?
“마침 지금 근무 중입니다.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저하.”
지배인은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자리를 떴다.
서이서.
델크로스식이 아닌, 성진에게는 조금 익숙한 형식의 이름이다.
찜찜한 예감에 성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곧이어 다른 점원의 인도로 가게 입구에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가게 앞에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 예스러운 동작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서이서라고 합니다.”
도안 디자이너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젊은 아가씨였다.
조금 수수하지만 예쁘장한 얼굴.
검은 머리에 어딘가 친숙한 동양적 외모.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은 제법 경건해 보이기까지 해서, 순간 저 여자가 정말 마물 사건 관련 참고인인지 눈을 의심할 정도다.
‘…어라?’
성진은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 오라버니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검은 머리의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에게 좀 끌리는 것 같아?
불현듯 시슬레에게 들었던 말이 머리를 스친다.
이상한 예감에 여자를 응시하고 있자니, 그녀가 성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생긋 미소를 흘렸다.
‘뭐지?’
어쩐지 기분 나빠진 성진이 눈썹을 찡그리는데, 어느새 일행의 앞으로 다가온 여자가 정숙한 태도로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황궁에서 저를 찾으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성녀] 그라지에 님의 인도이십니다.”
그 말과 동시에.
찌르르. 뭔가가 심장을 건드리는 듯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성진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웅성웅성. 그러는 사이 지나가던 행인들이 점점 살롱 드메르시 앞으로 모여들었다.
묘하게 변한 주변의 공기를 감지한 성진이 주위를 둘러보니, 행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도 경비대원과 릴리움 성기사들까지, 뭔가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먼저 저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주신]께 맹세코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찌르르. 이상한 파동이 한 차례 더 성진의 가슴께를 스치며 지나갔다.
“…….”
그리고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데스테 거리.
성진 일행을 포함해 주위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며 여자를 응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사인까지도 뭔가에 홀린 듯 멍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직 로건만이 놀란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성진을 돌아보았다.
“후후…….”
서이서라는 여자는 마치 이러한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일행을 한차례 훑듯이 살핀 후, 여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을 증인으로 시련 재판을 요구합니다. 저는 [성녀]의 시련을 받겠습니다.”
찌르르. 또 한 번 퍼져 나가는 미세한 파동.
좌중이 경악으로 얼어붙은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성진만이 눈을 깜박거렸다.
왜? 성녀의 시련이 대체 뭔데?
[이성진.]그때 마왕이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분명해. 저 여자, 규상세계의 인간이다.]…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