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4)
성황의 아이들-124화(124/469)
§ 124. 성녀의 시련 (4)
웨스커 대주교는 서신을 닫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어찌나 골치가 아팠던지, 진작 없어진 오른쪽 눈알이 또 빠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성황의 갑작스러운 명령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뜬금없이 성녀라니…….’
성녀 후보가 나타났으니 검증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멀쩡한 사람 하나를 번듯한 성녀로 포장해서 며칠 안에 내놓으라는 말.
‘대체 이분은 정교회나 성회를 뭘로 생각하시는 걸까.’
그러나 성황 폐하의 명이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니 분명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게 결론 내린 웨스커는 빠르게 머리통을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적당한 시골 교회 하나를 찾아 추천서를 만들고, 성녀가 일으키는 기적을 겪었다는 목격자를 두어 명 섭외한 다음에, 오후에 바로 주교들을 소집해서 대충 의결을 하고, 성회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마이어 추기경 각하께도 슬쩍 언질을…….’
교리나 규칙 따위 개나 주라는 계획이었지만, 옛날부터 그녀와 성황은 이런 면에서는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리 원칙을 고수하는 베니투스 추기경과는 달리, 웨스커는 언제나 실리를 우선시하는 편이었으니까.
치세 초기의 성황과는 자주 이런 사고를 치곤 했었지. 그걸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마이어 추기경의 혼비백산한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따금 웃음이 났다.
쿡쿡.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기던 웨스커는, 문득 복도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성녀, 시슬레.
은빛으로 빛나는 긴 머리와 하얀 사제복.
주신께서 세상의 온갖 무결함과 순수함만을 모아 빚어낸 듯 투명하게 빛나는 소녀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복도 저 너머를 응시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시슬레 님.”
웨스커의 부름에 시슬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품에 작은 다이어리 하나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다.
“…웨스커 대주교.”
“어찌 이런 곳에 혼자 계십니까? 시스터 우슬라는 또 어쩌시고요?”
성녀를 수행하는 그 수다쟁이 시스터를 떠올린 웨스커는 이마를 짚었다.
업무 태만에도 정도가 있다. 감히 주신의 작은 축복을 이런 곳에 홀로 방치하다니.
그러나 시슬레는 말간 눈으로 웨스커를 올려다보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시스터 우슬라에게 들었어요. 새로운 성녀 후보가 나타났다고요.”
“…….”
“그녀는 성녀가 되나요?”
정말 성녀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성황이 그녀를 허락했는지를 묻고 있는 거다.
웨스커는 잠시 침묵했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슬레 님.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럼, 그녀는 저와 달리 초대 성황 폐하를 뵐 기회를 얻게 되나요?”
웨스커의 머릿속에, 방금 성황으로부터 받은 지시 사항들이 떠올랐다.
서이서를 대외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성녀로 만들 것. 그리고 탄신연 전에 취임식을 올림과 동시에 [성황의 관]을 배알하도록 일정을 잡으라고.
“…그렇게 되겠습니다.”
“…….”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후두둑, 시슬레의 맑은 회색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인형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렇기에 소녀가 느끼는 슬픈 감정이 웨스커에게는 더 절절하게 와닿았다.
“어찌…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소녀의 눈물에 당황하던 웨스커는, 곧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웨스커 대주교. 전 지금까지 정말 신민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어요. 델크로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아직도 저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거지요?”
“시슬레 님…….”
조용히 눈물만 떨구는 소녀를 웨스커는 애석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소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처음 정교회에서 시슬레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성황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슬레 본인의 확고한 의사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성녀가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성황은 마지못해 시슬레를 추대하도록 두었으나, 모든 성녀들이 의례적으로 거쳐 갔던 [성황의 관] 배알만은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하… 성녀님. 당신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성황가의 일원 모두에게 성황의 관 배알을 금하셨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랬다. 심지어 이제는 클라노스가 된 마사인마저 금지당했지.
전대 성황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연례 행사처럼 성황가 전원이 성 바스티안 교회를 찾았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알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웨스커는 이번에도 성황에게는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지레짐작하는 중이었다. 물론, 깊이 낙담한 이 작은 소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슬레 님.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은 폐하께서 가장 먼저 품에 안은 소중한 아이입니다. 저는 그날 그곳에 있었답니다. 제 평생 폐하께서 그렇게 기쁘게 웃으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
“그런 당신을 인정하지 않으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마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뜻을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웨스커는 단지 그렇게 위로하며 언제까지고 소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 *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해?
그래, 맞아. 바로 멋진 남주의 존재야.
이 소설에도 역시 근사한 메인 남주가 있어.
바로 북방 변경백의 장자이자 차가운 매력을 가진 천재 검사, 오르덴 지그스문트 대공자!
그는 가문의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며 내부의 적과 싸우고, 동시에 영지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가문을 지켜 나가는 능력 있는 남자야.
하지만 매사 무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그는, 실은 아직도 첫사랑의 기억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기도 해.
그리고 곧 성녀인 여주에게 반해 어마어마한 집착남으로 변신할 예정이기도 하지.
아아, 난 단지 이 세계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남주가 내게 집착하며 놓아주지 않는다니 무척 곤란하지 뭐야?
“그래서, 그 지그스문트 대공자는 어떻게 생겼나요? 일러스트 같은 건 없어요?”
“무척 잘생겼소만.”
“아니, 그게 다예요? 그의 피부는요? 머리 색과 눈 색은요? 훈훈한가요, 남자다운 잘생김인가요, 중성적인 미인인가요? 마치 상처 입은 사나운 맹수와 같은가요, 아니면 절벽 위에 고고하게 피어난 한 떨기 꽃과 같은가요?”
“…그런 게 그리 중요한 거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대로 된 로맨스 판타지라면, 남주의 외모 찬양으로 족히 몇 페이지는 할애할 준비를 하셔야죠!”
* * *
최근 오르덴의 심정은 무척 복잡했다.
당장 지그스문트 영지에 숨어든 수상한 세력을 쫓기에도 급급하건만, 며칠 전 아멜리아가 던진 차가운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쉬지 않고 맴돌며 심사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대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아버님 폐하께서 그곳에서 날 꺼내주셨던 그날까지, 나는 백작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아멜.
나는 언제나 너를…….
“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오르덴 님.”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드니, 헤르만이 어쩐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고 있었다.
헤르만은 오르덴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썩 충성스럽다고 말하기는 힘든 건방진 부하였다.
“그렇게 멍 때리고 계시기에는 시간이 매우 촉박하지 않습니까? 이번 탄신연 기간이 끝나면, 더는 가주님 몰래 황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오르덴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래도 대략의 감은 잡은 상태다. 조사에도 조금 진척이 생길 테지.”
“감이라니요. 혹시 가주님과 밀로 상단을 이어준 연결 고리가 스카르차피노일 거라는 억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억측이 아니야. 자체 조사를 통해 확신한 일이지.”
그러자 헤르만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자체 조사요? 설마, 얼마 전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레이디를 핍박하신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불쌍하기는 무슨. 가증스럽기 짝이 없더군.”
오르덴은 코웃음을 쳤다.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자라더니 과연, 시치미를 떼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소공자 리카르도와 함께 밀로 상단을 들락거린 것을 이미 알고 있건만,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 벌벌 떠는 꼴이라니.
오르덴은 그때까지도 만지작거리고 있던 작은 메달을 탁 하고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조잡한 거미가 아로새겨진 작은 메달.
최근 영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길한 표식으로, 오르덴은 가주 몰래 이것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지그스문트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들은, 수년 전부터 가주와 거래를 시작한 밀로 상단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오르덴은 그 밀로 상단의 뒷배로 아세인이나 스카르차피노를 용의선상에 두고 의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며칠 전 그는 리카르도 소공자로부터 이 거미의 메달이 함께 동봉된 서신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함구할 테니, 여동생의 파트너로 탄신연에 함께 참석해 달라는 협박에 가까운 편지였다.
그리고 살롱 드메르시에서 이사벨라가 시치미를 떼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지. 현재 지그스문트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스카르차피노가 깊게 개입되어 있다고.
“이 거미 문양은 역시 암흑 교단의 표식이 맞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엑소시스트로부터 들은 정보입니다만, 최근 [참회]의 교단이 북부와 동부 일대에 걸쳐 자주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헤르만은 힐끔 메달에 눈길을 주고는,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덧붙였다.
“오르덴 님. 만약 이번 사태가 정말로 암흑 교단의 잔당이 연루된 일이라면 우리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인퀴지터나 엑소시스트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오르덴이 쓴웃음을 지었다.
“헤르만. 지그스문트 가의 가주가 벌인 일들이다. 이단 재판부가 이 일을 알게 되면 과연 우리 가문이 무사할 것 같은가?”
“그래도 내부 고발인 점을 참작하지 않겠습니까? 지그스문트가 무너지면 마경을 경계하는 방어벽이 함께 사라지는 겁니다. 황도의 인사들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겠지요.”
“아니, 겨우 목숨이나마 건지면 다행이지. 이단 재판부는 일의 여파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이단을 처단할 뿐이야. 악마 숭배자들에게 빼앗기건 인퀴지터에게 박살나건, 결과적으로 가문이 풍비박산 나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휴우. 하도 상황이 답답하다 보니, 제가 실언했습니다.”
헤르만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릴리움 토벌대가 영지 근처를 지날 때, 로건 황자님과 접촉해 볼 것을 그랬습니다. 분명 뭔가 눈치채신 것 같았는데요.”
당시 해수 토벌을 마치고 돌아가던 로건 황자는 무엇을 발견했는지, 정식으로 영지를 조사해 보고 싶다 요청했었다. 물론 가주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가주께서는 토벌대가 영지 내에 잠시 머무는 것조차 불편해하셨지. 줄곧 로건 황자를 주시하고 계셨으니, 그 눈을 피해서 황자를 만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거다.”
“그건 그렇군요.”
거기다 릴리움은 성 바스티안 기사단의 별동대. 꽉 막힌 것으로 유명한 정교회의 수족이, 결코 이단 재판부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로건 황자도 딱히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정교회나 이단 재판부의 휘하가 아닌,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른 세력이 있다면 좋으련만…….”
오르덴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뭔가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헤르만이 반색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 행정부에 마물 전담반이라는 부서가 생겼다고 합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마물 전담반?”
“네. 3황자가 이끄는 곳이라는데, 교회와는 별개로 삿된 것들을 조사하는 부서라고 하더군요. 아직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특별히 성과를 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모레스 황자…….”
문득 그의 뇌리에, 그날 아멜리아의 옆에 서 있던 한 소년의 모습이 스쳐간다. 사나운 눈매에 어딘가 얄미운 표정으로 웃고 있던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년.
오르덴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와는 아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지 않았던가. 과연 그가 요청한다고 순순히 도움을 줄 것인가?
그러나 시간도, 선택지도 없었던 그에게는 마물 전담반을 끌어들이는 외에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오르덴은 결국, 헤르만을 이끌고 행정부 별관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의외로 조용히 오르덴의 설명을 경청하던 황자는, 그의 말이 끝나자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근데 맨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