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5)
성황의 아이들-125화(125/469)
§ 125. 성녀의 시련 (5)
본래 이세계 성녀쯤 되면 자고로 매력 넘치는 서브 남주들과의 썸도 중요한 것 아니겠어?
물론 나는 세상을 구할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하지만, 주위를 맴도는 많은 남주들이 하나같이 사랑을 속삭인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왕위를 잇기 위해 원치 않는 여자와 약혼했소. 그러나 내 심장의 진정한 주인은 고귀한 성녀, 바로 당신뿐이오.
로한의 왕자 레오나드.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지만, 결국 성녀에게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게 되는 매력적인 야망가지. 아름다운 왕비를 버리고 성녀에게 구애할 거야.
-이상한 일이지. 자유로운 바람이 내 영혼을 이끌고 있건만, 결국에는 언제나 이렇듯 그대에게 돌아오게 되는구려.
방랑기사 페르낭.
현재 온 대륙을 떠돌며 사랑의 대서사시를 만들고 있는 낭만 검객이야. 성황의 뒤를 이을 난봉꾼이라는 평가지만 결국은 성녀의 곁만을 맴돌게 되는 거지.
-그대의 안위가 걱정되어 델크로스를 떠날 수가 없군요. 지금부터는 해수 토벌이 아니라, 성녀의 곁을 지킴으로써 고귀한 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천재 성기사 로건 황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인상의 냉미남이지만, 막상 사랑하는 성녀에게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수 있는 상냥한 호구… 호구?
“잠깐, 호구는 좀 아니지 않아요?”
“그를 사로잡게 되면 더없이 헌신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요. 왜, 마음에 들지 않으시오?”
“아, 이분이 또 시류를 거스르는 발언을 하시네. 잘 알아두세요! 요즘은요, 다른 사람에게는 잔혹하지만 여주에게만은 상냥한! 그런 남주가 대세라고요!”
“…매우 잘생겼소만?”
“…물론 얼굴이 가장 중요한 개연성이긴 하죠.”
그리고 이 소설에는 무려, 히든 서브 남주도 있어.
-세상 모두가 날 인정해 주지 않아.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이미 예전에 나를 버렸지. 그렇지만 너는, 너만은 나를 똑바로 바라봐 주는군.
뚱땡이 개망나니 모레스 황자.
최근 마음을 고쳐먹고 몸을 단련하면서 환골탈태한 상태야. 그러나 어린 시절 입은 마음의 상처를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다가, 이를 감싸주는 성녀의 온화함에 마치 어미 새를 따르는 아기 새처럼 이끌리…….
“이건 또 뭐예요? 이 덜 자란 꼬맹이는? 세상을 구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기 새까지 돌봐야 하나요?”
“그러니까 얼굴이…….”
“오케이. 접수!”
그래. 로맨스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외모야.
못난 놈이 하면 주책이지만, 잘난 놈이 하면 모성애를 자극하는 처연미가 되지.
아, 나란 여자. 어쩔 수 없는 외모의 노예 같으니, 흑흑!
“아, 혹시라도 이자를 사로잡게 된다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소.”
“주의할 점이요?”
“그렇소. 이 황자는 여러모로 특별한 구석이 있지. 혹시라도 이자를 잘못 다루게 되면 소설 속 세상은 최악의 배드 엔딩을 맞게 될 거요.”
“아하! 그가 히든 캐릭터인 이유가 있다는 거군요? 뭘 조심하면 되나요?”
“그러니까 그는 사실…….”
* * *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이건 또 뭐야…….’
아침 수련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마물 전담반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여겼던 그 기분 나쁜 놈이 전담반 사무실에 떡하니 찾아온 것이다.
오르덴 지그스문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최소한의 예를 취해 보였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여전히 목이 뻣뻣한 놈이었다.
“오냐.”
“……!”
그래도 저 울컥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은 웃기기도 하고.
피식 비웃어준 성진이 물었다.
“근데 우리 부서에는 무슨 볼일이지?”
오르덴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마물 전담반에 고발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고발?”
“예, 밀로 상단이라고 하는 거대 상단의 만행에 대한 것입니다.”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번지수가 잘못된 것 아닌가? 불법적인 일이 있다면 재판부에 제소하면 되고, 상도에 어긋난 일이라면 행정부 내 상인 연합 관련 부서에 문의하면 되는 일을?
“지그스문트 영지는 물론 대륙 전체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삿된 것이 관여하여 영지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려워 보이니, 아무쪼록 황궁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
삿된 것.
성진은 대답 없이 오르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워낙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어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지만.
‘인퀴지터나 엑소시스트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이 아예 없는 마물 전담부를 찾아왔단 말이지…….’
이놈의 가문이 한발을 걸친 사건이구나.
가문 내부에서도 입장이 달라 자체 해결이 어려운데다, 이단 재판부로 넘어가면 책임 소재를 면치 못할 일인 거다.
“…일단 들어보지.”
성진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오르덴이 조금 불편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아. 인퀴지터 발레리 경이 신경 쓰이는 건가.
“이 사람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전적으로 마물 전담부 소속이고, 내 허락이 없는 한 이단 재판부에는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발레리 경?”
그러자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씁쓸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네 아무렴요. 저는 저하의 말씀에 절대 거스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게 왜 멋대로 금서 지정된 책들을 몰래 반출해서 마물 전담반 사무실에 숨어서 읽고 있는 거야, 이 날라리 인퀴지터야.
“흐으흐으. 저 역시도 마찬가지랍니다. 저하의 말씀이 곧 마물 전담반의 미래인 것을요.”
옆에서 샤론 경이 히죽거리자, 오르덴 놈의 안색이 더 나빠졌다.
뭔가 괜히 찾아온 거 아닌가 하고 후회하는 눈치다. 아무래도 샤론 경이 썩 제정신 박힌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
어쩔 수 없이 성진은 마물 전담반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놈이 도망가기 전에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달랬다.
“자자, 사양하지 말고 털어놓으라고. 우리 마물 전담반은 언제나 제국의 신민을 위해 활짝 열려 있으니까.”
순간 오르덴 놈이 바싹 긴장하며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응? 이놈 갑자기 왜 이래?
[와, 너 방금 엄청 사악해 보였어. 꼭 장기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종용하는 브로커 같았다고!]…닥쳐라, 쓸데없이 세세하게 현실 패치된 마왕 놈아!
경계심 가득한 대공자를 이리저리 구슬리기를 한참, 마침내 듣게 된 지그스문트 영지의 사정은 꽤나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최근 영지에 수상한 약이 유통되고 있고, 그 이후로 영지 사람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거나 갑자기 실종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마약이야?”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대륙에 알려져 있는 종류의 약은 아닙니다.”
지그스문트 변경백은 몇 년 전 밀로 상단이라는 거대 상단과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척박한 환경에 많은 생필품을 상단에 의존하고 있는 영지의 입장에서는, 박리다매를 목표로 적은 이윤을 제시한 상단과의 거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저렴하고 질 좋은 생필품과 함께 수상한 약초 가루가 영지 내에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루를 차로 끓여 마시는 자들이 점점 헛소리를 하며 미쳐가거나, 갑자기 검은 숲으로 들어가 실종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그럼 그냥 유통을 금지하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그것이 조금 애매합니다. 처음 마시면 약간의 고양감과 다행감을 주는 정도로, 밀로 상단에서도 활력을 주는 차라고 소개하여 판매하는 중이거든요.”
이것저것 서류를 내보이며 설명하는 자는 오르덴의 부하인 헤르만이라고 하는 남자였다. 저 딱딱한 대공자와는 달리 이쪽은 제법 말이 통하는 편이다.
“합법적인 유통 금지 요청을 위해서는 그 약초가 마약이라는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강한 진통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신 미약이 될 정도로 과도한 명정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라서…….”
“흠.”
설명을 들으며 성진은 그 이면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합법이고 나발이고 변경백이 그냥 금지하면 그뿐인 문제다. 즉 합법적인 근거까지 들어가며 유통 금지 요청을 해야 한다는 것은, 밀로 상단과 합심하여 약을 유통하는 자가 가문의 실세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식 후계자인 대공자 선에서 감당이 안 되는 자라면 아마도.
‘변경백의 짓이군.’
가주의 반대 입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중인가. 저놈도 꽤나 고충이 크겠는데.
“대공자님은 최근 타국의 무술 대회에 출전하시며 영지를 오래 떠나 계시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영지 사람 모두가 이 차를 마시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가루 형태로 유통되고 있는 터라, 도무지 원료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헤르만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수건에 싸인 몇 알의 납작한 볍씨 같은 것이었다.
“최근에야 겨우, 유통 업자들을 추적해서 얻은 차의 원료입니다.”
성진은 어딘가 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물건을 찬찬히 살폈다.
바짝 말라서 납작해져 있긴 하지만, 이건 약초라기보다는 분명.
‘야, 마왕아. 이거 어딘가 익숙하지 않냐?’
[엥? 정말이네. 이거 말린 로페룸의 알인데?]뭐지? 어디서 이런 놈이 굴러들어 왔지?
성진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르덴을 바라보자, 그가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서? 이 차가 갑자기 영지에 풀리고, 이로 인한 영지민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것은 잘 알겠어. 그런데 이 차의 유통에 삿된 것이 관여했다고 의심하는 이유는?”
성진의 물음에 오르덴과 헤르만이 입을 다물고 잠시 눈짓을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한 듯 오르덴은 한숨을 쉬며 작은 메달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붉은빛을 띤 작은 메달로, 그 위에 어설픈 거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유통 업자를 수색하며 얻은 암흑 교단의 표식입니다.”
성진이 메달을 집어 들자 헤르만이 설명을 덧붙였다.
“밀로 상단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밀로 상단은 분명 암흑 교단의 잔당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그 말인즉슨, 로페룸의 알을 황도에 퍼뜨린 세력 역시 밀로 상단과 연관이 있다는 거겠지. 헤이즈 사제 이후로 족적이 끊어진 암흑 교단 잔당의 꼬리가 보였다.
로건이 지그스문트 영지 근처에서 보았다는 딜레리아의 나비 역시 이들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터!
‘그냥 성격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놈이 복덩이였네.’
성진이 씨익 웃어 보이자, 오르덴이 흠칫 놀라더니 곧 불손한 기색으로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성진의 눈에 오르덴은 이제, 패기 가득한 건방진 애송이가 아니라,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 식탁에 오르길 기다리는 한 마리 어린 양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 마물 전담부에서 이 일을 돕겠네.”
성진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맨입으로?”
“…네?”
얼빠진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향해, 성진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다시피 우리 부서는 아직 인원도 적고, 지금은 회색 역병을 조사하는 데도 벅차. 그럼에도 지그스문트 영지를 위해 일부러 나서는 거라고.”
“…….”
“물론 제국의 신민을 위한 일이니만큼 따로 수고비를 받거나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부서 사람들이 활동하는 경비 정도는 그쪽에서 부담해 줘야 하지 않을까?”
오르덴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분명히 해두지.”
성진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건은 달아두겠어. 자네, 이번에 나한테 빚진 거다.”
“…….”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자네는 그 빚을 내게 갚아야 할 거야. 알겠지?”
오르덴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물론… 이번 일이 해결되기만 하면 어떻게든 사례를…….”
“아냐, 그게 아니지. 그건 해결된 이후에 생길 또 다른 빚일 뿐이고. 계산은 바로 해야지.”
“……?”
“모르겠나? 내가 지금 지그스문트 가와 암흑 교단의 결탁을 함구해 주는 거잖아. 가문의 잘못을 이단 재판부로부터 숨겨주는 거라고. 설마 그 은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싸악. 대공자 놈의 얼굴에서 핏기 가시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두 사람은 충격으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헤르만은 물론 오르덴조차도, 뒤에서 황당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전담반 사람들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와… 소름. 모레스 저하,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시치미를 잘 떼시네요. 보셨어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거?”
“지브릴 의원. 불경한 언행은 삼가도록.”
“그런데 마사인 경.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저하께서 어떻게 지그스문트 영지로 조사단을 보내나 무척 고심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는데, 왜 지금은 또 대공자에게 저렇게 약을 팔고 계십니까?”
“저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리는 그에 따를 뿐이다.”
“흐으흐으. 전… 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저하의 잠재력은 대단하시군요.”
“샤론 경? 혹시 그 잠재력이라는 것이 사기꾼 기질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