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8)
성황의 아이들-128화(128/469)
§ 128. 오라클 (2)
[저는 아렌쟈의 수장이며, 현재 코른시임의 오라클을 대행하고 있습니다.]성진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렇게 알아보려 해도 정보를 찾을 수 없던 오라클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런데 오라클이면 오라클이지, 대행은 또 뭐야?
성진의 의문을 미리 짐작한 듯, 수장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오라클은 코른시임 일족의 예언자입니다. 올바른 미래를 선택하여 일족이 나아가야 할 길로 이끄는 자이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저희 일족은 그 예언자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하여, 미흡하나마 인과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제가 그 대행을 하고 있습니다.]요컨대 아렌쟈가 가진 정보를 어디까지 유출하느냐를 결정하는 총책임자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자기소개에서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리면 어쩌자는 거지?”
성진의 물음에 그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중요한 것이라 하심은?]“그대의 이름은 뭔데?”
[…아아!]수장은 잠시 허를 찔린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저희 일족에게는 직위가 곧 그 정체성이라 잠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의 이름은 리브가. 갑자기 중요한 전언이 생겨 부득이하게 이런 식으로나마 저하께 말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그렇게 말하는 수장의 눈에서, 이따금 옅은 회색의 안광이 점멸했다.
저 묘한 눈빛. 어쩐지 무척 익숙한 느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하, 설명드리고 싶은 것은 많습니다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저의 간섭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아버지가?
[예. 성황 폐하께오서는 어디까지나 저하의 앞길이 완전한 불확정성 위에 놓이기를 원하십니다.]…완전한 불확정성?
성진이 그 의미를 묻기도 전에 아렌쟈의 수장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저하를 뵙게 된 것은, 지금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의 여파를 최소화하고자 함입니다.]그 수장이라는 자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가 내부 요원에게 전언을 지시하고, 그 요원이 다시 브루노 단장에게 채널링을 통해 그 말을 전달하며, 마침내 단장이 성진에게 이를 알리기까지는 총 3회의 정보 발설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파는 꽤나 달갑지 않은 것이 될 거라나. 이것 역시 불확정성을 해침으로써 발생하는 부작용이란다.
“그래서, 그렇게 중요하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네, 저하. 다름이 아니라, 스카르차피노의 저택을 방문하시기 전에 부디 성녀를 먼저 만나시기를 당부드립니다.]“성녀? 시슬레 말인가?”
[…….]그러나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듯 머리를 숙인 수장은, 잠시 비틀거리나 싶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그의 눈은 본래의 짙은 녹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성진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단장인가?”
“예, 접니다. 저하.”
브루노 단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짚었다.
“제 능력으로는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누군가가 제 몸에 덧씌인다니, 그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요.”
두통이 꽤나 심한 듯 한동안 눈두덩을 문지르던 단장이 덧붙였다.
“흠, 떠나기 전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렌쟈의 수장이 양해를 구하는군요. 그리고 부디 전언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스카르차피노와 대면하기 전에 먼저 성녀를 만나라.
“왜 뜬금없이 그런 전언을?”
“글쎄요. 아마도 아렌쟈에서 내다보는 예측이 갑자기 변한 것 아니겠습니까.”
브루노 단장은 조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 짐작입니다만, 아마도 저하께오서 스카르차피노 소공자를 직접 만나겠노라고 방금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뭐?”
고작 그걸로?
“저하께서 무언가를 하고자 하시면 그리 이루어진다… 라고 합니다.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와, 그것 참. 디테일한 예측이구나. 스카르차피노 소공자가 그렇게 중요한 친구였어?
그랬으면 진작 만나보라고 힌트라도 줄 것이지!
“그런데 단장, 아까 수장이 말한 성녀란…….”
성진은 뭔가를 더 물으려다 바로 입을 다물었다. 브루노 단장이 가만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부디 저하. 방금 일어난 일련의 과정이, 전언의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헤아려 주십시오.”
“…….”
거, 까다롭구먼.
굳이 시슬레가 아닌 [성녀]라고 말한 것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을 부러 피하려는 의도인가, 아니면…….
‘설마하니, 그 수상쩍은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정말 서이서를 뜻하는 거라면 어떻게 내일 당장 자리를 만든담? 이미 성녀로 거창하게 취임한 터라 맘대로 오라 가라 하기도 애매해졌는데?
게다가 막상 그녀를 만나려 해도 이상하게 썩 내키질 않는다.
[왜? 뭔가가 걸려?]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마왕 놈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어, 엄청 싫고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단 말이지…….]마왕은 뭔가를 고심하는 듯하더니, 곧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음… 내 생각에는 말이지. 어차피 아렌쟈에서 말하지 않았다면 넌 몰랐을 거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보는 건 어때?]‘…엉?’
[내가 그 분야를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인과와 관계된 것들은 여간해서는 한 번에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지. 아까 그놈은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너한테 조언을 한 거겠지만, 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불확정성을 고집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너도 알다시피 그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맘대로 인과를 건드리는 작자야. 그 이상 능숙하게 인과를 판단하는 자가 또 있겠어? 네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 어차피 뭘 어떻게 하더라도 일어나게 될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지.]흠, 어째 마왕 놈의 말이 꽤나 그럴싸하게 들렸다.
성진은 아직도 인상을 쓰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브루노 단장을 힐끔 쳐다보며 마음을 굳혔다.
졸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영매 노릇을 하느라 고생한 단장에게는 좀 미안하긴 하지만.
‘좋아, 그냥 무시하자!’
그렇게 결심하니 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드는 생각인데.’
[뭔데?]그러니까, 아렌쟈의 수장은 자신이 전한 말이 인과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는 거잖아?
그건 결국, 내게 그걸 전해봤자 어차피 나는 제대로 들어먹지 않았을 거라는 말과 같은 거 아닐까?
[오? 정말 그러네?]오라클의 대행이든 뭐든, 그쪽도 나름 용한 예언자 아닌가.
* * *
“그래요? 밀로 상단과 회색 역병이라니, 그건 또 의외의 조합이군요.”
그날 저녁.
진주궁에 찾아온 다샤는, 성진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회색 역병에 관여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밀로는 아세인과 로한을 대상으로 주류를 유통하는 외국 상단이니까요. 일부 주점에 와인을 납품하는 것 외에는 델크로스에서 그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 걸로 알아요.”
“외국이 주 무대인 상단이니, 델크로스 밖으로 도망친 암흑 교단의 잔당이 숨어들 수 있었을지도?”
“생각하면 그렇긴 합니다.”
다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쨌든 밀로 상단의 행적을 추적해 보죠. 주로 암흑 교단과의 접점을 위주로 조사하고, 최대한 빨리 정보를 취합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성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언제 봐도 유능하단 말이지.
“아, 그리고 아렌쟈에서 제보해 준 두 사람에 대한 정보가 사실로 확인되면, 일단 섣불리 손대지 말고 감시만 하도록 해.”
그러자 다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겨우 찾은 암흑 교단의 끄나풀 아닙니까? 그들을 찾아 정보를 캐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내 생각에는 그렇게 가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놈들은 아닐 것 같은데? 괜히 빼돌렸다가 밀로 상단의 경계를 사게 되면, 이후 조사가 더 까다로워질 거야.”
상단에 허술하게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하수인이라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실종자들 중 정작 중요한 인퀴지터나 사제들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니까.
혹시라도 상단에서 놈들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그때 빼돌려도 늦지 않겠지.
“그것도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다샤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이런저런 조사거리가 늘어가고 있는데도, 다샤는 그리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워낙 부탁해 둔 게 많아서 이적단체 조사 건은 말도 못 꺼내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부릴 사람이 많지 않은 성진으로서는, 상당 부분 다샤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나마 성진이 직접 움직인 일들은 죄다 이상하게 꼬여가기 일쑤였다.
재판부로 조사를 갔더니 역병이 발견되고, 이단 재판부를 찾았더니 게이트가 열렸지. 딜레리아 나비에 관해 묻기 위해 찾았던 여자는 난데없이 성녀가 되어 버렸다.
“에휴, 내가 하는 일들은 다 왜 이런지 몰라…….”
“네?”
“어, 아무것도 아냐. 참, 요즘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셔?”
최근 도통 리자베스 황비가 진주궁을 방문하지 않는다. 다샤에게 그녀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 두었기에, 간간이 보고받는 소식으로 근황을 전해 들을 뿐이지.
본래 이런저런 사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쏟는 황비는, 최근에는 아세인에서 오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 꽤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단다.
“특별히 후원하는 곳은?”
“황비님께서 발레 공연을 좋아하시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수년 전부터 후원하던 샤틀레 극장 외에, 최근에는 오랑쥬 소극장을 장기 대관하여 브르타뉴의 유명 발레단을 돌아가며 초청하고 계십니다.”
“흠…….”
역시 모레스의 이름으로 이적단체에 후원을 하는 건 황비가 아니었던 건가?
어쨌든 생각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도 모습을 보이질 않아 혹시 어딘가 아픈 건 아닌지 은근 걱정되던 차였다.
그러자 다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시면 사용인을 시켜 루비궁에 기별을 하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저하께서는 직접 루비궁으로 문안을 가지는 않으십니까?”
…어? 그러고 보니?
성진은 눈을 깜박였다.
‘왜 내가 황비를 찾아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질 않았지?’
성황의 경우만 해도 최근 자주 얼굴을 보지 않는가.
탄신연이 코앞이라 정기 알현을 못 한 지는 제법 되었지만, 성진이 틈틈이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러 직접 본궁으로 찾아가 얼굴을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내가 그간 황비에게 너무 무심했나!’
성진은 마음속 깊이 반성했다.
모레스 놈에게 불효자니 뭐니 욕할 처지가 아니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성진을 아들이라고 믿으며 정을 주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 루비궁으로 직접 찾아간다라…….”
성진이 저도 모르게 뚱한 얼굴을 하자 마왕 놈이 물어왔다.
[또 왜? 뭐가 걸려?]근데, 어쩌지?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만, 그래도 엄청 싫고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단 말이지…….]마왕 놈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곧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럼 가지 말든지? 본인도 엄청 바쁘니까 여길 신경 못 쓰는 거 아니겠어? 그럼 찾아가 봤자 방해만 될 텐데.]‘…역시 그렇겠지?’
그래. 황비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보면 은근히 강박적인 기질이 보인단 말이지.
근황을 들으니 분명 하루 시간을 꽉 짜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찾아갔다가 일정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게 되면 어떻게 해?
‘탄신연이 되면 또 얼굴 볼 테니까.’
성진은 납득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 * *
어차피 뭘 어떻게 하더라도 일어나게 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어제 마왕 놈이 그런 말을 했지만, 성진은 그저 적당한 핑계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다음날이 되어 아침 수련을 마치고 궁으로 들어갔더니, 성진을 기다리고 있는 뜻밖의 사람들이 있었다.
“안녕? 오라버니. 괜찮다면 우리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
흰 사제복을 입은 시슬레가, 조각된 인형처럼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를 반겨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작은 책자 같은 것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채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샤아아악!”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이쪽으로 하악질 같은 걸 하고 있는 성녀, 서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