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30)
성황의 아이들-130화(130/469)
§ 130. 오라클 (4)
성황의 집무실에서는 아침부터 수석 시종장과 행정 사무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인고?”
“황자님이 선물이라고 보내온 것이니 필시 보통의 물건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안대였다.
하얀 토끼 모양의 안대에는 깜찍한 눈과 입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물론 캐릭터 상품이란 걸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큰일이군. 폐하께서 이곳에 드시기 전까지 답을 찾아 말씀을 드려야 하건만.”
루이스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문지르자, 젊은 행정관 도리안이 무난한 답 하나를 내놓았다.
“아마도 바르샤 부족민의 민속 공예품 같은 건가 봅니다. 요즘 오웬 저하께서 볼란타와 교류를 하시는 중이라지요?”
“흐음…….”
그다지 좌중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남쪽 이교도들이 만든 것치고는 재질도 고급스럽고 마감이 참으로 깔끔하지 않은가. 분명 이름 높은 의상실에서 주문 제작한 물건이리라.
그러던 중 행정 사제 하나가 조금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이 자수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나, 어쩐지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간질거리며 두근두근하는 느낌이 듭니다. 좀 귀엽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안대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매혹]인가?”
“부정맥입니까?”
“혹여 주술적인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잔뜩 긴장한 사제 하나가 막 안대에 대고 축성을 올리려는 때였다.
“지금 뭣들 하고 있나.”
“…폐하!”
성큼 집무실로 들어선 성황을 향해 모두가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한 손에는 경전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주신의 문양이 새겨진 로자리오를 들고 있는 사제를 본 성황은 대충의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그는 좌중이 둘러싸고 있는 상자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군. 단순한 규상세계의 산물일 뿐이야.”
휴우. 행정 사무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가 말씀하신 그 규상세계라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래. 오웬이 탄신연 선물이라고 보냈단 말인가.”
성황은 자신에게 이런 용도 불명의 물건을 보낸 대자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는 듯,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걱정이군. 그 아이가 아무래도 전선에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네. 슬슬 황도로 돌아올 때도 되었건만.”
“…….”
오웬이 전선에서 쌓인 피로로 인해 일시적인 판단 저하를 보인 모양이라는 것.
“어쨌든 보기에 꽤나 귀엽지 않은가. 일단 보내온 성의가 있으니 어디 장식이라도 해둘까.”
그렇게 해서 깜찍한 토끼 안대는 성황의 집무실 벽면 한쪽에 고이 걸리게 되었다.
* * *
그날 저녁, 성진은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에디스의 시중을 받으며 슬렁슬렁 겉옷을 걸치고 있자니,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사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카르차피노 소공자의 모임은 전도유망한 공자들의 사교의 장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델크로스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기발하고도 날카로운 식견이 돋보이는 이야기를 주고받겠지요?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마치 본인이 참석하는 양, 답지 않게 들뜬 기색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진주궁에 처박혀 수련만 하던 황자가 드디어 뭔가 사교 활동다운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간 별말이 없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마사인 나름대로는 은근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글쎄, 그냥 잡담이나 하다 오게 되지 않을까?”
성진은 오직 스카르차피노 소공자란 놈을 족칠 생각뿐, 그다지 모임 자체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서 할 일이 별거 있겠는가.
아이돌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니, 뭐 베르트랑 거리의 여배우들에 관한 가십이나 유명한 코르티잔의 품평 정도가 오가지 않을까. 적어도 마사인 경이 생각하는 그런 토론회 같은 진지한 분위기는 아닐 거다.
그러나 마사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고위 사제나 중앙 귀족, 그리고 부유한 상단의 자제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단순한 잡담 사이에도 오가는 정보들이 있게 마련이죠. 아마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델크로스 사회 경제 전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예, 게다가 듣자 하니 때때로 작은 공연 무대도 종종 펼쳐진다고 하더군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이나 연주가들이 초대된다고 하니, 이런저런 소양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흐음…….”
어린 시절 황손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아 온 마사인 경의 말이니 참고할 필요는 있겠지.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성진이 막 마차에 오르려 할 때, 맹한 에디스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
“금일은 마사인 경께서 함께 가십니까? 본래 저하께오서는 혼자 조용히 다녀오시곤 했는데요?”
“…호위 없이 홀로?”
“예, 늘 혼자 마차를 타고 다녀오셨습니다만.”
마사인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는데, 지금까지, 호위가 없었다고?”
들떠 있던 기분이 급격하게 곤두박질치는 것이 빤히 눈에 보이건만, 눈치 없는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하게 대답했다.
“예, 고작 타운하우스에 다녀오는 일인데요. 무려 그 스카르차피노가의 저택인데 호위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마사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마차가 황궁을 벗어나 대로를 따라 다각다각 달리는 동안에도 입을 꾹 다물고는 말이 없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하겠는데…….’
불편한 침묵 속에서 성진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지금 마사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가관도 아니었다.
와, 이거 내일 상주기사들 단체 기합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델크로스에서도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는 스카르차피노는, 다른 중앙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황도 내에 본가 대저택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편의상 별도로 마련된 타운하우스에 주로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대에서 가장 큰 주택 수 채를 소유하고 이를 마치 여러 개의 별채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이번 사교 모임이 열린 곳 역시 그러한 별채들 중 하나.
멀리서도 두드러지는 환한 조명에 둘러싸인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성진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완전히 변한 황자의 모습과, 그 옆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건장한 기사의 존재에 잠시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잔뼈 굵은 사용인답게, 금세 표정을 관리하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레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작은 도련님께서 그간 저하의 방문을 몹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노집사는 안내를 하는 대신, 성진의 뒤로 따라붙으려는 마사인을 조용히 응시하며 눈치를 주었다.
“이게 무슨 무례…….”
“마사인 경.”
성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마사인을 저지했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공자들이 탄 마차들 역시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 없이 홀로 저택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는 공자들을 본 마사인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은 누그러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종종 지도 대련을 해오며, 마사인 역시 황자의 심상치 않은 전투력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던 차. 이제는 완전한 오러 7층에 접어든 성진의 기세는 그가 느끼기에도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저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꼭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보모 근성이 어딜 가지는 않아, 마사인은 노집사에게 보이기 민망할 정도로 성진을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거참, 이 양반아. 적당히 하라고. 정말로 뭔 일이 생기면 댁한테 기별할 틈이나 있겠어?
그렇게 마사인과 헤어진 성진은 겨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한참 노집사를 따라 이동하던 성진은 곧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른 공자들이 들어가는 연회장의 정문이 아닌, 좁은 계단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 쪽으로 성진을 안내했기 때문.
힐끔 그를 쳐다보았지만, 마치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이 노년의 집사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흠, 혈압이나 맥박 모두 정상인데? 딱히 긴장한 기색은 아니야.]마왕 놈이 소곤거린다.
성진 역시 기감을 곤두세워 봤지만, 주위에는 이따금 오가는 사용인들 외에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늘 이런 식이었던 모양인데?’
하긴 상종 못 할 개망나니로 유명한 황자가 주류 모임에 다녔다니, 이상하다 싶긴 했다. 아마도 정상적인 방문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이윽고 성진이 도착한 곳은 2층에 있는 작은 휴식 공간이었다. 마치 내부로 탁 트인 발코니 같았는데, 그곳에서는 환한 연회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반대로 어둑한 조명 때문인지 밖에서는 이쪽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성진은 난간 옆에 놓인 작은 안락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연회장을 관찰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게 없는 공간인데.
‘…설마 여기서 모임을 구경하기만 했다고? 정말로?’
대체 모레스 이 미친놈은 뭘 하는 놈이었지?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행적투성이다.
마침 연회장의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하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한편에는 다과나 주류, 핑거 푸드가 놓인 긴 테이블이 있고, 중앙에는 조금 짙은 피부의 이국적인 음유시인이 잔잔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제법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분위기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뭐… 저 아래에서 하하하 웃으면서 쓸데없는 친목을 다지느니, 차라리 이게 편하긴 하네.’
[에휴, 누가 수련만 하는 은둔형 외톨이 아니랄까 봐.]‘닥쳐!’
별달리 할 일도 없어서 의욕 없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성진은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지그스문트 대공자, 오르덴.
놈은 정확히 성진이 있는 장소를 올려다보고 있다. 멀리서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그 역시 곧바로 성진을 알아본 듯 바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성진의 상황이 미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는 척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놈의 주위에는 오러 활성이 제법 활발한 공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살롱 드메르시에서 성진은 놈에게 연예인병 걸린 놈이라고 놀렸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유명 인사이긴 한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말을 거는 상기된 얼굴들을 보아하니, 무가 자제들의 우상 같은 놈이라고 했던 마사인의 말이 생각났다.
‘저놈 정도면 확실히, 주류 모임에 초대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긴 하지…….’
그렇게 연회장을 관찰하다 보니, 오르덴 외에도 몇몇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화 무리의 구심점이 되어 선망의 눈초리를 받는 놈들.
저쪽은 오색 화려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아마도 상단이나 부호의 자제들인가. 유독 웃음이 많은 통통한 남자 하나가 주축이 되어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쪽에는, 어쩐지 케네스 디고리를 연상시키는 단정한 차림새의 젊은이 하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뭔가를 토로하는 중이고.
그렇게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데, 성진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언제 보아도 훈훈한 광경이오. 유독 저 나이 때의 젊은이들에게만 보이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오. 각자가 언제든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작은 불씨들을 품고 있지. 그 가능성이 참으로 눈부시지 않소?”
뒤를 돌아보니 제법 훤칠하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미소를 띠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짙은 청록으로 보이는 눈이 어쩐지 이사벨라와 닮아 있다.
저놈이 그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인가.
“알고 있소? 그간 그대의 소식을 무척이나 기다렸소. 어째서 통 연락이 없었소?”
아니, 저놈의 정체는 제쳐두고.
아무리 나이 차이가 있기로서니, 이 자식 지금 황자한테 하대한 거야?
“네 녀석이 그 스카르차피노 소공자인가?”
“…음?”
성진이 그렇게 물으며 매섭게 놈을 노려봤더니, 리카르도는 의아한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무척 변했다든가 기억이 없다든가 하는 뜬소문을 간간이 듣기는 했소만, 이건 정말로 의외로군. 그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하구려.”
보기에는 꽤 젊은 놈이 마치 노인네처럼 묵직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만일 그가 정말로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아바타라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의 다음 말에는 성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대가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자, 오늘은 또 내게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나의 오랜 벗, 델크로스의 어린 예언자여.”
…예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