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31)
성황의 아이들-131화(131/469)
§ 131. 오라클 (5)
델크로스의 어린 예언자여.
놀란 성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리카르도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쭉 꼬고 푹신한 좌석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는 폼이, 말 그대로 여유 넘치는 대부호의 아들 그 자체다.
“흠? 왜 그런 표정이오?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 아니었소? 언제나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예언을 들려줄 거라고 생각했소만.”
“…….”
성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깐만, 모레스 놈이 예언자였다고?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성진.]그때 마왕 놈이 조금 긴장한 듯 소곤거렸다.
[저놈의 혈압이나 맥박에 큰 변화는 없어. 지나치게 여유 있어 보이는 점이 좀 찜찜하긴 하지만, 일단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단지…….]‘단지?’
[아무리 살펴봐도 저놈이 그 시구르트 시구르슨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 그도 그럴 게, 저놈의 몸과 영혼은 본상세계 인간의 것이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그렇다는 말은?
[난 그 아바타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쉽게 가정해서 그게 단순히 몸을 조종당하는 인형 같은 거라면, 과연 저놈처럼 영혼이 멀쩡한 모습일 수 있을까?]‘…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역시 시슬레의 추측이 틀린 건가.
미간을 찌푸리며 놈에게 시선을 주니, 리카르도는 그때까지도 빙글빙글 웃으며 성진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별수 없이, 성진은 일단 차근차근 사실을 파악해 나가기로 했다.
“내가 너한테 예언을 들려줬다고?”
“그렇소만. 흠… 기억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정말인 모양이군.”
리카르도는 애석하다는 눈빛으로 성진을 바라보며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는구려, 나의 소중한 벗이여. 그렇다면 오늘은 내 그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거요?”
“그래. 오늘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들으러 온 거다. 그러니 댁이 나한테 협조를 좀 해줘야겠어.”
“물론이오. 뭐든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시오. 그대는 이 델크로스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보석 같은 귀한 존재가 아니겠소? 그런 그대를 위해 내 무엇인들 못 하리.”
순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자식, 아까부터 말투가 저게 뭐지? 뭔가의 정신 공격 같은 건가?
“…너 혹시 사람들한테 느끼하다는 말 자주 듣지 않냐?”
“아무리 그런 허물없는 농담이라도 계속 들으면 상처가 된다오.”
많이 듣는구나.
“좋소. 어쨌든 오늘은 모임을 제쳐두고라도 내 그대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도록 하지. 우리가 함께한 날들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도 좋겠구려.”
“그럼 일단, 내가 여기 와서 주로 뭘 했는지 말해봐.”
“그러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리카르도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뭐라고 할까. 그대와 나는 주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소.”
“사람들?”
“그렇다오.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저들이 가진 많은 가능성들과, 그것으로 엮어나갈 수 있는 여러 갈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지. 무척 흥미진진하고 뜻깊은 작업이었다오.”
“그 말은, 내가 연회장에 온 사람들에 관해 예언을 했다는 의미인가?”
“뭐, 간략하게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소.”
거기까지 말한 리카르도는 눈썹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그대가 내게 뭔가를 묻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조금 의구심이 드는구려. 기억이야 어찌 됐든, 알고자 마음먹는다면 그대에게는 뭐든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그대의 그 신비한 눈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소만.”
“눈?”
성진이 반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실을 꿰뚫는 그 오라클의 눈 말이오.”
“오라클…….”
잠깐만. 오라클은 그 코른시임 일족의 예언자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없다는.
그런데 그게 왜 여기서 나오지?
성진의 복잡한 표정을 살피던 리카르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려. 그래, 오라클.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소?”
“…….”
“아, 혹시 코른시임 일족에 관해서는 알고 있는지?”
코른시임 일족.
그에 관해서는 일전에 브루노 단장으로부터 간략하게 듣기는 했다.
-저는 아렌쟈의 수장이며, 현재 코른시임의 오라클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단장에게 빙의했던 아렌쟈의 수장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었지.
그런 그가 빠르게 튕겨 나간 후, 미처 그에게서 듣지 못한 것들에 관해 브루노 단장이 추가적으로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코른시임 일족은 예로부터 델크로스에 자리 잡고 있던 폐쇄적인 소수 혈족입니다. 소문에는 그들 모두가 영혼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여,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이한 비술을 썼다고 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일족 모두가 채널링 능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신기한 기술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악마 숭배자로 낙인찍혀, 수년 전 대부분이 인퀴지터의 손에 처형당하고 말았다고.
아렌쟈의 내부 요원들은 그 숙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코른시임 일족들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라클이 없어, 누군가가 그를 대행하고 있다 들었는데?”
성진의 의문에 리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코른시임 일족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그들의 예언자를 잃었소. 그러나 엄밀히 말해 오라클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오. 그저 스스로 일족을 피해 잠적하기로 결정했을 뿐이지.”
거기까지 말한 리카르도는 고개를 들고,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잠시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곧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것은 이번 대의 오라클 역시 마찬가지요. 그는 건재하다오. 그저 예언을 봉하고 완전한 침묵을 선택했을 뿐이지.”
“…….”
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성진의 머릿속에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하지만 그대, 그것을 아시는가?”
리카르도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돌아온다. 그는 시선을 내려 성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예언하지 않는 오라클은 울지 않는 새와 같아, 하등 이 세상에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의 순리는 그렇게 본분을 거스르는 자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는 법이오.”
“…….”
“전대의 오라클은 무척이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소. 그리고 이번 대의 오라클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었지. 어떻게 용케 도망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요.”
그리고 리카르도는 입꼬리를 쭉 끌어올리며 수상쩍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 그렇다면 수수께끼요. 다음 대인 그대에게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
“더 이상 나에게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면, 앞으로 과연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 같소?”
성진은 어쩐지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놈이 말하는 그 다음 대의 오라클이라는 것이 모레스를 지칭한다는 건 잘 알겠다.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를 떠나, 놈이 말하는 의도는 명확했다. 뭔가 협조해 주는 척하고는 있지만 사실 이놈은.
“너 이 새끼, 지금 이게 어디서 되도 않는 협박질이야?”
“…….”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네가 그 차원의 이야기꾼이라는 놈이냐?”
갑작스러운 성진의 막말에 잠시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린 리카르도는, 곧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협박이라니, 우리 사이에 그것 참 섭섭한 말이구려.”
적어도 차원의 이야기꾼을 모른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군.
“네 녀석이 그 시구르트 시구르슨이냐?”
“하하하, 글쎄. 어떨 것 같소?”
어떨 것 같긴. 네놈이 바로 범인이지.
근거가 빈약함에도 성진은 확신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감 같은 것이었다.
멀쩡한 영혼을 가진 본상세계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 자의 아바타가 될 수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놈은 리카르도 스카르차피노이며, 동시에 시구르트 시구르슨인 거다.
“서이서에게 그 나비 마물을 보여준 것도 네놈 소행인 거지? 왜 그녀를 꼬드겨서 가짜 성녀로 만들려 한 거지?”
“아하하하하!”
리카르도는 실로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탁 트인 연회장에서 아무도 이쪽을 주목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아래층 쪽으로 슬쩍 눈길을 주는데, 하도 웃어서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녀에게서 뭔가를 들은 모양이구려. 어리숙해 보여도 생각보다 경계심이 많은 여인이건만, 대체 어떻게 그녀를 꼬드긴 거요?”
서이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 성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리카르도가 성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벌써 가는 거요? 아직 제대로 회포를 풀지 못했는데 아쉽구려. 부디 다음번 모임에도 이 벗을 찾아주시겠소?”
“글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소?”
이 자식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성진은 복도를 향해 몸을 돌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재수 없는 친구는 사절이니까. 네놈과는 이제 절교야!”
“그런…….”
“알았으면 이 이상의 헛짓거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곧 황궁에서 정식으로 조사가 나올 테니, 어디 도망가지 말고 성실하게 임하도록. 일단 아버지께는 네놈에 대해 모두 보고를 올릴 테니까.”
그러자 리카르도는 어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글쎄, 그건 어떨지. 성황이 정말 몰라서 이 몸을 내버려 두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세상에는 간혹 여간해서는 침해할 수 없는 여러 불문율 같은 것이 존재하는 법.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요.”
어쩔 수 없는 일.
순간, 성진의 뇌리에 불현듯 일전에 성황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하거라. 네가 그 부조리함을 바로잡길 바란다면 그리 될 것이다.
그리고 카트리나 역시 이렇게 말했지.
-폐하께서 조건 없이 모든 이를 도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내가 부탁드리는 것이 아버지가 단장을 돕는 조건이 되나?
-가끔은 입 밖에 내뱉은 것만으로도, 그 토대가 크게 흔들려 무너져 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하.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은데.
“그럼 이건 어떨까?”
이번에는 성진이 리카르도를 향해 웃을 차례였다.
“내가 그걸 원한다면? 그래서 아버지께 네놈을 제대로 처리해 달라고 부탁드린다면?”
“…….”
“그래도 아버지가 지금처럼 널 가만히 내버려 둘까?”
리카르도의 얼굴에서 표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지금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성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이제 조금씩 살벌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정답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는데, 탁 하고 갑자기 뭔가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라?’
분명 저 앞에 복도가 빤히 보이는데 뭔가에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대체 이게 뭐지?
성진이 의아해하며 손으로 허공을 더듬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마왕 놈이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진, 이건 결계야!]결계?
[그래.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서 눈치채는 게 늦었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느새 이 주변은 규상세계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어!]규상세계의 법칙.
성진은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짐작되는 놈을 돌아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무척 유감이오.]어느새 안락의자에서 일어선 리카르도가, 성진을 향해 다가오며 어딘지 묘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멈춰 버린 세상에서, 오직 그대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벗이었거늘.]그리고 팔랑. 어디선가 날아든 푸른 나비 한 마리가 성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딜레리아의 나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미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팔랑팔랑. 그러는 동안에도 나비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꿈의 마왕이라오.]마치 폭풍처럼 푸른 나비 떼가 성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베르트랑 거리의 한 허름한 창고 안.
서툰 솜씨로 볼품없는 노란 봉제 인형을 꿰매고 있던 로메인이 갑자기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또 바늘에 찔렸냐? 그러게 왜 그딴 쓸데없는 인형극에 목을 매는 거야?”
옆에서 술을 병째로 홀짝거리던 레오나드가 타박했지만.
“…레오 님.”
레오나드를 부르는 로메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미약한 흥분이 어려 있었다.
“[인형사]가 드디어 미궁의 입구를 열었습니다!”
“…뭐?”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리던 레오나드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의 빛이 서렸다.
“진짜로?”
“네, 그렇습니다.”
로메인은 반짇고리와 인형을 집어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 지금까지 잘도 몸을 숨기고 있다 했더니, 이제 와서 이런 자살 행위를 할 줄이야!”
“어디냐? 놈이 또다시 어딘가로 내빼기 전에 서둘러야 하지 않나?”
“걱정 마십시오, 레오 님. 만에 하나 놈이 우리에게 발견되기 전에 도망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습니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응시하는 반가면 안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을 발했다.
“적어도 델크로스의 수호자만은 절대 놈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