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38)
성황의 아이들-138화(138/469)
§ 138. 미궁 (7)
“시구르트 시구르슨. 그자의 악랄한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에게 조종당하는 아바타는 멀쩡히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이 단순히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로메인의 설명에 레오나드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의식이 남아 있는데도 인지를 하지 못한다고?”
“네. 그가 사용하는 교묘한 방식 때문입니다.”
조금 뜸을 들인 로메인이 말을 잇는다.
“그는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인형을 조종하곤 하죠. 하나는 인간의 자존감을 극도로 높여주고, 더욱 대단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여 인형 스스로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흐음?”
“문제는 그를 받아들인 후입니다. 한번 의식이 연결되면, 그자가 쌓아온 오랜 경험과 지식들, 그리고 위대한 흐름이 되고자 하는 광오한 욕망이 한데 어우러져 인형의 정신이 한없이 고양되죠. 이때 인형은 자신이 그의 조력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자의 강한 욕망을 스스로의 것이라고 착각하여 거리낌 없이 몸을 빌려줍니다.”
로메인과 레오나드.
두 사람은 현재 돌로 된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잔뜩 이끼가 낀 낡은 석벽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지만, 그 위로 드문드문 밝혀진 푸른 횃불은 이제 막 점화되기라도 한 양 밝기만 하다.
“또 다른 하나는 더욱 악랄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깎아내리거나 심각한 궁지로 몰아, 인형 스스로가 아예 자의식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법이죠. 인형은 철저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인형 자신이 바로 시구르트 시구르슨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앞장서서 걷던 로메인은 갈림길 앞에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다시 방향을 잡아 걸음을 옮겼다.
“이 경우 인형은 말 그대로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되어 살아갑니다. 물론 자의식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그리 인도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간간이 인형의 기억에 결손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요.”
“기억에 결손이 생긴다고?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조종당하는 것을 모를 수가 있지?”
“그와 완전히 연결되는 순간, 그 결손의 대부분이 메워지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시구르트와 연결된 인간은 극도로 자극된 정신 활동이 주는 고양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갓 인간으로서의 기억 일부가 사라지는 일 따위는 인지할 틈이 없을 정도로, 그 감각은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죠.”
거기까지 말한 로메인은 잠시 나직하게 헛웃음을 웃었다.
반가면 아래의 입매가 짙은 비소와 함께 비틀린다.
“그렇게 제 주제를 자각하지 못한 인형은, 딱하게도 그가 떠난 이후에도 착각을 계속하는 겁니다. 자신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사실은 악마라고. 차원을 넘나드는 마왕이며 언젠가 위대한 이야기가 될 자였노라고.”
“…….”
“스스로가 보잘것없다고 여기며 깊이 좌절하기에, 다른 누군가가 편의를 위해 선사해 준 일순의 고양감에 그리도 쉽게 매몰되는 것이죠.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그 공허한 목소리가 마치 지극한 자조처럼 느껴져, 조금 민망해진 레오나드는 잠시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분위기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그들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로메인은 우아한 양각이 아로새겨진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레오나드에게 말했다.
“이곳이 저의 거점입니다. 함께 들어가려면 레오 님이 제 파티원이 되셔야 합니다만. 아까도 설명 드렸듯이, 레오 님은 그저 수락한다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레오나드의 눈앞에 부서진 텍스트 창이 떠올랐다.
〚■■■ 님께서 $ks□Rns 님께 파티□ 신□하셨습니다. 수락하□겠습니까?〛
〚수락 / □절〛
움찔 놀란 레오나드가 로메인의 얼굴을 한 번 살피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하지.”
그러자 또다시 뿅 하고 텍스트가 떠오른다.
〚■■■ 님과 파티□ 맺었습니다.〛
“휘유.”
레오나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병을 홀짝거렸다.
“뭐랄까, 자네한테 미리 충분한 설명은 들었지만 그래도 놀랍군. 이곳이 정말로 다른 차원이기는 한 모양이야.”
두 사람은 현재 미궁에 들어와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다급하게 미궁에 접속한 덕분에, 로메인 역시 잃어버렸던 일부 연결을 성공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끼이익. 무거운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여러 개의 방이 늘어서 있는 또 다른 복도였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화사하게 꾸며져 있는 내부에 레오나드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로메인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레오 님께도 거점 일부에 대한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허가된 곳에 한해서 자유롭게 오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이야, 로메인! 나는 상상도 못했네. 이건 정말이지……!”
레오나드는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더없이 완벽한 안가가 아닌가! 여기에 다른 사람들을 데려와도 될까?”
그러자 로메인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델크로스의 수호자와 고위 마왕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로 온 겁니다. 그런데 이곳에 대놓고 여자들을 들이면, 은폐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안 될까?”
“당연히 안 됩니다. 아니, 그것보다 대륙 여기저기에 그렇게나 많은 안가를 가지고 계시면서 또 다른 비밀 장소가 필요하십니까?”
“언제나 모자라네. 한번 쓴 안가는 다시 가고 싶지 않거든. 시체 냄새가 나.”
“…….”
로메인은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 봐서는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었지만, 사실 저 레오나드라는 인간은 꽤나 잔혹한 면모를 가진 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궁 안에 작은 동물들을 끌고 와 괴롭히며 놀던 왕자는, 머리가 굵어지자 비밀스러운 안가를 만들고 그곳에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가 데려온 자들은 대부분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대로 안가에 묻히고 말았지.
만일 그가 왕자의 신분만 아니었다면, 악마 숭배자나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혀 진작 처형당했을 터다.
하긴, 그런 남다른 성정이다 보니 장차 대륙의 패자가 될 운을 가진 거겠지.
계획대로 [기아]의 손에 델크로스가 무너지기만 했었더라면, 이렇게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대신 한창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거다.
“그나저나 미궁이 그렇게나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 좋다면, 왜 차원의 이야기꾼은 이곳으로 도망치지 않는 거지?”
벌컥벌컥.
여기저기 방문을 열며 내부를 구경하던 레오나드가 물었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델크로스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의 본체가 델크로스에서 죽었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의 영혼이 델크로스 차원을 떠나는 순간, 모든 제약을 풀어버린 성황의 분노를 고스란히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겠죠. 방금도 미궁을 잠시 열었다는 사실을 빌미로 인형 하나를 잃지 않았습니까?”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수년 전부터 이미 성황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영혼이나마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형의 몸에 빌붙어 살며 인간의 법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황의 제약을 이용하고 있는 거다.
이제 그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얼마 남지 않은 인형들 속에서 숨을 죽이고, 성황이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인형의 수명이 무척 길어야 가능할 겁니다. 이제 남아있는 인형은 단둘뿐이고, 새로운 인형을 만드는 일은 명백히 인간의 법칙을 벗어나는 행위니까요.”
일순간의 연결이었으나, 그사이에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처지를 완전히 파악한 로메인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응?”
레오나드가 복도 끝에 있는 방문 앞에서 멈칫하며 말했다.
“로메인, 뭔가 이상한데? 나, 분명 이곳을 예전에 본 기억이 있어.”
“네? 그럴 리가요?”
로메인이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레오나드는 입을 다문 채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어쩐지 이 문을 자주 이런 식으로 열고 닫지 않았나 하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끼이이…….
그리고 드러난 방의 내부는 단출했다.
작은 침상을 포함한 간단한 가구들. 그리고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파스텔 톤의 깔끔한 벽지.
“저 벽지…….”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
손에 감기는 미약한 온기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
레오나드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착각이었나? 분명 이곳에서 누군가의 목을 졸랐던 것 같은…….
그의 심상치 않은 상태에, 로메인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미궁에는 수많은 사념이 잔존해 있고, 가끔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념은 분명 레오 님의 것은 아닐 겁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는 것은 오늘이 처음 아닙니까?”
“…그래. 분명 그렇지?”
아마도 로한에 있는 안가 중 하나와 헷갈렸던 모양이다.
레오나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닫았다.
* * *
성진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성황의 집무실을 찾았다.
남매와 마사인이 쉬어야 한다며 그를 극구 만류했지만, 성진이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그냥 아버지한테 가서 고쳐달라고 할게!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야? 나는 급한 보고를 미루지 않을 수 있고, 쉴 필요 없이 당장 내일 수련도 할 수 있다고!”
물론 성진은 자신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은 단지 수련을 빼먹지 않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설득은 꽤나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그런가?”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뭐, 아버님 폐하시라면.”
그래. 성황 폐하 치트키는 언제나 무적의 논리지.
그렇게 해서 성진이 황궁에 도착했을 때,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성황의 집무실은 언제나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늦게까지 업무를 보던 탓일까, 성진을 맞이한 성황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선 성진을 잠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모레스.”
“예.”
“모레스.”
“…예?”
“…….”
성진이 의아해하며 재차 대답하는데, 성황은 그러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양반이 어디가 불편한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쯤, 그는 갑자기 성진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화악, 강한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며 몸 상태가 순식간에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로건에게 치료를 한 번 받았는데도, 성황의 눈에는 뭔가 미흡한 것이 보였던 걸까?
거기다 확연하게 치료 전과 컨디션이 달라진 게 느껴진다.
이 양반의 힘은 뭔가 일반적인 신성력과 그 궤가 다르다더니, 과연.
“앉거라.”
“네.”
성진은 조금 감탄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루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온도의 차를 따라준다.
아무래도 이 양반이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대충 알고 있다면 보고하기도 쉽겠는 걸…….’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호로록 들이켜는 그때.
“그래. 미궁에는 잘 다녀왔느냐?”
푸헉!
성진은 하마터면 차를 입 밖으로 장대하게 뿜어낼 뻔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성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성황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것을 고하러 온 줄 알았더니, 비밀이었더냐?”
“아니, 아닙니다…….”
성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물론 이 양반에게 뭐든 숨기기는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미궁에 딸려가서 위험해졌던 일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스카르차피노 가문의 의혹과, 리카르도 놈의 진짜 정체에 관해 보고하려 했지.
겸사겸사 오라클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죄송합니다. 또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습니다.”
성진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성황이 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괜찮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느니라. 미궁의 괴물을 단번에 해치웠노라고, 예전에 네가 그리 알려주었단다.”
“…예?”
성진이 영문을 몰라 되묻자, 성황의 눈이 무언가를 회상하듯 깊게 가라앉는다.
“그래. 내 어찌 지금까지 그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네가 분명 내게 그리 말했거늘.”
“……?”
그리고 성황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너는 이제 무척 강해졌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믿으라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