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4)
성황의 아이들-14화(14/469)
014. 그 성황의 사정
성황 네이트는 본래 신심이 깊은 자는 아니다.
그러나 감히 주신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여색을 특별히 밝히거나 무분별한 연애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대의 난봉꾼 성황] 따위로 불릴 만큼 인생을 막살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어째서 21세라는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를 당시, 이미 공식적으로만 5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는가. 여기에는 그에게도 동정을 받을 만한 약간의 사정이 있었다.
전대 성황의 3황자, 미움받는 2황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안타깝게도 배다른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난 인간이었다.
타고난 기품이며 명석한 두뇌며, 심지어는 검술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황자. 자연히 다른 황실 사람들에게 최우선 경계 대상이었다.
게다가 성황에게 외면당하고 출신 가문에서도 내쳐진 힘없는 2황비의 아들.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함은 물론, 일이 잘못되어도 가장 뒤탈이 없는 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그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암살 시도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의 습격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다양한 독살 시도가 끊이질 않았다. 삼시 세끼와 식음료는 말할 것도 없고, 오죽했으면 별궁 전체가 독무에 휩싸이는 일이 비일비재 했을까.
아무리 눈치 빠르고 가진 신성력이 남다른 네이트라고 해도,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가 10세가 되기 전, 마찬가지로 수년간 독에 시달리던 2황비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성황이나 가문의 사람들은 아예 발길을 끊은 지 오래. 하나뿐인 아들 역시 중독되어 골골대는 통에 홀로 쓸쓸하게 맞이한 죽음이었다.
그즈음에 이르러 네이트의 건강 역시 심각한 상황이었다. 코른시임의 오라클은 앞으로 그에게서는 결코 후사를 볼 수 없으며, 젊은 나이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저주와 같은 예언을 남겼다.
황궁 의원들 또한 이구동성으로 독에 절어 있는 어린 황자가 이미 불임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이에 더해 지금부터 건강을 잘 돌본다 하더라도 약관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까지 곁들여서.
뒷배는 없고 후사도 볼 수 없는 황자.
네이트가 비공식적으로 황위 계승권에서 완전히 밀려났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도 2년 이상을 황자는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이 지경이 되고도 독살 시도는 끊이지 않았으니 가히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성황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황궁 연회에서 또다시 거하게 피를 토하는 이벤트를 겪은 후.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어린 네이트는, 침상에 누워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던 것이다.
씨발, 인생.
그날 이후 불쌍한 3황자는 황궁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수도를 벗어난 후 어린 황자는 혼자서 수년간 전국을 유랑했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 막무가내로 도망쳤지만, 황궁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자 놀랍게도 그가 타고난 많은 재능들이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아이답지 않은 영리함은 황궁의 추적자들을 용케도 피하게 해주었고, 여기저기서 주워 배운 잡다한 기술들은 그러잖아도 뛰어난 검술을 빠르게 경지에 오르게 했다. 억눌려 있던 신성력 또한 완전히 해방되어 마치 기적과도 같은 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친절히 대해 주었다.
노련한 사냥꾼, 재주 좋은 트레져 헌터, 재야의 숨은 약제사, 떠도는 소드마스터.
잠시 스쳐가는 인연들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황자의 재능을 아끼고 도움을 주기 위해 애를 썼다.
황자가 제법 유능한 모험자로 탈바꿈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절하던 유랑 생활은, 어느덧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최대한 즐기기 위한 유쾌한 식도락 여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황궁에서 도망친 후 수년. 조금은 뜸해지긴 했지만 암살자들의 추격은 끊이지 않았고 네이트는 주기적으로 도시를 이동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자, 자연스럽게 여인들과의 만남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네이트는 아마도 상당히 여인들에게 먹히는 스타일이었던 모양이었다.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사정임을 밝혔음에도 멋진 검사와 한순간의 불꽃같은 사랑을 원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당시 네이트는 유랑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 보니 그녀들에게 한순간의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조금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금 생각하면 어리숙하기 짝이 없지만 나름의 절절한 이유를 가지고 여인들을 만났다.
늘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그는 사랑에 충실했다.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를 만나는 여인들은 무척 행복해했고, 이별은 언제나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단지 네이트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은, 주기적인 중독에서 벗어난 그가 오러까지 제대로 다루게 되면서 그의 건강이 빠르게 호전되었다는 것.
그리고 본래 타고 난 신성력이 역대 교황들을 크게 웃도는 터라, 그가 가진 본신의 치유력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즉, 그는 불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그는 20세가 다 되어 알게 되었다. 추격자들의 빈도가 뜸해지면서 제법 오래 머물게 된 도시에서, 그의 애인 멜로디가 헛구역질을 하던 날부터.
의원의 진단은 임신이었다.
애인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얼마나 순진하고 지고지순한 여인인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한 가지 섬뜩한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이트는 그때부터 정보 길드를 고용하여, 이전에 사귀었던 여인들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몸이 정상이 되었던 것일까?
후사가 없을 것이며 단명할 것이라는 오라클의 예언은 대체 무엇이었나?
만에 하나 다른 여인들에게도 아이가 생겼다면, 아버지 없는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일까?
초조하게 하루하루 기다리는 동안 멜로디의 배는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그해 겨울이 될 무렵 그는 정보 길드로부터 답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여인들의 이후 행적과 아기의 외형으로 미루어 볼 때, 의뢰인의 친자로 의심되는 아이는 현재 3명. 조사가 진척되면 차후 추가 보고 예정.
찾아보면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거 어쩌지? 일단 다 찾아서 책임을… 아니, 그럼 멜로디는 어떻게 하지? 일단 멜로디와는 결혼해야 할 텐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이 클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혹시 저 여자들이 다른 사람과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다면? 그럼 그냥 모른 척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 아닐까? 아니, 아니지. 그런 무책임한…….’
네이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진 살이었으니.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는 일단 출산일이 다가오는 애인을 보살피는 데 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개입해야 하는 상황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인들과 아이들의 현 상황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길드에 추가로 의뢰했다.
그런데 그의 복잡한 개인 사정과는 별개로 신성제국의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황자와 1황녀의 계승권 싸움이 본격화되는가 싶더니 2황자가 갑자기 판세를 휘어잡으며 황녀를 쳐내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뜬금없이 성황이 서거하면서 1황자파와 2황자파의 내전이 일어나나 했더니, 어이없게도 수도 내 병력 간의 작은 마찰로 두 황자가 동시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나다니엘 클라인, 21세.
마침내 멜로디가 어여쁜 딸을 그의 품에 안겨준 경사스러운 날.
그리고 3개의 성기사단과 5인의 추기경들이 떼거리로 마을로 찾아와, 새로운 성황의 탄생을 축하하며 일제히 무릎을 꿇은 날.
정보 길드에서는 또 한 명의 아이를 찾았음을 알렸고, 그는 황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 * *
“황녀님이 하신 말씀을 아직도 신경 쓰고 계십니까?”
달칵.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네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지난 수년간 그를 옆에서 보필해 온 시종장 루이스였다.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저녁 시간에 성황이 즐기는 차를 알아서 대령하는 유능한 작자다.
“흠…….”
네이트는 괴고 있던 턱을 반대쪽 손으로 옮기더니 지나가듯이 툭 질문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멜리아가 한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루이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모시는 젊은 성황은 간혹 이럴 때가 있었다. 고민을 끝내고 완전히 결론을 내린 후에야, 참고도 하지 않을 시종장의 의견을 물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노련한 시종장은 적당히 상식적인 의견을 내뱉었다.
“본래 다정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분이 아니었습니까. 무서운 꿈이라도 꾸신 것이겠지요.”
“그래.”
네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궁은 어떠한가?”
“모레스 황자님께오서는 마사인 님과 함께 하루 종일 검술 수업에 매진하셨다 합니다. 두 분 모두 전에 없이 의욕적인 모습이었고, 허물없이 잘 지내시는 듯하다 들었습니다.”
“그렇군.”
네이트는 짧은 답과 함께 찻잔을 들더니, 마시지도 않을 찻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시종장은 묵묵히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곧 성황이 그에게 무언가를 명령하리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네이트는 입을 열었다.
“…루이스.”
“예, 하명하십시오.”
“아멜리아의 방에서 목걸이를 찾아오게.”
루이스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황녀가 가진 많은 장신구들 가운데서 성황이 특별히 지칭하는 것은 단 하나뿐일 것이다.
그 보석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시종장으로서는, 성황이 이 사건을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폐하, 그 목걸이는…….”
당황한 시종장이 입을 여는 차에, 갑자기 성황이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말문이 막혀 입을 벙긋거리던 그는 네이트가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
곧 위에서 시커먼 인영이 떨어져 내린다. 검은 잠행복을 입은 남자였다.
루이스에게도 안면이 있는 정보 길드의 요원이었는데, 솜씨가 참으로 귀신같은 자였다. 나타날 때도 인기척이 없었지만,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대체 성황은 어떻게 매번 이 남자가 찾아오는 것을 미리 알아채는 걸까, 시종장은 볼 때마다 그것이 신기했다.
“성황 폐하.”
네이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절을 올린 남자는,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보고를 시작했다.
“오랜 조사에 새로운 진척이 있어, 늦은 시간 찾아뵈었습니다.”
“…….”
루이스는 흠칫 놀라며 성황을 바라보았다. 이 정보 길드가 오랜 시간 매달려 있는 사안이라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어지간해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네이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진다.
“…고하라.”
“예, 폐하께서 유세니아 온천 마을에서 만나셨다는 여인을 추적했습니다. 마을을 떠난 후 행적이 완전히 끊겨 지금까지 제자리걸음이었으나, 수소문하던 중 그녀가 로한의 한 남작가의 여식임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유세니아라. 아마도 유랑 중기의 일이다.
이상하게 종적이 묘연하다 했더니 로한 사람이었던가.
“온천 마을에서 출산까지 하고 귀향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한에 입국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조사에 차질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로한에 들어가기 전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달그락.
조금 거칠게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 소리에, 정보원이 성황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여인을 비롯한 일행은 모두 사망했으나, 이후로 도적단에서 사내아이를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아기는 아마도 도적들이 키운 듯한 정황이 포착되어…….”
핏기가 사라질 듯 세게 말아 쥔 성황의 주먹을 응시하던 시종장 루이스는 곧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성황의 여덟 번째 자식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