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41)
성황의 아이들-141화(141/469)
§ 141. 성황의 관 (3)
“그렇군요.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브루노 단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콧수염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저는 단순히 폐하께서 영능력자들을 모아 쓸 만한 비밀 조직을 만드셨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설마 아렌쟈를 조직하고 곁에 두시는 이유가 그런 것일 줄이야.”
다음날, 성진은 브루노 단장에게 전날 성황과 했던 대화를 대충 말해주었다.
일단 그도 성진의 측근이니만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관해 조금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오라클이라든지, 선황비의 유품 같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는 빼고.
“폐하께서는 언제든 의중을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시는 일이 없으시죠. 그리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곳에는 마사인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브루노 단장과의 대화에서 소외되는 느낌이 있었던 터라, 아예 탁 터놓고 모두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사인은 기뻐하기 보다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제가 근위대장으로 있었을 당시에도 아렌쟈라는 조직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어렴풋이 뭔가가 있다는 짐작만을 했을 뿐이죠. 한데 이런 중요한 기밀을 제게 막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이거, 예전과는 달리 꽤나 조심스러운 태도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는 그저 적당한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오히려 진작 얘기해 주지 못해서 면목 없어.”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마사인은 성진을 성심성의껏 돌봐줘야 하는 어린애 정도로 생각하는 듯 보였었다. 그러다 디고리 저택에서 죽을 뻔하고 나서는, 아예 성진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지 못해 안달이었지.
그러나 최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그도 나름대로 적절한 거리라는 것을 찾아가려 노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냥 내가 어린애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지. 이제는 어느 정도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봐도 좋겠지?’
그러자 마왕 놈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면 아예 포기한 건지도? 네가 저놈 속을 좀 썩였어야지.]‘…닥쳐!’
무척 아프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군. 뼈를 맞았다는 거 아닌가.
성진은 표정을 관리하며 그에게 덧붙였다.
“이런 중요한 일은 경에게 먼저 의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봐. 경은 진주궁의 경호 책임자이자 내 검술 스승이잖아?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러자 마사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는 걸 보니 어째 대단히 감격한 모양.
‘이 양반도 은근히 감수성이 예민하단 말이야…….’
아렌쟈뿐만이 아니지. 성진은 조만간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에게, 다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정식으로 인사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매번 진주궁에 드나들면서 바짝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전 데카론 나이트인 브루노 단장과 상급기사 마사인 경이다.
단장은 성진의 방에 누군가가 몰래 드나드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요즘 들어 마사인 경도 슬슬 뭔가를 눈치채고 있는 기색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서로가 쓸데없이 탐색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게, 아예 탁 터놓고 어울려 지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어쩐지 이 세 사람과는 앞으로도 쭉 함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면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저하?”
브루노 단장이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아렌쟈를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금이라도 제가 그곳에서 발을 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음? 아니야, 단장.”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렌쟈를 완전히 신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유용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 그리고 단장에게 제안한 자리가 꿀보직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아.”
검이 흉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 흉기에 손을 베이느냐, 아니면 제대로 무기로 휘두르느냐는 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린 일인 거다.
“…하면?”
“그대가 딱히 기사단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계속 아렌쟈의 월급 도둑으로 지내며 내 곁에 머물러 주면 고맙겠어. 언젠가 아렌쟈와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충분하고, 무엇보다 난 단장이 내주는 차가 정말 좋거든.”
그래. 언제부터인가 성진은 차향을 제대로 즐기게 되었다. 보존식으로 칼로리만 채우며 살던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장족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게 다 수석 시종장 루이스와 브루노 단장 때문이겠지.
어찌나 차를 맛있게 만들어 오는지, 여간해서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는 성황이 매번 찻물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게 이해가 갈 정도라니까.
그 말에 브루노 단장이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거 참으로 영광입니다, 저하.”
아니, 명색이 전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차 끓이는 기술 인정받은 걸 가지고 좋아하지 말라고.
그렇게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마사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나, 마사인 경?”
“…실은 그렇습니다, 저하.”
주저하던 마사인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제가 어린 시절 숙부님을 뵈올 당시, 그러니까 폐하께서 아직 보위에 오르시기 전의 일입니다만…….”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꽤나 무거운 이야기들이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 어린 폐하께서는 그리 황궁 내에서 입지가 좋은 편이 아니셨습니다. 언제나 암살 위험에 시달리셨고, 선황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전혀 돌보지 않으셨죠.”
매 식사에 독이 올라오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몇 번은 대놓고 호위기사에게 공격당한 적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린아이가 홀로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할 지경이다.
당시 성황의 입지가 그렇게 위태로웠던 것은, 이미 장성한 다른 형제자매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구축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황비의 출신이 문제가 되었으리라. 바로 그가 불길하다고 배척받던 코른시임 일족의 핏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궁의 불경한 자들은 어린 성황의 앞에서, 대놓고 그를 ‘기분 나쁜 코른시임’이라든지 ‘재수 없는 코른시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는 말은?”
“예, 폐하께서 코른시임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폐하 역시도 업무 외의 개인적인 말은 극도로 아끼시는 편이 아니십니까?”
아, 마사인이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혹여 폐하께서는, 본인 스스로를 그 코른시임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는지요?”
“…….”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흠…….”
그리고 성진을 포함한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응접실의 공기가 어찌나 우중충해졌던지, 마침 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던 에디스가 움찔 놀라 눈치를 살폈을 정도였다.
“왜 다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저하?”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에디스의 손에는 환한 노란색의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그건 웬 꽃이야?”
평소 클로에가 보내오는 것과 달리 포장이 조금 조잡해 보여 물었더니, 에디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황궁 여기저기서 사제들이 이 꽃을 나눠주고 있어요. 황금의 크로커스죠. 오늘은 오랜만에 초대 성황 폐하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니까요.”
최근 차를 끓이는 업무를 브루노 단장에게 빼앗긴 후.
이 속 편한 아가씨는 반성하고 더욱 정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가 시간이 생겼다며 신나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행사가 다 있었어?”
“어라? 정말 모르셨어요, 저하?”
에디스는 화병에 꽃을 꽂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깥은 지금 완전 축제 분위기예요. 오늘이 바로, 새 성녀님이 성황의 관을 배알하는 날이잖아요.”
* * *
델크로스의 초대 성황, 카드모스 클라인.
그는 이 땅에 천년의 성국을 건국한 주신의 대리자이자, 이후 300년 이상을 살다 간 인간을 초월한 반신이다.
카드모스는 그 반신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평생 젊음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난 후에도, 육체는 조금도 시들지 않아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 성스러운 기적의 증거는 현재 화려한 관 속에 봉안되어, 성 바스티안 교회 지하에 고이 안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랍니다, 서이서 님. 무려 성황의 관 배알 의식이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거예요!”
서이서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시스터 엘렉트라는 한껏 들떠서 떠들어댔다.
“그것이 무슨 말이겠어요? 그만큼 서이서 님이 대단한 성녀님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시슬레 님조차도 성황의 관 배알을 허락받지 못하셨답니다!”
그 말에, 그러잖아도 잔뜩 이골이 나 있던 서이서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뭐? 당신 지금, 시슬레 님이 나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네?”
그 의외의 반응에, 시스터 엘렉트라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닙니다. 성녀님, 저는 단지…….”
“그런 불경한 태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해요!”
흥! 코웃음을 친 서이서는, 얼어붙은 시스터를 뒤로 하고는 쌀쌀맞은 태도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특별 미사다 행사 준비다 끌려다니느라 심히 불쾌하던 차였다.
‘왜냐하면 시슬레 님을 만나러 갈 수 없으니까!’
웨스커 대주교를 위시한 고위 사제들로 이루어진 거창한 행렬에 휩쓸려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에도, 그녀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시슬레 님을 만나러 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꿍얼거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홀로 넓은 회랑 안에 멀뚱히 서 있었다. 눈앞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서이서는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 전에 작가 씨에게 성황의 관이 무엇인지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서 그것을 배알하는 상황이 되자 문득 가슴 한편이 덜컥 내려앉았다.
관 속의 시체와 한 방에 있어야 한다고?
“어, 잠깐…….”
서이서가 기겁을 하고 있는데 끼익, 쿵! 매정하게도 바깥에서 문이 닫혔다.
“초대 성황의 영혼이 축복을 내린다더니, 정말로 귀신 나오는 거 아니야?”
성황가의 보물이라는 말만 들었지, 정작 성황의 관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서이서는 그제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뇌리에, 영혼을 뒤흔드는 듯 강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씸하도다. 그 녀석, 참으로 괘씸하기도 하지.]“……?”
그리고.
갑자기 허공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남자가 나타나 사뿐 관 위에 내려앉았다.
“……!?”
서이서는 순간 눈앞에서 신을 보는 줄 알았다.
반투명해 보이는 남자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사금을 뽑아낸 듯한 머리카락과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황금의 눈동자. 온몸을 감싸고 있는 금빛의 후광.
심지어는 그가 걸치고 있는 법복 역시 화려한 황금의 문양으로 뒤덮여 있다.
그 폭력적이리만치 압도적인 위용. 의심할 나위 없는 신성의 편린.
마치 그녀가 처음 성황을 봤을 때와도 같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멍하니 위를 쳐다보며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남자가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뇌까렸다.
[게다가 기껏 보내온 것이 이다지도 하자가 많은 그릇이라니, 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뭐, 뭣?”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불량품 취급을 하고 있어?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다!
서이서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저기요?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하자가 많아? 이봐요! 당신이 반신이면 다예요? 네?”
[하하. 어리석기는 또 어찌 이리도…….]남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그래, 다행히 아직 인형이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만, 그래도 여기저기 너무나 결손이 많은 영혼이로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 말 그대로다. 네가 한번 말해보겠느냐? 여인아, 너는 본래 그리 망둥이와 같이 사리 분간을 못 하고 날뛰는 성미였더냐?]“뭐…….”
[네가 언제 이 세계에 왔는지 제대로 기억은 하고 있느냐?]말문이 막힌 서이서를 바라보던 남자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뭐, 어찌 되었든 좋겠지, 가짜 성녀야. 금이 조금 있다고는 해도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임에는 변함이 없으니. 내 기꺼이 너를 새로운 성녀로 받아들이마.]남자의 금빛 동공이 세로로 쭉 갈라지며 수축한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과도 같았다.
서이서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내… 내게 무슨 짓을 할 셈이죠?”
[당연한 것 아니냐? 그 아이가 이곳에 와서 날 만날 리가 없으니, 내가 직접 여기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금빛의 휘광을 감은 손이 천천히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온다.
[안심하거라, 여인아. 내 너를 고이 쓰겠노라. 지금은 우선 당장 황궁으로 달려가, 선조를 존중할 줄 모르는 그 괘씸한 녀석에게 한 소리 해야 직성이 풀리겠구나.]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