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52)
성황의 아이들-152화(152/469)
§ 152. 탄신연 (1)
탄신연의 날이 밝았다.
전날 밤, 황궁 밖을 돌아다니느라 잠이 모자랐던 성진은 그날 완전히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침 수련도 건너뛰고 식사를 입안에 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에디스가 그런 성진의 모습을 보며 기겁을 했다.
“세상에, 저하! 얼굴이 이게 뭐에요!”
“응? 왜?”
“완전 푸석푸석하고 퉁퉁 부었잖아요!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이셔야 하는 이 중요한 날에,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요? 예?”
흠, 그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야? 몸이 좀 무거운 느낌은 있지만.
그러나 시녀들이 보기에는 달랐던 모양이다.
에디스의 호출에 연이어 달려온 다른 시녀들이, 성진의 얼굴을 보고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리액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성진은 아침식사를 끝내자마자 팩이니 뭐니 이상한 것들을 얼굴에 잔뜩 붙이고는 얌전히 방 안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흐아암.”
성진은 평소처럼 연무장으로 달려가려고 안달하지 않았다. 유난히 몸이 피곤하게 늘어지기도 했고.
또 그에게는 얼마 전 터득한 누워서 명상하기 스킬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졸다가 명상하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에디스가 냉수로 성진의 얼굴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저하, 왜 다른 날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탄신연 전날 밤샘 명상을 하시는 거예요?”
“응?”
밤샘 명상?
“평소랑 다르게 잠꼬대가 없으시기에 호위기사님을 찾았더니, 브루노 단장님께 주의를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저하께서 중요한 명상 중이니 아침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단장이?”
성진이 옆을 돌아보았더니, 브루노 단장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성진을 마주보았다.
‘…알고 있군.’
뭐, 전직 데카론 나이트 몰래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렌쟈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은 알았을 테니, 이전처럼 큰 소동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던 거겠지.
그나마 마사인이 마침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분명 뭔가 눈치를 채고 성진을 추궁하려 들었을 테니까.
마사인은 어제 저녁, 모처럼 수도의 자택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 역시 황가의 일원으로 나름 탄신연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많다나.
‘그나저나 잠꼬대라니, 대체 뭘까…….’
에디스는 일전에도 성진의 부재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사정을 물었더니 한다는 말이, 성진이 자정을 지나 늘 같은 시간이 되면 몇 분가량 잠꼬대를 한다는 거였다.
열병을 앓은 이후부터 생긴 일이라고 하니, 아마 모레스에게는 없던 버릇이라는 것.
예전에도 자신에게 그런 잠버릇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진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무슨 잠꼬대를 하더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웅얼거리는 발음이어서 잘 알아듣지는 못했어요. 어쩌면 델크로스 말이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하던데요.
에디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 대답을 들은 성진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이 애가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렇지, 만일 다른 사용인이 그걸 들었다면 어땠을까?
모시는 황자가 오밤중에 출처 모를 방언으로 잠꼬대를 하는데, 악마가 씌였다든지 하는 의심은 조금도 들지 않더냐?
마왕 놈에게도 캐물었더니 이놈이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지.
-나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던데? 어쩌면 제대로 된 말이 아니라, 그냥 옹알이였는지도 모르지. 크게 의미를 두지 마.
옹알이라니,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성진은 기가 막혔지만, 마왕 놈은 뭔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 이후 더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찜찜하다…….’
하지만 잠꼬대에 대해 더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오전 일찍부터 아멜리아와 로건이 진주궁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굴에 뭔가를 잔뜩 붙이고 있는 성진을 보더니,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신이 나서 그의 양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넌 하필이면 탄신연 전날 밤을 새냐.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그래, 모레스. 아마 오전 중에는 꼬박 얼굴 관리만 해야겠구나.”
“아니, 다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난리에요? 연회가 오늘 하루만 있는 것도 아닌데…….”
성진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나 봅니다.”
“그래. 이전의 기억이 아예 없다지 않니.”
그러더니 아멜리아는 차분히 성진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레스, 잘 들으렴. 시녀들이 이러는 이유가 다 있단다. 오늘의 연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탄신연은 성황의 탄신일 전후로 총 3일에 걸쳐 치러진다.
얼핏 생각하면 둘째 날이 메인이 아닌가 싶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사정이 조금 달랐다.
메인 연회가 성황이 주도하는 의례 위주의 행사이고, 마지막 날의 연회는 조금 가벼운 분위기의 뒤풀이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첫날의 연회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설레는 상태로 참석하게 되는, ‘성대한 파티’ 느낌의 행사라는 것.
아무래도 각국의 왕족이나 유명 인사들이 전부 참석하는 자리니만큼, 그들에게 제 첫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중요한 날인 거다.
“거기다 아바마마께서 안 계시니 첫날은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거든. 아바마마께서는 둘째 날의 의례 외에는 아마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실 거다. 지금까지는 쭉 그러셨으니까.”
요컨대 사장님 빠진 회식 같은 건가.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러는 건데?”
본인 생일 아니야? 왜 손님들끼리 생일잔치를 즐기지?
성진이 의아해하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참석자들을 배려해 주시는 거겠지. 신과 가장 가까운 주신의 대리자께서 빤히 지켜보는 자리에서, 어느 누가 마음 편히 연회를 즐길 수 있겠니.”
“음…….”
글쎄, 성진은 그 양반이 귀찮아서 안 나온다는 데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뭐, 그래봤자 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이지만.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다들 탄신연 준비로 바쁘지 않아요?”
“같이 의논할 일이 있다. 나는 곧 대례 미사에 참석해야 해서 아마 지금 외에는 시간이 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입을 연 로건이 꺼낸 용건은 다음과 같았다.
정교회에서 서이서를 시슬레와 함께 탄신연에 참석게 하도록 결정했다는 것.
“아무래도 그녀와 함께 카드모스를 연회장에 그대로 풀어두는 게 마음이 걸린다.”
요전에 카드모스가 본궁을 무너뜨릴 뻔한 것이 로건에게는 꽤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를 에스코트하지. 제대로 단속하면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살피겠다. 그 카드모스가 언제 어떤 돌발 상황을 만들지 알 수 없으니까.”
서이서와 카드모스. 둘 다 다른 의미에서 요주의 인물이지. 물론 로건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시슬레는 어쩌고?”
“그러고 보니, 스카르차피노 영애에게 뭔가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
“그래서 내 생각엔 지그스문트 대공자에게 부탁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
아멜리아의 대답에 성진이 기함했다.
“네에?”
아니 뭐라고요? 난 절대 인정 못합니다!
그런 양아치 같은 놈에게 꼬맹이를 맡기다니!
성진이 얼굴에 붙은 팩을 모조리 바닥에 떨굴 기세로 왁왁거리자, 아멜리아가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시슬레에게는 어느 정도 격에 맞는 파트너가 필요하단다. 현재로서는 아마도 지그스문트 대공자만 한 선택지는 없을 거야. 지방 귀족이라고는 해도, 지그스문트 변경백의 위세는 결코 중앙 대귀족 못지않으니까.”
심지어는 로건조차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꽤나 전도유망한 친구지. 이전 탄신연에서 몇 번 얼굴 본 게 다지만,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꽤나 과묵하면서도 진솔한 친구로 보였다.”
이럴 수가! 정말로 그놈의 실체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인 거야?
어떻게 이렇게들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특히나 로건, 저놈은 지금이 인생 2회차가 아닌가!
[너 같은 놈을 예쁘다 싸고도는 걸 보면, 확실히 애들이 좀 과하게 순진하긴 하지.]‘닥쳐!’
마왕 놈과 속으로 한창 실랑이를 하고 있자니, 로건이 떨어진 팩을 정성스럽게 주워서는 다시 성진의 얼굴에 처덕처덕 올려준다.
“야, 인마! 넌 바닥에 떨어진 걸 또 사람 얼굴에 올리고 있냐?”
“…안 되는 건가?”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성진을 마주 보는 저 순해 빠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뒷골이 다 당겨왔다.
아, 혈압 올라.
그러는 동안 아멜리아는 무척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스카르차피노 영애가 대단히 걱정되는구나. 부디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
“모레스, 너도 되도록 빨리 스카르차피노 가에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내야 할 거야. 그리고 탄신연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녀를 살펴주렴. 비공식적인 이야기라고는 하나, 그녀는 그래도 너의 오랜 약혼녀란다.”
글쎄, 성진은 이사벨라의 상태에 대해 꽤나 회의적이었다.
일단 성황 덕에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그녀가 정신이 들더라도 과연 어떤 상태가 될지는 미지수인 거다.
성진이 짐작한 대로라면, 성황은 아마도 정수리를 내리찍는 것으로 그녀를 시구르트 시구르슨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킨 거겠지.
하지만.
-자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이 무고하고 불쌍한 이를 기어이 해칠 셈이요?
놈의 말대로라면 이미 이사벨라의 인격은 사라졌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녀가 혹시 리카르도와 마찬가지로 정신 착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놈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터.
그래도 차라리 그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만약 스스로를 아직도 차원의 이야기꾼이라 믿고 있다면…….
‘아마도 철저하게 시구르트 시구르슨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을까?’
그러면 성진은 그녀를 과연 누구로 보고 대응해야 할까.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마침내 저녁이 되어,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성진을 보고 시녀들이 너도나도 찬사를 터뜨렸다.
“더없이 헌앙하신 자태이십니다!”
“어두운 예복이라 그런지, 황자님의 금빛 머리카락이 더욱 돋보이지 않나요?”
“어쩜, 커프스와 작은 장식술조차 이렇게나 황자님의 눈 색과 잘 어울리는지!”
“아아, 한눈에 반해 버릴 것 같아요!”
…얘들은 단체로 수업이라도 받는 걸까.
어째 칭찬의 레퍼토리가 하나같이 똑같은 거지?
그러는 와중에도 에디스는 보석함 한쪽에 있는 붉은 귀금속들을 미련이 남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귀한 것이 선물로 들어왔는데 왜 착용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저하? 다른 궁 시녀들 얘기로는 이번 탄신연에는 적금이 대유행이라고 하던데요. 모두들 적금 장신구를 하나라도 더 마련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어요.”
그 장신구들은 얼마 전 라비주리 후작가에서 보내온 값비싼 선물이었다.
듣자 하니 아멜리아에게도 고가의 귀금속 한 세트가 도착했다던가. 일전에 시내 음식점에서 호위기사들이 소동을 일으킨 데 대한 사과의 의미란다.
아멜리아는 그 선물들을 방 안에 고이 모셔놓고는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사건의 전말을 몰랐기 때문에, 갑자기 일면식 없는 외국 귀족으로부터 값비싼 선물이 도착하자 얼떨떨했던 탓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적금 장신구를 하지 않는 데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쁘게 세공되어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 나는 저 붉은 광택이 대단히 껄끄럽구나, 모레스.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성진이 보기에도 핏빛이 배인 듯 불그스름한 색으로 빛나는 금속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드레스 코드를 맞추면서, 적금 대신 다른 장신구를 하기로 미리 합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세인 대공이 아시면 섭섭해하실 겁니다. 적금은 아세인 공국 특산품이잖아요.”
아세인 대공은 모레스의 외할아버지다.
에디스의 말을 들은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라비주리 말고, 아세인에서 직접 보낸 적금 장신구가 있나?”
“네? 아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그럼 됐어. 신경 꺼.”
아세인 대공의 권세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성진 역시 그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을 듣고 있었다. 장사로 수십 년을 굴러먹은 상인들도 울고 갈 짠돌이라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자가 죽다 살아났는데 어째 지금껏 안부 한번 묻지를 않냐.
보약을 지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혈육으로서의 정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거기다 대고 설마, 손자가 직접 적금을 구매해서 광고까지 해주길 바라지는 않겠지?
* * *
[와…….]‘와…….’
은장미궁 앞에 도착한 성진과 마왕은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본래도 지상을 걸어 다니는 날개 없는 천사라고 생각했지만, 작정하고 치장한 아멜리아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장미의 여신 같았다.
강렬한 붉은 꽃잎 같은 드레스에 감싸인 아멜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성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좀 어색하지 않니?”
“…아뇨, 누님. 잘 어울리십니다. 정말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극도로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청초할 수 있을까. 참으로 경이로운 미모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어찌나 압도적이었던지, 시슬레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도착한 오르덴 놈마저 완전히 넋이 나간 듯 한동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 이 새끼, 눈 저리로 안 돌리냐? 죽는다!’
성진이 눈을 험악하게 부라리자, 놈은 그제야 자신이 에스코트해야 할 작은 성녀에게로 허둥지둥 시선을 옮겼다.
파트너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얼이 빠지다니,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다행히 뭔가 골똘히 몰두하고 있던 작은 성녀는,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에요. 오늘은 참으로… 밤…….”
성녀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의아해진 오르덴이 오러로 청력을 돋워서 유심히 들어보니, 성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중이었다.
“…밤이에요. 오늘은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에요. 오늘은 참으로 아름다운…….”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르덴은, 성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그날 연회장에 갑자기 투하될 폭탄의 전조임을, 당시 그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