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59)
성황의 아이들-159화(159/469)
§ 159. 사도 (3)
“이쪽은 제 약혼녀인 올리비에입니다.”
도미니코의 소개에, 젊은 여인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올리비에 라마리라고 합니다.”
그녀를 본 순간 성진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암살자잖아! 이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외모는 많이 달랐지만, 여자를 마주하자마자 성진은 대번에 다샤를 떠올렸다. 기민해 보이는 눈동자와 사교적인 웃음. 조용한 걸음걸이.
무엇보다도, 오러가.
능숙하게 갈무리하고는 있지만, 여자는 분명 오러를 감추고 있었다. 실제로는 꽤나 높은 오러 층을 쌓았으리라.
그러나 일반인 정도의 오러 활성으로 보이고 싶었는지, 그녀는 부분적으로 오러 은폐를 활용하는 중이었다. 아마 사업을 하는 귀족 영애라는 신분에는 그쪽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겠지.
덕분에 기척을 모두 지울 때와는 다른 작은 위화감이 생겼다.
물론 최근 오러 은폐에 도가 튼 성진이 아니었다면 쉬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라,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라마리라니, 처음 듣는 가문이오만.”
성진의 앞을 슬쩍 막아서며 마사인이 추궁했다.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드는 모양.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성진이 보기에도 제법 위압적이었지만, 여자는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브르타뉴의 자작가입니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델크로스 최고 부호의 장자와 약혼한 것 치고는 소소한 출신이다. 마사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녀가 덧붙였다.
“도미닉과는 사업으로 만나서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답니다.”
“흠. 하고 있는 사업이 뭐지?”
“작은 포목 사업입니다. 품질 좋은 아마를 직접 재배해서 직물을 생산한답니다. 간혹 카르타고의 양모도 취급하죠.”
아냐. 절대로 정보업이나 암살업을 할 것 같은데?
성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살포시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죽했으면 마왕조차 헷갈릴 정도.
[혈압이나 맥박 변화가 거의 없는데? 사실을 말하는 거 같아. 이성진, 네 착각 아니야?]‘아냐. 저 여자는 분명 숙련된 암살자다. 거짓말에 대단히 능숙하거나, 어쩌면 정말로 위장 사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중에 다샤에게 라마리에 관해 조사해 보라고 해야겠다. 그녀에게 맡길 일감이 자꾸 늘어나는군.
그러나 올리비에의 다음 말에는, 성진도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다.
“대부분 밀로 상단을 거쳐 들어오다 보니, 델크로스에서는 아마 라마리라는 이름이 더욱 생소할 거예요.”
성진이 되물었다.
“밀로 상단?”
“네, 그렇습니다. 최근 브르타뉴에서 들어오는 많은 품목들이 밀로 상단을 거친답니다.”
“그렇군.”
성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시선이 잠시 그를 살피듯 지나가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분명 밀로 상단은 아세인과 로한을 대상으로 주류를 유통하는 걸로 아는데, 이게 어딜 사람을 함부로 떠보고 있어?
“그래서, 이제는 스카르차피노를 통해 델크로스와 직거래를 하려는 건가?”
“네?”
“다른 상단을 끼고 사업을 하면, 아무래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지 않나 해서.”
“…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조만간 델크로스 의상실에서도 라마리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군. 기대하겠네.”
“…….”
그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도미니코 스카르차피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선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마사인 경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하, 곧 퇴식 군례가 있을 겁니다.”
성진이 반색했다.
“로건이 또 나오나?”
“예. 아마 중간에 릴리움 별동대의 단독 의장시범도 있을 겁니다.”
오! 그건 놓칠 수 없지.
사진기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뭔가 재롱잔치 보러온 부모가 된 심정이다.
“그럼 우린 좀 더 앞쪽으로 가보겠네. 자네들은?”
“예. 저하. 부디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다음에 또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도미니코의 태도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성진은 그를 한차례 흘겨준 후 몸을 돌렸다.
너 이 자식!
감히 암살자를 약혼녀라고 소개한 데다, 날 떠보도록 시키기까지 해?
이제 와서 예의 차리는 척해봐야 어림없다. 이미 넌 나한테 수상한 놈으로 찍혔어!
멀어져가는 황자 일행을 바라보던 올리비에가 입을 열었다.
“도미닉, 이번엔 네가 잘못 짚은 건지도 몰라.”
타운하우스에 침입한 세력이 정말로 황자의 사람이라면, 그가 밀로 상단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장에 암흑 교단의 표식을 두고 유유히 사라졌지 않나. 그렇다면 적어도 암흑 교단의 관계자거나, 암흑 교단과 밀로 상단의 관계를 잘 아는 자라는 뜻이겠지.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건, 만사 관심 없어 보이던 황자는 끝까지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한 거라면 소년은 타고난 사기꾼일 터다. 그녀가 속한 단체의 수장을 상대로도 능히 사기를 칠 수 있으리라. 아마도 황궁에서 곱게 자란 황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나 도미니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글쎄. 저 황자가 모임에 다녀간 후 리카르도가 그 꼴이 되었지 않나. 거기다 황자는 쭉 리카드로와 친하게 지내왔다. 그놈이 아무하고나 사귈 놈은 아닐 테니까.”
“그건 그렇지.”
“거기다 증거는 하나 없지만, 이상하게도 이사벨라가 의식을 잃은 것 역시 저 황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
도미니코는 안경을 슬쩍 추슬러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즘 그 지그스문트 대공자가 잠잠하지 않나.”
오르덴 지그스문트가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 나름대로 조사를 한답시고 어설프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 중이었지.
본래 뼛속까지 무인인 데다, 가주 몰래 한정된 인원으로 움직이다 보니 일어나는 불상사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경거망동 없이 얌전해진 것이다.
“그가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를 아나?”
“포기한 것 아냐?”
“그럴 리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가 사건을 마물 전담반에 의뢰 했다는 정보가 있다.”
“마물 전담반?”
“그래. 바로 저 모레스 황자가 관리하는 부서지.”
황자와 올리비에의 대화를 관찰하며 그는 확신했다.
그는 분명 자신 이상으로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한 것이다. 결코 또래 소년이 쉽게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올리비에.”
멀어져 가는 황자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도미니코가 명령했다.
“이제부터 저 황자에 대해 조사를 좀 해보지.”
* * *
“사도라고?”
노사제의 경악에 클레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그렇게들 이야기하더군요. 막내 황녀가 주신의 사도라고요.”
“그걸 정교회에서 인정했단 말인가?”
“네, 그렇다고 합니다.”
“벧엘라…….”
노사제는 심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대수확을 위한 그들의 대업이 수포로 돌아간 후.
살아남은 파종의 형제 두 사람은 지금까지 베르트랑 거리에 있는 한 물류창고에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
본래는 교단과 모종의 관계에 있는 밀로 상단에 의탁할 생각이었지만, 주교가 그들을 한사코 만류했다. 최근 상단을 주시하는 눈들이 늘어가는 추세라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에 와서? 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인가?”
노사제는 지극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도]에 대한 내용은 정교회가 일찍이 지하 교단과 함께 묻어버린 경전의 일부였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성 바스티안이라 알려진 성인은, 본래는 사도 바스티안이라 불렸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딸내미의 날조를 더욱 탄탄하게 뒷받침해야 했던 성황이, 성회의 깐깐한 영감들을 논쟁으로 이기기 위해 경전의 구석구석을 근거로 들다 보니 부득이하게 튀어나온 개념이었다는 것을.
어쨌든 클레멘스 사제의 얼굴은 기대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이 [사도]를 인정했다면, 언젠가는 지하 교단의 교리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우리를 암흑의 교단이라 매도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그런 희망적인 관측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래 지하 교단의 형제들은, 4개 종파의 대주교들을 주신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애열, 파종, 참회, 안식은 각기 다른 신이자 동시에 하나의 신이다. 모두 주신께서 현신하신 또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성황의 치세 초기, 정교회는 이 [사도]에 대한 내용 대부분을 경전에서 삭제해 버렸다.
지하 교단을 부정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그들을 이끄는 사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모레스 황자가 행한 일이 아닐까요? 그의 예비가 이제야 겨우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걸지도 모릅니다!”
“…모레스 황자가?”
노사제는 미심쩍은 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즈 사제가 불시에 게이트를 연 것이 실은 모레스 황자의 지시였다는 정황이 있었던 것.
그러나 혈기 왕성한 젊은 사제는 오랜만에 잔뜩 들떠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형제님, 대주교들의 예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레스 황자가 태어나던 날, 각 교단의 네 사도가 입을 모아 그를 축복했던 것을.
-기뻐하라! 아기는 교단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자]이니!
-오랜 억압에서 벗어나, 지하 교단은 다시금 번성하리라!
떨떠름한 노사제를 향해 클레멘스는 거듭 강조했다.
“예비된 자는 네 종파의 신께서 동시에 거대한 사명을 지워 이 땅에 보낸 자입니다. 그러니 모레스 황자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주신의 사도! 사도 중의 사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그가 흥분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을 때.
“…잠시만, 그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어보자.”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주교님?”
두 사제는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언제 창고 안으로 들어왔는지, 벽면의 그늘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주교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레스 황자가 어쨌다고? 뭘 예비했다는 말인가?”
“예, 주교님. 아시다시피 예비된 자는 주신의 사도…….”
그렇게 대답하던 클레멘스 사제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노사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클레멘스 형제.”
노사제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이 언제부터 우리의 주교님이셨나?”
“…예?”
“[파종]의 형제께서 어떻게 예비된 자에 대해 모를 수가 있지?”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클레멘스의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 교단의 뜻에 따라 그들이 델크로스에 숨어들었을 때, 그때도 주교님이 함께였던가?
언제부터 그들이 이단 재판부에서 있었던 일을 주교에게 시시콜콜 보고하게 되었지?
‘잠깐만! 그럼 대업은?’
그 대업을 누가 처음 알려 주었나!
우리는 언제부터 대업을 위해 [파종]을 했던 거지?
“…….”
공포와 경악으로 커다래지는 두 사제의 눈을 마주하고도 [주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반가면 아래의 입술이 빙긋 미소를 그릴 뿐.
클레민스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파종의 형제가 아닌 건가? 언제부터 주교의 행세를?”
“그렇소. 당신이 말한 대업이란 대체 뭐였단 말이오?”
“흠.”
반가면의 남자, 로메인은 뒷짐을 지고는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 봬도 꽤 오랜 기간 파종의 형제로 지냈던지라, 이제 어지간한 것들은 다 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천년이 넘게 이어져 온 종파란 건 그렇게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법이군요.”
“…뭣이?”
“거기다 모레스 황자에 대한 것은 정말 놀랐습니다. 안식의 교단이 그에게 뭔가를 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게 다 그의 출생부터 계획된 일이었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로메인이 저벅, 사제들을 향해 한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으나.
[진정하세요.]이어진 로메인의 명령에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파종의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아직 내게 있어 꽤 쓸 만한 말들이니까요.]영혼의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어딘가 기묘한 힘을 가진 목소리.
어느새 두 사제는 몽롱하게 변한 얼굴로 로메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그러니 내게 전부 말해 보세요. 당신들이 모레스 황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전부 다.]반가면 너머로 보이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에, 일순 기이한 노란 안광이 지나간다.
[대체 그 예비된 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 *
푸에취!
연회장을 향해 가는 마차 안, 갑자기 세차게 재채기를 하는 성진을 향해 아멜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니, 모레스? 혹시 감기라도 든 건 아니니?”
“어,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오러 유저는 어지간해서는 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감기 따위에 걸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성진은 또다시 재채기를 했다.
“에취!”
화들짝 놀란 아멜리아가 옆에 있던 숄을 꼼꼼하게 그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회 준비로 최근 무리를 했나 보다.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서 쉬렴.”
졸지에 두꺼운 숄에 돌돌 말린 김밥 꼴이 된 성진은 머쓱한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거, 이상하네. 누가 자꾸 내 얘기를 하나? 아까부터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성진이 애써 아멜리아를 향해 웃어 보이는 동안.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서는 하나둘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