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0)
성황의 아이들-160화(160/469)
§ 160. 폭풍우 (1)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덩달아 때 아닌 강풍까지 불어 닥치는 바람에, 막상 도착하니 연회장이 오히려 집처럼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조명들은 여전히 화려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지만, 첫 연회의 흥분이 가신 연회장은 전날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가 흘렀다.
‘메인 연회는 조금 더 정치적인 성격을 띤다고 했었나…….’
서로를 탐색하거나 견제하는, 어떻게 보면 작은 외교전이 치러질 수도 있는 자리.
그러나 아무래도 이권이 오가는 협상의 장이 아닌지라, 서로 교류하며 호감을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많았다.
덕분에 정치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연회장의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멜리아와의 가벼운 첫 춤을 마친 성진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숙제를 모두 해치운 기분이다.
예의상 혼담이 오가는 상대와 한 번은 춤을 춰야 한다고 들었지.
하지만 클로에 꼬맹이는 데뷔탕트 전이라 불참이고, 이사벨라는 정수리 부상으로 불참이다. 거기다 줄리아 마이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럼 연회 끝날 때까지는 자유란 말인 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레스 황자님.”
조금 한산한 분위기를 틈타 작은 소년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칼 같은 단발머리에 발그레한 볼연지. 라비주리 후작가의 샤를이다.
‘이 애가 연회에 참석할 나이가 되는구나!’
성황가 아이들은 물을 담뿍 먹은 풀처럼 길쭉길쭉 잘 크고 있기 때문에, 시슬레보다도 작은 저 소년이 13세 이상이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놀랍다.
그런데 반가운 기색으로 성진을 찬찬히 살피던 샤를이, 곧 대단히 실망한 얼굴을 했다.
“송구합니다, 저하. 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요?”
아, 그러고 보니 이 꼬맹이가 적금 장신구를 선물했던가.
“일찌감치 드레스 코드와 장신구를 맞춰둔 터라, 좀 아쉽게 되었군요.”
연회복이 완성된 것은 탄신연 직전이었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 해명이 먹힌 건지, 다행히 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말씀을 좀 낮춰 주십시오.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죠. 공자는 탄신연을 축하하기 위해 타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 아닙니까.”
그러자 샤를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쳐갔다.
“그런데 왜 로한의 왕자님께는……?”
아. 아까 그놈에게 반말 갈기는 걸 들었나 보다.
괜찮아. 그 제비 자식은 내 기준에서는 손님이 아니니까.
조금 험악하게 변한 성진의 얼굴을 관찰하던 샤를은 곧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진의 시선을 따라 아멜리아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는 로한의 그 제비 자식과 마주 서서 한창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 왕자와는 조금 거리를 두는 쪽이 좋을 텐데요. 들리는 소문이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샤를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속닥거렸다.
“풍문이란 것이 본디 실체 없는 바람 같다고들 하나, 그래도 씨앗이 날아들지 않고서야 황무지에 그냥 풀이 돋을 리는 없겠지요.”
“흠, 뭐…….”
확실히 로한의 레오나드는 썩 좋은 느낌이 드는 놈은 아니었다.
왕족으로 곱게 자랐을 놈의 눈에서 어쩐지 피 냄새가 난다고. 지구에 있을 때, 마물보다는 같은 헌터를 살육하며 권력을 쥐는 데 더 열심이던 그 쓰레기들이 연상되잖아.
그래서 처음에 놈이 아멜리아에게 접근을 시도했을 때, 성진은 최대한 놈을 막으려고 했었다. 그의 앞에 선 누님의 모습이 어딘가 겁에 질린 듯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심적인 안정을 되찾은 후 사정이 좀 달라졌지.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지만 성진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누님이 놈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통통한 쥐새끼를 바라보는 배부른 고양이와도 같다는 걸.
‘아. 뭔가 저놈에 대한 흥미로운 계획이 있는 거구나.’
그래서 놈이 마음에 안 드는 것과는 별개로, 성진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멜리아가 청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은근 빈틈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놈이 뭔가 당하더라도 그게 다 자업자득이겠지. 우리 천사 누님을 화나게 만들었다면, 그건 저놈이 악마보다 더 나쁜 놈이란 거 아니겠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을 향한 감시의 눈을 떼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뚱한 얼굴로 레오나드를 노려보고 있는데, 샤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왕자와는 반대로, 로한의 1왕자는 또 과하게 베일에 싸여 있는 편이죠. 듣자 하니 그는 아직 탄신연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병약하다고들 하더군요.”
그래. 예법 교사에게 대충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로한의 신료들도 걱정이 크겠습니다. 우리 브르타뉴는 그런 근심은 없어 다행입니다. 필립 왕자님께서는 무척 강건하시며 근면 성실하신,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분이시니까요.”
성진은 시선을 내려 샤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허? 이놈 봐라?
“꽤나 직설적인 의사 표현이군?”
이전만 해도 빙빙 꼬는 귀족적인 화법을 쓰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샤를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뉘 앞이라 돌려 말하겠습니까?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하. 앞으로 브르타뉴는 분명 제국의 행보에 가장 어울리는 동반자가 될 겁니다.”
“…….”
성진은 대답 없이 아멜리아와 레오나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구나.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누님 나이가 그렇게 된 건가? 하긴, 모레스 놈 역시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벌써 셋이나 있으니까.
게다가 아멜리아 누님은 성황가의 장녀가 아닌가. 그녀의 혼인이 이후 대륙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잔뜩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래도 열여섯이면 아직 한창 자랄 때라고…….’
어쩐지 입맛이 조금 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샤를은 무척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부담스럽게 성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냐.’
대체 내게 뭘 기대하는 거지? 차라리 차기 성황으로 유력한 로건에게나 가볼 것이지.
아니면…….
성진은 힐끗 상석 쪽을 확인했다.
흠, 아버지는 아직인가.
때마침 상석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리자베스 황비가 성진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 대체 요즘 황비는 뭐가 문제인 걸까.
슬슬 불편한 기분이 되어 자리를 피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연회장 한쪽에 아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줄리아 마이어 경? 오늘은 연회에 참석했구나.’
익숙하지 않은 얼굴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놀랍게도 그녀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느 아가씨들 사이에서 홀로 기사단 정복을 꿋꿋하게 차려입고서, 그녀는 조금 사무적인 표정으로 음료수를 들고 서 있었다.
아하, 로건 같은 고집불통이 저기 또 있었네.
‘어쨌든 숙제는 해야지.’
혼담 상대자에게 반드시 춤 신청을 하라고 누님한테 여러 차례 신신당부를 들은 터다.
샤를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성진은 천천히 줄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 보면 줄리아 마이어는 첫인상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전에 수도 경비대를 습격했을 때 꽤 도움을 받았지. 그 난장판을 치고 있는데도 아예 모른 척해 준 거니까.
사실 줄리아는 자신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수도 경비대장이 쩔쩔매는 꼴을 즐겁게 보고 있었던 거지만, 그런 깊은 속사정이야 성진은 잘 알지 못했다.
“줄리아 경. 괜찮으면 다음 곡을 부탁해도 좋을까?”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줄리아의 눈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마치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대답을 내뱉었다.
“…외람되오나 저하. 저는 지금 기사단 정복 차림입니다만.”
“음, 그렇군.”
춤 동작이 좀 까다로워지려나?
분명 드레스 자락을 잡고 팔랑거리는 동작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춤 신청을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돌려 거절하는 것 아닙니까!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황자의 얼굴에는 의혹 한 점 없었다.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다.
“아, 혹시 지금 업무 중인가? 그렇다면 미안. 지금 연회장을 경호하고 있어?”
“…아닙니다, 저하. 오늘은 비번입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해맑기만 한 소년의 얼굴에, 줄리아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긴, 정복을 입고 춤추지 말라는 법은 없지.
‘집에 가면 부모님이 또 잔소리를 하시겠군…….’
뼛속까지 기사인 여인. 정복을 고집하며 모든 구애자들에게 철벽 치는 여인.
세간에서 그렇게들 말하는 것과는 달리, 줄리아 마이어는 자신의 외양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근무가 아닌 날 어떤 꼴을 하고 다니든, 자신이 기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단지 아카데미 시절에는 학업이, 또 기사단에 들어가서는 업무가 미친 듯이 밀려들다 보니 쓸데없는 것에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을 뿐.
그래서 부모님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탄신연마다 정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다. 매번 밀려드는 춤 신청을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꽤나 귀찮은 일이었으니까.
멀리서 눈치만 보던 공자들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줄리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평화로운 탄신연도 올해가 끝인가.’
뭐, 정복을 입은 자신에게 춤 신청을 할 만큼 낯 두꺼운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머, 저기 좀 보세요.”
“생각보다 제법…….”
연회장의 좌중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독특한 커플에게 시선을 준다.
줄리아 마이어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쭉 뻗은 체형의 아가씨였다. 덕분에 한창 자라는 중인 성진보다도 훌쩍 키가 커, 두 사람이 춤을 추면 조금 어색한 그림이 만들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잘생긴 소년과 늘씬한 미녀는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법.
음악에 맞춰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소곤거리는 커플은 꽤 어울리는 듯 보였다.
물론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들었다면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갔으리라. 좋은 기회다 싶었던 성진이 지금 그녀에게 한창 업무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었으니까.
“7기사단의 출동 말입니까?”
줄리아가 되묻자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그는 밀로 상단의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위해, 어느 부서를 끌어넣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래. 7기사단 역시 정식 명칭은 [황도 수비대] 아닌가? 수도 경비대와 비슷한 업무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곤 줄리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병력을 동원하는 데에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단장 이상급 고위 관료의 명령이 직접 떨어지지 않는 한, 보통은 정식 요청서와 근거 법조항이 명시된 문서들을 행정부에 먼저 제출한 이후 시행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럼 단순한 지원 요청으로는 기사단이 출동할 수 없다는 거야?”
“원칙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니면 부서 간 사전 협의 하에 미리 공조 관계를 구축해 둬야 합니다. 물론 단장이나 부관의 재량에 따라 긴급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출동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흠.”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경이 하는 말은 결국, 마물 전담반과 미리 업무 협의를 해 두자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정식으로 협조 공문을 작성해서 7기사단으로 보내면 될까?”
그러자 줄리아 마이어의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 들어갔다.
“아, 그래도 협조 공문은 제발 좀…….”
순식간에 야근에 찌든 직장인의 얼굴로 변한 줄리아 마이어가 한숨을 쉬었다.
“좋습니다, 저하. 병력 동원을 위한 여러 행정 절차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만, 그만큼 지나치게 번거로운 과정이라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거기다 저하께서 지원을 요청하실 정도라면 분명 긴급을 요하는, 보통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겠죠. 그 정도라면 제 재량으로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디고리 저택의 마물 건이나 이단 재판부 게이트 사태 등, 최근 황자가 말려든 사건들이 사건들인지라.
일각에서는 황자가 움직이면 그것은 이미 보통 일이 아니다,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영문을 모르는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지만.
“이렇게 하도록 하죠, 저하. 제대로 사후 보고서만 올려 주시고, 이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 주신다면, 저하의 요청 즉시 저의 재량 내에서 긴급 출동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성진이 반색하자, 줄리아 마이어가 어딘가 해탈한 얼굴로 말한다.
“네. 그러면 일단 서류 작업이 반 이하로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은 신청과 승인의 과정이 지독히 까다롭고 지지부진한 거지, 막상 저지르고 나면 수습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도 황도 수비대 부관이 융통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고맙네, 줄리아 경! 우리 앞으로의 원활한 공조를 위해 부서 간 회식이라도 한번 할까? 내가 조만간 경비를 타서 7기사단에 공문을 보내지!”
아직은 신생 부서라 예산 문제에 비교적 자유롭거든. 성진이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그러자 줄리아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공문은 되었습니다.”
어째 서류 자체가 지긋지긋한 모양이었다.
춤곡이 끝남과 동시에 성진은 줄리아와 헤어졌다.
그녀와 이렇게 함께 대화한 것은 처음이지만, 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나저나…….’
성진은 조금 초조한 기분이 되어 무의식중에 또다시 상석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그곳을 재차 확인한 후.
‘어…….’
그제야 아까부터 무엇이 그리 신경 쓰였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성황 이 양반이 지나치게 늦는 거 같지 않나?
우르릉, 쾅!
문득 성진의 예민한 기감에, 먼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우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