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9)
성황의 아이들-169화(169/469)
§ 169. 경고 (2)
이사벨라가 깨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성진은 바쁜 일정을 모두 제쳐두고 아침부터 타운하우스로 달려갔다. 한동안 황도를 떠나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위험 요소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응접실에서 이사벨라를 마주한 성진은, 예상외의 사태에 조금 당황했다.
‘이건 의외인데?’
자아를 잃고 완전히 무너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사벨라는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겉모습뿐이기는 했지만.
[영혼이 대단히 흐릿하네. 절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야.]마왕 놈의 평가로는, 당장 죽어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해 보인단다.
하지만 비록 공허한 눈동자를 하고 있으되, 온전한 절망만을 내보이던 리카르도와는 달리 그녀에게서는 일말의 희망이 엿보였다.
‘설마, 아직은 재기의 기회가 남아 있다 생각하는 건가?’
반면에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문지르다 꾹꾹 잡아당기는 것은, 분명 살롱 드메르시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이사벨라의 긴장했을 때의 버릇이다.
성진은 찬찬히 그녀의 기척을 살폈다.
처음 만났던 그 이사벨라는 아니었지만, 얼마 전 저택에 몰래 침입했을 때 맞닥뜨린 시구르트 시구르슨과는 또 완전히 다른 느낌.
‘…아버지가 해냈어!’
성진은 그녀를 살려두는 것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정수리 찍기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황은 정말로 인형사를 그녀로부터 깔끔하게 도려낸 것이다.
“야, 시구르트 시구르슨.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네?”
툭 던져본 인사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오, 이것 봐라?
“그는 절 떠났습니다, 모레스 저하. 이제 저는 이사벨라…….”
[거짓말이네.]마왕의 말이 아니더라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를 본 순간 성진은 깨달았다.
‘스스로를 시구르트 시구르슨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거구나!’
구멍 난 자아를 어중간하게 유지하고 있다가, 지탱하는 인격이 사라지자 단번에 무너져 내린 리카르도와 달리, 이사벨라에게는 자신이 이사벨라라는 인식 자체가 아예 희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진이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뭘 어쩌려고?]마왕의 의아한 물음에, 성진은 씨익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잔뜩 깔며 그녀에게 윽박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웃기지 마.”
그 이후 성진이 한 일을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그녀가 스스로를 시구르트 시구르슨이라고 생각하도록 쐐기를 박는 것.
둘째, 그럼에도 섣불리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설득하고 단속하는 것.
[설득? 죽이겠다고 협박한 주제에?]‘닥쳐!’
물론 그 과정이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소통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어쨌든 약간 언질을 준 것만으로도 겁 많은 이사벨라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 서서히 희망의 빛이 꺼져가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생각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가 이사벨라 스카르차피노가 되고자 오랜 시간 노력한다면.
분명 그녀는 언젠가, 불완전한 스스로의 자아를 일부 회복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
그러다가 성진은 문득, 거기에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 *
북부로 떠나기 위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담 시녀는 일단 에디스만을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 역시 제법 강한 오러 유저니, 추운 지방에 가더라도 그리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단지 여행 도중 그녀가 내올 ‘쓸개맛 차’는 조금 걱정되었지만. 뭐, 브루노 단장이 알아서 잘 관리해 주겠지.
‘그나저나, 나 요즘 입맛이 은근 까다로워지지 않았나?’
스카르차피노 가에서 마신 차가 영 성에 차지 않는 걸 보면 말이지.
아마도 시종장 루이스와 브루노 단장 탓일 것이다. 차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상의 맛을 매일 경험하다 보니, 적어도 차 맛에 한해서는 소믈리에에 가까운 섬세한 미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이러다가 아무 데서나 차를 못 마시게 되는 거 아냐?
괜히 옆에 서 있는 브루노 단장을 쏘아봤더니, 그는 어리둥절하며 콧수염을 쓱쓱 쓰다듬었다.
마물 전담반 사람으로는 발레리 경과 샤론 경이 동행하기로 했다.
물론 두 사람 다 인퀴지터와 엑소시스트라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상주기사로 위장할 예정이었다.
“심심풀이로 금서라도 하나 챙겨갈까 합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아무도 절 인퀴지터라고 의심하지 않겠죠?”
그렇게 떠벌리는 발레리 경을, 성진은 조금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넬 의심하지 않는 대신, 당장 이단재판부에 고발하지 않을까?”
“하핫! 역시 그럴까요?”
한번 성진에게 금서 읽는 취미를 들킨 이후, 더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가 어이없었다. 지금 그게 신성제국 황자 앞에서 할 소리냐, 이 날라리 인퀴지터야!
전담반 사람들 중 지브릴 의원만은 황도에 남기로 했다. 부서 전체가 몽땅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음 주부터는 라이오라 역병회의 학회 주간입니다, 저하!”
성진에게 작은 책자를 들이밀며 지브릴 의원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탄신연 행사를 위해 대륙 곳곳에서 저명한 라이오라 학파의 스승들이 모여드니까요. 겸사겸사 1년간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희귀 케이스에 대한 토의를 하죠.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학회입니다!”
올해의 이슈는 ‘구근식물 유래 향수가 열병 예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최신지견’이란다.
“최근 아나톨리아에서 나온 논문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통적으로 구근식물은 땅에 근접하여 자라므로, 지열의 기운을 머금고 있어 열병 환자의 치료에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병에는 무조건 장미과 식물의 향수를 쓰죠. 효과가 1.5배는 좋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구근식물의 향수는 장미과 식물의 향수와…….”
“아, 나는 답을 알겠어. 두 향수의 효과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거지?”
성진의 말에 지브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제 막 발표된 최신 논문을 저하께서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야 둘 모두 효과가 제로일 테니까. 제로에는 뭘 곱해도 제로일 테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연구를 하면서 쓰레기 데이터를 양산하는 거냐, 이 돌팔이들아!
마사인과 브루노 단장은-샤론 경이 함께 간다는 것을 알고는 질색을 했지만-당연히 성진을 따라갈 거고.
그 외 상주기사로는 마리아 경과 클로디아 경, 그리고 칼멘이 동행하기로 결정되었다.
‘비공식적으로 다샤도 함께할 테고…….’
좋아! 조촐하지만 나름 알차게 일행을 꾸렸다!
명단을 다 정리한 성진은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 온 이후 황도를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풍 가는 것도 아닌데.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델크로스가 아니더라도, 흥미를 가지고 돌아볼 만한 곳이 많다는 말이다.
언젠가 성황이 그렇게 말했었지.
성진은 새삼스레 최근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형제자매들과의 교류는 점점 많아지고 있고, 조사차라고는 하지만 그 양반의 말대로 장기 여행도 계획 중이지. 이 정도면 그가 바라는 대로, 조금은 모레스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
어쩐지 묘한 감상이 들어 성진은 괜히 볼을 긁적거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 황도 생활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 * *
길드의 아세인 지부.
사원 숙소 옆 작은 연무장에서 한 소년이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 얼마 전부터 길드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아슬란이었다.
“휴우. 찌르기 200번 끝냈습니다, 폴라 씨.”
그새 키가 자란 소년이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길드에서 생활하면서 먹거리가 풍족해지자, 갑자기 쑥쑥 자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건장한 청년의 태가 난다.
“어, 수고했다. 여기 와서 조금 쉬어.”
파이프를 문 채로 우물거리는 폴라의 말에, 아슬란은 목검을 갈무리하며 그녀가 있는 그늘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이번 탄신연이 그냥 지나가 버렸네요. 꼭 황도에 가서 폐하를 보고 싶었는데.”
소년이 윗옷 자락으로 땀을 닦으며 말하자, 폴라가 파이프를 휘휘 저었다.
“아서라. 오러 입문에 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황도 타령이냐? 넌 내년 입단을 노리기도 빠듯해.”
“에휴…….”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지부장에 대한 원망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길드의 아세인 지부장, 저스틴 애스트로스는 비밀이 많은 자였다. 평소 뭘 하는지, 낮에는 도통 모습을 보기 힘들었으니까.
간혹 길드에 얼굴을 비추는 날에도 건성건성 자세를 좀 봐주고는 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기 일쑤. 아슬란의 검술 스승을 자처한 주제에 너무 성의 없는 태도가 아닌가.
아슬란은 곧 그에게서 뭔가를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길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솜씨가 좋고 가르침에도 인색하지 않았으니까.
지부장만 빼면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용병을 퇴역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폴라는, 후배들을 가르친 경험이 꽤나 풍부한 좋은 선생이지.
그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홀로 수련에 매진하던 중, 아슬란은 폴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지부장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거다.
-아슬란 그놈은 제법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충 검만 쥐여줘도 언젠가는 알아서 스콰이어 레벨이 되겠지? 그럼 그때 황궁에 보내지, 뭐.
마치 자신이 입단 시험을 통과시켜 줄 것처럼 꼬드겨놓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이래서 어느 세월에 황궁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슬란이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폴라가 딱하다는 듯 돌아보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부장은 못난 인간이지만, 그래도 눈썰미 하나는 인정할 만하지. 그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야. 넌 재능 있고 성실하잖니. 분명 금방 기사가 될 거다.”
“예에…….”
“걱정은 그만하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목검 갖다 놓고 와.”
아슬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혼자서 창고 쪽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반쯤 열린 창고 안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처음과는 얘기가 많이 다르잖아?”
‘…지부장?’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저스틴 지부장은 최근 수일간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길드에 계속 붙어있으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또 손님이 온 거 같은데? 그런데 왜 길드장실이 아니라 창고 안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영혼을 구속하는 결계라며? 이번에야말로 분명 제대로 작동할 거라 장담하지 않았어?”
드물게 격앙된 지부장의 목소리에 아슬란은 흠칫 놀랐다. 늘 나른한 듯 느물거리는 말투를 쓰는 지부장답지 않았다.
거기다가 뭐? 영혼을 구속해?
어딘지 심상치 않은 예감에 아슬란은 숨을 죽이며 가만히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처음 건넨 것은 분명 목줄이었을 텐데. 그런데 이건 대체 뭐요?”
이어서 들리는 것은 보기 드문 저음의 목소리였다.
“하나의 목줄을 절반으로 나눈 데다, 이후 열처리까지 다시 했구려. 덕분에 회로가 완전히 어긋나 맞물렸소. 이래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밖에.”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댁이 준 건 세공이 화려한 목걸이 같았잖아. 죄수로 위장하는데 가당키나 하냔 말이야!”
두 사람이 테이블 위에 뭔가를 올려둔 채로 언쟁 중이었다.
문틈 너머로 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사이에 두고 있는 물건만은 시야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저건……!’
아슬란은 그 낯익은 물건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완전히 동강 나 있었지만.
‘바트가 차고 있던 수갑이야!’
“녹인 쇠 속에 숨기고, 또다시 두터운 쇠를 덧대어 감추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녀석은 이게 규상세계의 물건임을 단숨에 알아봤을 테니까.”
“쓸데없는 짓을 했군. 처음부터 내 말대로 원형 그대로 사용했다면, 그대로 간단하게 수호자를 호문클루스 안에 가둘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고. 녀석이 알아채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란 말이야!”
“내 누누이 말했지만 규상세계의 회로는 뭔가를 덧댄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니요. 이번에 그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신이 쇠로 덮어서라기보다는 이미 회로가 망가진 뒤였기 때문일 거요.”
그리고 나직한 탄식이 이어진다.
“그가 언제 또 이렇게 멀리, 오랜 시간 인형의 몸에 들어와 있을 것 같소? 그대가 쓸데없이 신중했던 까닭에,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거요.”
“흠…….”
새파랗게 질린 아슬란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대화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저건 바트에게 그리 좋지 않은 이야기인 것만은 확실했다.
‘바트에게… 폐하에게 경고해 줘야 해!’
그때 삐걱.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창고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런데 잠시만. 아까부터 뭘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엿듣고 있니, 아슬란 꼬마야.”
“……!”
순간 창고로부터 흘러나온 오싹한 기세에 아슬란의 발이 얼어붙었다.
한없이 가벼운 인상이었지만 저스틴 지부장은 소드 마스터. 처음부터 소년이 창고로 다가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지… 지부장님. 대체 왜……?”
당신은 폐하의 오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오러에 바짝 눌려 딱딱하게 굳은 입을 겨우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을, 저스틴은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의 뒤로 한 남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대로 없애 버리겠소?”
아슬란은 그제야 손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저스틴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치 키가 큰 남자였다. 섬세한 자수가 수놓아진 고급스러운 로브를 걸치고, 얼굴에는 또 축제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반가면을 걸치고 있다.
“아냐. 이 애는 바트가 알고 있어. 때때로 정보원을 통해 안부를 묻는다고. 그냥 사라져 버리면 문제가 될 거야.”
그러더니 저스틴이 뒤를 돌아보며 손님에게 물었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당신, 이 애의 기억을 지울 수 있지?”
“그야 물론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반가면 너머로, 시린 벽안이 싸늘한 안광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