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
성황의 아이들-17화(17/469)
017. 마중물 (1)
성황을 따라 도착한 곳은, 후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휑한 곳이었다.
아니, 여기를 감히 정원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그저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잔디밭 중간에, 가뭄에 콩 나듯 듬성듬성 정원수가 서 있다. 그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로 빈약한 숫자다.
뭘까, 이 삭막하기 짝이 없는 후원은? 축구장인가?
성진의 어이없는 시선을 용케 알아챈 성황이 말했다.
“간혹 연무장 대신으로 쓰곤 한다.”
과연. 다음번에는 여기서 검술이라도 좀 봐달라고 해볼까.
그 잔디밭 한가운데에 식탁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두 사람이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뒤늦게 달려 나온 본궁의 사용인들이 테이블 위에 간단한 식사를 차린다. 점심을 거를 계획이었던 성진이지만, 막상 차려진 정갈한 음식들을 보니 괜히 허기가 졌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수련에 그다지 진전이 없더냐?”
열심히 고기 조각을 씹어 삼키던 성진이 움찔 놀라며 성황을 쳐다보았다.
귀신같은 양반이었다.
그는 별로 손도 대지 않은 접시 위로 나이프를 툭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솜씨 좋은 기사단장을 보낸 지 수일이 흘렀는데, 층을 쌓기는커녕 오러 핵조차 만들지 않았구나.”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성황의 말이 어째 묘하게 구체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사인 경이나 닌니아스 의원은 단순히 그의 오러 활성이 약하다고만 했는데, 어째 이 양반은 몸속의 축기 정도를 제법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거 혹시.
“오러 활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하는 것 말고도, 다른 사람이 축기한 오러의 경지를 정확히 아는 방법이 있습니까?”
“보통은 일부러 외기로 내보이지 않는 한 알기 어렵지, 하나…….”
“…….”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진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람을 제대로 찾아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마사인이 그런 재주를 부렸단 말이지.”
최근의 훈련 상황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더니 성황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애매한 반응이다.
“접근하는 방향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네, 진전이 있다기보다는 뭔가 실마리를 얻었달까요.”
“실마리라.”
“그렇습니다.”
성진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잠시 성황의 눈치를 보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 아버지. 사람들이 말하길 제 몸의 오러가 기이할 정도로 희박하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종의 이유로 몸속 오러가 이미 고갈되고 없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
“물론 혹시나 하는 말입니다만. 혹시 오러가 쌓이지 않는 체질 같은 것이 세상에 있습니까?”
말하면서도 내심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싶었다. 한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성황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잠시 후 슬쩍 가늘어진다. 곧이어 눈썹이 조금 찌푸려진다 싶더니 양손에 깍지를 껴 턱을 괴었다. 그러고서는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 표정 변화가 큰 거 처음 보네.
이 인간 뭔가 짚이는 게 있구나!
성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흠…….”
성황은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수석 시종장을 향해 손짓했다.
“루이스”
“예, 성황 폐하.”
“잠시 사람들을 물리지.”
루이스가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테이블이 정리되었다. 놀랍게도 단 5분도 지나지 않아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이 깡그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성황은 그러고도 한참을 후원의 전경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참다못한 성진이 입을 열려는 찰나, 성황이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춰 왔다.
“당장이라도 오러를 운용할 것 같던 녀석이 영 진척이 없어, 그저 게으름 병이 다시 도졌나 했더니.”
네? 기껏 고민하고 하실 말씀이 그겁니까?
“그런데 네 말을 듣고 보니,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확인해 봐야겠다.”
“에?”
다른 가능성이요?
“손을.”
성황이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성진은 순간적으로 그가 마사인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을 쓰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자 성황이 성진의 손목을 가볍게 감아쥐었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 오러의 행방을 확실하게 알기 위한 시험이다. 마사인이 한 것과는 달리 갑자기 많은 양의 오러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마라.”
성진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맞닿은 손목에서 무언가 시원한 감각이 팔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어?’
그것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사인의 오러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감각이, 따끔거리는 자극 따위 없이 청량하게 팔 전체에 퍼져 나간다.
마사인이 설명하고 성진이 상상했던, 자기 자신의 오러가 흐르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인가. 편안하다 못해 어쩐지 최근 검술 수업으로 뭉친 팔 근육까지 완전히 풀리는 느낌이다.
성진이 신기한 기분에 입을 헤 벌리고 감탄하고 있는데, 곧 손목에서 느껴지는 오러의 감각이 끊어졌다.
“지금 중단했다. 잔존한 오러의 흐름을 살펴라.”
그 말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러의 흐름을 관찰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노력한 보람도 없이 오러의 감각은 점점 옅어지더니 어깨를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 지금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진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말했다. 제법 많은 양의 오러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런데 성황의 표정이 제법 심각해졌다.
“너의 짐작이 맞구나. 오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딘가로 새어 나가고 있어.”
“새어 나간다고요?”
성황은 성진의 가슴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서 오러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듯이.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이 양반, 설마 오러가 눈에 보이나?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 성황이 재차 오러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강렬해진 물의 흐름이 팔을 타고 올라간다. 대단히 많은 양인데 신기하게도 전혀 신체에 무리가 없었다. 그 시원한 물줄기가 팔꿈치를 거쳐 어깨를 지나 옅어지며 가슴에서… 어라?
성황이 점점 많은 양의 오러를 밀어 넣어 보았지만, 그것들은 가슴께를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성진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슴보다는 뒤쪽, 등 쪽에 가까운…….
“흉터 쪽이군.”
흉터?
영문 모를 소리를 끝으로 성황은 성진의 팔을 놓고는 턱을 문지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오러를 운용했는데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 자꾸 마사인에게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확실히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경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황은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듯 설명을 시작했다.
“네 몸에는 확실히 뭔가 통로 같은 것이 있어, 그곳으로 오러가 모조리 빠져나가 버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아무리 축기를 하려 해도 오러가 몸에 모이지 않는 것이겠지. 그 통로가 언제부터 있었고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
갑자기 판타지가 되었다. 여기가 이세계이기는 하지만.
통로라고요? 몸 안에 통로?
황당해하는 성진을 향해 성황이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물리적인 통로가 아닌, 오러 같은 기운이나 영혼 등이 흘러가는 영적인 통로라는 것.
통로는 분명 양방향으로 열려 있을 터인데, 모레스의 몸에서만 일방적으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보통 사람의 몸에 정상적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으니, 짐작건대 모레스가 죽다 살아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는 것.
대단히 황당한 일이었지만, 성진은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설마 내 영혼이 여기 들어 온 것은, 모레스에게 그 통로가 있기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통로가 연결된 곳이 어디인지도 자연히 추측해 볼 수 있다.
마왕이 저급 차원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시구르트 34지구, 혹은 게헤나.
바로 성진의 본래 세계인 것이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성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성황은 설명을 계속했다.
첫째로, 몸속의 통로가 닫히기를 기다린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므로 몸이 회복되면서 자연히 닫힐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물론 희박한 확률이었다.
게다가 닫힌다 하더라도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고, 어쩌면 평생을 오러 없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통로가 더 새지 않도록 물을 가득 채운다.
통로가 텅 비어서 오러가 새어나가는 거라면, 그곳을 아예 오러로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다. 구멍이 난 독이라도 그 바깥에 물이 가득하다면 수압 때문에 더 이상 물이 새어나가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게… 가능합니까?”
성진에게는 마치 망망대해에 물을 쏟아붓겠다는 말로 들렸다.
“다행히 통로가 그리 크지는 않아, 아슬아슬하게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구나. 비슷한 일을 예전에 해본 적이 있다.”
“이런 경우가 또 있다고요?”
“있다. 물론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나는 지금껏 두 명을 보았다.”
두 명씩이나? 흔하지도 않지만, 아주 드물다고도 못하겠는데?
성진이 입을 쩍 벌리고 있자니 성황이 말을 이었다.
“네게 이러한 선택지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어느 정도 수반되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통로를 그대로 둘 경우 통로가 닫히지 않고 오히려 넓어질 가능성.
통로를 가진 자가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영적인 압박을 받을 경우, 갑자기 통로가 폭주하는 수가 있다고 한다. 성황이 본 두 명 중 하나가 그런 케이스였다고.
폭주하는 통로는 더 이상 영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물리적 실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개미지옥이 된다고 한다. 그 넓어진 통로로 인근 마을 하나가 통째로 빨려 들어간 적이 있단다.
뭐야, 손바닥에 난 바람구멍도 아니고, 그거 블랙홀이야?
“그럼 큰일 아니에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통로의 입구를 없애야지. 그때는 내가 손수 닫았다.”
그렇게 대답하는 성황의 눈빛이 서늘하다.
어떻게 닫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성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닙니까? 걸어 다니는 재앙이 될 가능성을 두느니, 두 번째 방법을 택해야죠!”
통로를 채워서 막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
한데 성황은 전경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느닷없이 성진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마중물이라는 것을 아느냐?”
“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그는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서쪽의 산악지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댈 때 쓰는 방법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아래에서 위로 가느다란 수로가 연결된 작은 물레방아 같은 것을 곳곳에 설치하지. 그걸 도르래에 걸어 빠르게 돌리며 물을 위로 퍼 올리는 것이다.”
갑자기 농사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성진은 잠자코 경청했다.
성황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나 간혹 경사가 지나치게 높은 경우에는 아무리 도르래를 빠르게 회전시켜도 물이 역류하지 않는다. 그럴 때에 그들이 어찌하는지 아느냐? 수로에 미리 물을 붓는다.”
“…….”
“물을 끌어오기 위해서 텅 빈 수로에 먼저 물을 채우는 것이지. 그것이 마중물이다.”
서서히 성황이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마중물이라는 것이 통로를 오러로 채우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 말씀하신 위험이라 함은…….”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성진을 바라보는 성황의 눈이 깊어진다. 묘하게 온기가 없는 회색 눈동자가 마치 잘 갈린 검 날 같았다.
“도르래가 돌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수로에 맺힌 물을 당기려 한다면.”
“…….”
“통로 맞은편에 무엇이 있건, 그것들 역시 손쉽게 이쪽으로 끌려오겠지.”
여태까지 침묵하며 웅크려 있던 마왕의 영혼이 문득 부르르 떨려왔다.
성진의 세계는 마계 게헤나와 함께 멸망했다.
어쩌면 소수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이 결코 종을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의 숫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인류의 터가 될 만한 기간 시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물들의 시체로 오염된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운 좋게 인류가 멸망을 피하더라도, 마왕이 죽은 후 무너져 가는 게헤나에 휩쓸려 언젠가 지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겠지.
거기에 대체 무엇이 남아,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단 말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성진은 곧 마음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