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1)
성황의 아이들-171화(171/469)
§ 171. 물류 중계소 (2)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나 충동이 의념이 되기는 힘든 일이다. 또한 그렇게 일어난 의념이 행동이나 현상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과가 요구되지.
하면, 어찌하느냐?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 의념을 끌어내는 그 원동력을 다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 * *
성진 일행은 첫날부터 야영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탄신연 기간이 겹치며 델크로스를 오가는 마차가 너무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 넓은 포장길에서도 제대로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던 것.
거기다 앞서가던 상단 마차 하나가 고장 나는 사고가 겹치며, 길이 한동안 정체되기까지 했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레지나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을 텐데 말입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오르덴의 부하, 헤르만이 성진에게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현재 일행의 여행 일정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아냐, 이런 사고를 어떻게 일일이 대비하겠어? 괜찮아.”
성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일단은 푹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즈음의 성진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으니까.
본래는 정체되든 말든 명상이나 하면서 편히 가자고 마음먹었었지만,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은총이 사라지자마자 홀가분해진 마왕 놈이, 하루 종일 신나게 난리를 쳤던 것이다.
[아하핫! 우하핫! 이것 봐, 이성진! 너한테서 떨어져서 저만큼이나 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성진의 머릿속을 수시로 뿅뿅 들락거리며 정신 사납게 굴던 놈은.
[우와! 이것 좀 봐, 이성진! 내가 들쥐를 조종할 수 있어!]곧 쥐새끼 한 마리에 빙의하여 찍찍 찍찍 시끄럽게 울어대며 마차를 쫓아오는가 하면.
[하하하! 어떠냐, 이성진! 이 몸이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으하하하!]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를 끌고 와 주변을 뱅뱅 돌다가, 마차 지붕에 내려앉아 주책없이 까악거렸다.
“어디서 자꾸 까마귀가 울어대는지…. 까마귀는 악마종의 하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길합니다.”
은근히 악마종에 민감한 마사인이 불안한 얼굴로 연신 창밖을 기웃거리는 통에, 성진의 마음도 덩달아 불편해졌다.
거기다 성진의 고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브루노 단장은.
“빨강이 님, 시끄러우니 제발 이제 그만 좀…….”
[뭐어? 누가 빨강이냐, 이 얼뜨기야! 어? 이렇게 눈으로 보고도 이 마왕님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겠느냐!]까악까악! 까으앍! 아르르르앍!
불타오르는 마왕 놈에게 간간이 기름을 부어가며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곤 했다.
덕분에 해가 저물어 헤르만으로부터 야영 소식을 들었을 때, 성진은 이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황자의 얼굴을 보고 헤르만이 더욱 죄스러워한 것은 덤이었다.
[음하하핫! 이성진! 이것 봐! 내가 지금 말이랑 같이 풀을 먹고 있어! 이상하네? 그냥 풀인데 뭔가 맛있어!]성진은 잠시 인상을 썼지만, 별다른 잔소리 없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일단은 봐준다…….’
오죽했으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악마 중의 악마라는 마왕 놈이, 신성한 은총이 공기처럼 가득 차 있는 델크로스에서 결계 하나를 방패로 수개월을 버틴 거다.
그뿐인가, 수시로 성황 앞에 바짝 쫄아서 쭈그리고 있어야 하지 않았나.
[이성진! 어서 이것 좀 봐! 내가 이놈으로 묘기도 부릴 수 있어!]히히히힝!
갑자기 펄쩍펄쩍 요동치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마부가 진땀을 뺐다.
“워! 워!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워워!”
생각이 바뀌었다. 내일도 저 꼴이면 당장 제일 가까운 교회로 달려가 퇴마시켜 버려야겠다!
그러는 중에도 야영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헤르만의 안내를 받으며 모닥불 앞으로 다가가니, 울프 기사단 소속의 요리사가 에디스와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지나는 여기서 몇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일정이 늦어지겠지만, 내일은 일찌감치 레지나에 도착해도 거기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 겁니다.”
성진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오르덴이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레지나?”
“예, 거기에 커다란 물류 중계소가 있습니다.”
레지나는 델크로스 북부 관문을 나와 하루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본래는 작은 교외 마을이었지만, 상인연합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난 십여 년간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나. 대륙 북부와 동부로 이어지는 상단의 물류가 모두 그곳을 거치기 때문이다.
“일단 레지나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후 일정은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옆에서 헤르만이 덧붙인다. 이 많은 상단들이 물류 중계소를 거친 후 대륙 각지로 흩어진다고 하니, 이후로는 지그스문트령으로 가는 길도 정체가 없어질 거라나.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상단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레지나에서 하루를 지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어딘가를 유심히 응시하며 말하는 오르덴의 시선을 따라, 성진도 길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는 성진 일행처럼 발이 묶여 야영을 준비하는 상단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들 바로 맞은편에 모닥불을 피운 무리는 성진이 익히 잘 아는 상단의 문장을 걸고 있다. 분명 다샤가 조사해 온 자료에 있었지.
염소수염을 한 험악한 인상의 상단주 역시 낯이 익다.
“밀로 상단인가?”
“그렇습니다.”
성진은 혀를 찼다.
이런 단순무식한 놈. 어쩐지 지나치게 일정을 서두른다 했더니, 밀로 상단의 상행에 맞춰 졸졸 따라가면서 감시할 생각이었구나!
그러는 동안 에디스가 성진에게 따뜻한 스튜를 가져다주었다. 가장 먼저 스푼을 집어 들자, 여기저기서 힐끔힐끔 성진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오르덴을 따라온 울프 기사단 단원들이다.
야영을 하는 입장에서 진수성찬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지만, 아무래도 황자에게 대접하는 식사치고는 부실한 것이 사실.
과연 개망나니로 유명한 황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뭘 기대하는지 몰라도, 이쪽은 수십 년간 보존식만 먹고 살았던 사람이라고.’
성진은 속으로 여유롭게 웃으며 생각했다.
물론 한입 맛보는 순간 그 여유는 사라졌지만.
그런 황자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울프 기사단 단원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키득거린다.
“…….”
성진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스튜를 삼켰다. 그리고 바로 에디스에게 물었다.
“에디스, 혹시 네가 요리했어?”
“아뇨, 저하. 전 그냥 야채를 다듬고 간을 좀 봤을 뿐이에요.”
아, 어쩐지. 맛은 좀 없어도 삼킬 정도는 된다 싶었어.
성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푸악! 푸억! 컥!
여기저기서 스튜를 내뿜는 장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도… 독인가?”
“독살 시도인 것 같습니다, 대공자님! 어서 그릇을 내려놓으십시오!”
“암살자다! 암살자가 숨어들었다!”
…아니, 그건 아닐 텐데.
어쩐지 일이 커질 것 같아 성진이 말려보려 했지만, 어느새 새파랗게 질린 마사인이 그의 그릇을 빼앗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필사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사제! 사제! 저하께서 독을 드셨다! 어서 치료를!”
“아니, 마사인 경. 그게 아니라…….”
“크윽! 요리 과정을 처음부터 꼼꼼하게 감시했음에도 이런 일이! 역시 제가 먼저 기미를 봤어야 했습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까마귀가 불길하게 운다 했더니……!”
성진은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그 와중에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디스가, 무심코 스튜를 한입 입에 넣더니 와락 얼굴을 찌푸린다.
“웩! 쓸개즙 맛이 나요!”
그게 지금 네가 할 소리냐!
[와하핫! 이성진! 여길 한번 봐봐. 나 이제 사람한테도 잠시 빙의할 수 있다? 내가 얘한테 떠먹게 시켰어! 근데 이 스튜는 왜 말이 먹던 풀떼기보다도 맛이 이상하지?]넌 또 왜 쓸데없이 그걸 맛보고 있는 거야?
결국 갑작스러운 독 소동은 사제가 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저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마사인 경. 독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통통한 남자가 신성력을 거두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울프 기사단의 전속 치료사인 구스타프 사제였다.
“그 말이 사실이겠지? 정녕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이겠지?”
“예, 예. 아무렴요. 안심하십시오. 그저 스튜가 조금… 아니, 매우… 맛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는 대단히 사교성이 좋은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진상 보호자처럼 길길이 날뛰는 마사인 경을 상대로도 저런 푸근한 미소를 짓는 걸까.
어쨌든 상황이 정리되고, 쓸개즙 맛이 나는 스튜는 요리사의 피나는 노력으로 그럭저럭 먹을 만한 것으로 재탄생되었다. 몽땅 폐기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으로 성진이 지시한 것이었다.
물론 재조리 과정에서 에디스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 것도 잊지 않았지.
그렇게 맛없는 스튜를 황자가 먼저 호로록 해치우자, 다른 사람들도 마지못해 억지로 스튜를 삼켰다. 어느새 성진을 바라보는 울프 기사단의 시선에는 약간의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모레스 황자님, 대단하신데? 저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드시다니!’
‘거기다 저런 시녀를 용케도 살려 두시는구나!’
‘생각보다 관대하신 분이었어!’
그런 걸로 존경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그렇게 성진 일행이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칠 때 즈음,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주위 상단에서는 벌써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로 호위를 위해 고용한 용병들이 주축이었는데, 불침번만을 남기고 거나하게 취해있는 꼴들이 볼썽사나웠다. 저래서 호위가 되기는 하는 건가?
“아직은 안전한 경로에 있고 동행하는 상단도 많지요. 이 정도는 상단주들도 다들 눈감아 줍니다.”
성진의 어이없는 시선을 눈치챈 구스타프 사제가 귀띔을 해주었다.
“이런 느긋한 여정도 레지나를 뜨면 곧 끝나니까요.”
하지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술이 돌기 시작하면, 분명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불거지게 마련.
아니나 다를까, 곧 여기저기서 거친 욕설이나 고성방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간혹 마구잡이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곳도 있었다.
북부 관문을 지날 때만 해도 전혀 볼 수 없었던 낯선 광경이다. 마치 덮고 있던 베일을 한 꺼풀 벗어던지고 맨 얼굴을 드러낸 듯 날 선 모습들.
“황도를 벗어나면 사람이고 동물이고 죄다 거칠어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성진만이 이상을 느낀 것이 아닌지, 마사인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자 브루노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그 반대일 겁니다, 마사인 경. 거친 성정의 인간들이 황도로 들어오면 얌전해지는 것뿐이지요.”
“얌전해진다고요?”
“네. 예전에 아는 용병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주당에 술버릇까지 고약해서 허구한 날 사고를 치는 골칫덩어리 부하 놈이, 이상하게 황도에 들어오기만 하면 거짓말처럼 행패 부리는 횟수가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것이 은총의 영향이 아닐까 했습니다.”
“은총이요?”
“네. 성정이 급한 자들이 눈에 띄게 차분해진답니다. 대륙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데도 황도의 치안이 좋은 것은, 아마도 그런 은총의 영향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참 신기하군요.”
그러는 중에, 성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여자가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밀로 상단에 고용된 여급이었는데, 쟁반 가득 술잔을 들고 용병들이 모인 곳을 바쁘게 오가는 중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바르샤 지방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성진에게는 무척 익숙한, 날렵한 체구와 조용한 걸음걸이.
‘…다샤?’
성진은 눈을 깜박였다.
왜 다샤가 저기에? 분명 오러 은폐를 사용해서 몰래 성진의 뒤를 쫓고 있으리라고 예상했는데?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성진을 돌아본 다샤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이내 상단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브루노 단장의 얼굴이 미묘해진다. 그 역시 진주궁에서 느꼈던 익숙한 기척임을 알아보는 거겠지.
성진은 다샤의 속셈을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
와, 이 유능한 인간!
몰래 숨어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단에 고용되서 편안하고 떳떳하게 자신들을 따라오겠다는 건가?
그러면 의식주가 해결되고, 괜히 정체를 숨기느라 오러 은폐를 남발할 필요도 없는 거다.
그러면서 동시에 밀로 상단의 잠입 조사를 병행하고 있는 거지! 다샤는 정녕 천재인가?
[아까 대공자 보고는 단순무식하다고 욕하지 않았어?]일탈을 끝내고 어느새 성진의 머릿속으로 돌아온 마왕 놈이 떨떠름하게 묻는다.
뭐, 오르덴은 오르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