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4)
성황의 아이들-174화(174/469)
§ 174. 물류 중계소 (5)
의외로 좌절한 로랑을 두둔한 것은 클로디아 경이었다.
“기운 내세요, 로랑. 왜 그게 방탕하다는 거죠? 사랑이 주제라면 전 방향을 잘 잡았다고 보는데?”
로랑이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로랑이 추구하는 이미지야말로, 남녀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궁극의 형태가 아닐까요?”
그러자 모닥불을 둘러싼 일행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깐의 불타는 사랑이? 그리고 헤어진 후 평생 서로를 추억하는 게?”
“그렇기에 그나마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거죠. 연애란 게 본래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로 간에 치졸하고 지저분한 모습만 확인하게 될 뿐인걸요? 그게 노래가 되어본들 누가 그걸 듣고 싶어 하겠어요?”
…그런가?
의외로 설득력 있다는 생각에,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 발레리 경.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에서도 손꼽히는 바람둥이께서 한 말씀 해주시죠?”
그러자 날라리 인퀴지터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바람둥이라니,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전 언제나 제 연인에게 충실했습니다만.”
“하지만 그 연인이 금방금방 바뀌잖아요?”
“성격차이였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발레리 경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흠.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설레는 건 잠깐입니다. 간혹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른 채로 점점 소원해지다, 서로에게 잔뜩 실망하며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그리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군요.”
고개를 끄덕인 클로디아 경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리아 경. 한때 1기사단의 장기 커플로 유명하셨잖아요? 끝이 어떠셨나요?”
갑자기 호명당한 마리아 경이 잠시 당황하다 대답했다.
“어? 으응.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 막상 헤어진 계기는 별것 아니었어. 내가 먼저 상급기사가 되자마자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군.”
그러다가 순간, 그때의 기분이 떠오르는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린다.
“…그 못난 자식!”
“자, 아시겠어요, 로랑?”
눈이 휘둥그레진 청년을 향해 클로디아 경이 단언하듯 말했다.
“현실의 사랑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러니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뭔가를 만든다면, 길은 딱 두 가지뿐입니다. 바로 환상, 아니면 막장!”
“…환상… 막장?”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로랑을 향해, 클로디아 경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비수를 날렸다.
“로랑. 솔직히 제대로 연애해 본 적 없죠?”
“……!”
“봐요. 이런 분이 노래를 만들어야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되죠. 사랑에 대한 환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로랑은 이제 충격으로 거의 혼이 빠질 듯 보였다.
클로디아 경, 그만! 저 친구 울 것 같다고!
* * *
아침부터 길을 떠난 성진 일행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도 전에 레지나에 도착했다.
“…크다!”
간단한 절차 후 관문을 통과한 성진은,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광경에 솔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쟁적으로 지어진 높은 건물들과, 화려하게 도색된 다양한 크기의 간판들.
물류 중계소를 중심으로 뻗은 거대한 방사형의 도로와,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짐마차들이 보인다.
잘 정돈된 황도와는 또 다른, 번화한 대도시의 느낌이었다.
“레지나에 큰 물류 중계소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길을 닦기 수월한 평지이고, 무엇보다 북쪽으로 큰 강을 끼고 있으니까요.”
마사인 경의 설명을 들으며 성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브리즈강 말이지?”
“네, 저하. 동부 오르토나와 키프로스로 향하는 물자들은, 대개가 물류 중계소를 거쳐 브리즈 강을 따라 이동합니다. 유속이 빠른 편이라 운임료가 크게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다음에 그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
무심코 그렇게 말하던 성진은, 순간 드는 위화감에 말끝을 흐렸다.
다음에?
“…저하?”
“어, 아무것도 아냐.”
의아한 듯 부르는 마사인에게 대꾸하며, 성진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다음 여행을 생각하다니, 거 참. 요즘 모레스로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 진 것 같다. 가끔은 빙의했다는 사실도 종종 까먹을 때가 있다니까.
‘내가 모레스의 몸에 언제까지 있을 줄 알고…….’
[음, 이성진?]‘응?’
[…아냐. 아무것도.]이놈은 또 싱겁게 왜 이러는 거야?
그러는 동안 마차는 천천히 숙소를 향해 달렸다.
소규모라고는 하나 무려 제국의 황자를 모신 여정이다. 헤르만의 안배로, 기사 하나가 하루 먼저 레지나로 달려 고급스러운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고.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 음유시인 로랑이 성진의 마차로 다가와 부복하며 말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하. 저하께서 어제 제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이제 가는 건가?”
“예. 덕분에 목적지였던 레지나에 무사히 도착했으니까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성진은 대답 없이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시설 좋기로 이름난 숙소라더니, 성진 일행 외에도 어제 동행했던 대형 상단 두엇이 입구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로랑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적지 않은 수의 용병들까지도.
이놈, 이대로 괜찮을까?
그 와중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로랑은 밝은 얼굴로 떠벌리고 있었다.
“앞으로 고민해야 할 큰 화두도 생겼습니다. 제가 목표로 한 이상적인 그림이, 실은 완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럼 더는 사랑 노래를 만들지 않는 건가?”
“그걸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민하려 합니다. 제 이상을 더 완벽하게 다듬어야 할지, 아니면 아예 레퍼토리를 바꾸어야 할지 말이죠. 어쩌면 다른 기사님들 말씀대로, 이 도시에서 지내다 보면 제 영감이 완벽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은 방탕한 사랑이 넘치는 곳이니까요.”
그러곤 로랑은 눈두덩에 보라색 멍을 단 채로 헤죽 웃었다.
“혹시 압니까? 언젠가 제가 저하를 주인공으로 끝내주는 연가를 만들게 될지요.”
“…….”
성진은 로랑을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일까. 이놈이 앞으로 그런 걸 만들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괜찮겠나? 어제 자네를 해치려 했던 용병들은, 대부분 상단과 함께 레지나에서 하루를 머물 것 같은데.”
그러자 로랑의 얼굴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집단 린치를 당한 경험은 그에게도 강한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분명했다.
잠시 그 표정을 살핀 성진이 덧붙였다.
“이참에 아예 북쪽으로 가보는 것은 어때? 우리는 지금 지그스문트령으로 가는 중이다. 원한다면 제법 안전하게 데려다줄 수 있는데.”
“지그스문트령이요?”
분에 넘치는 호의임에 분명했으나, 로랑은 솔직히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그곳은 사시사철 눈에 뒤덮인 곳. 피어나려던 사랑도 그대로 얼어붙을 혹한의 땅이다.
“그래. 지그스문트령은 고립되어 있으니, 사람들도 음유시인이 오는 것을 크게 반길 거야.”
“하지만 그곳에서 사랑의 영감이 떠오를까요?”
“글쎄. 사랑은 잘 모르겠지만, 울프 기사단이 마경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무훈시 같은 건 떠오를지 모르지. 혹시 아나? 자네가 나중에 [올란도의 무훈시]같은 유명한 작품으로 이름을 떨칠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로랑이 당황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무훈시요?”
“그래. 아니면 클로디아 경에게 그 ‘막장’에 대해 조금 더 배워 보던지. 사랑에 막장이 첨가되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로랑을 설득하기 위해 늘어놓는 말이었지만, 성진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지금의 구닥다리 사랑 이야기보다는 낫지 않을까?
“무훈시에 막장이라…. 흠…….”
고민하던 로랑은 고개를 돌려, 멀리서 샤론 경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클로디아 경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의식하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입매는 둥글게 휘어 있었다.
“예. 그거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장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만, 방금 주근깨 아가씨에 대한 꽤 괜찮은 영감이 떠올랐거든요.”
휘익.
순간 미세하게, 성진의 팔을 감고 흐르는 인력이 느껴졌다.
찰나의 일이었지만 성진은 그 낯익은 감각을 기억해 냈다.
바로 [인과]가 움직인 감각이었다.
* * *
“이대로 오늘 하루는 아무 일정 없이 레지나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숙소에 대충 짐을 풀자, 헤르만이 성진 일행에게 말했다.
다음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서둘러봤자 어차피 다시 어중간한 위치에서 야영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진짜 목적은 밀로 상단의 추적이겠지.
상단들은 보통 레지나에서 하루를 머물며, 물류 중계소에서 주문량 확인이며 세관이며 여러 복잡한 문제를 한번에 처리한다고 한다.
“저희는 일단 물류 중계소에 들를 예정입니다. 그대로 밀로 상단주, 자코모를 감시하려 합니다만.”
오르덴이 진중한 얼굴로 덧붙이자, 성진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단순무식한 놈. 상인도 아닌 기사들이 대놓고 물류 중계소까지 졸졸 따라다니면, 저쪽에서 잘도 이쪽을 경계 안 하겠다. 어?
그렇게 한 소리 하려던 성진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잠깐. 쟤들이 대놓고 이목을 끌어주면, 나나 다샤가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알겠어. 그럼 결과에 대한 자세한 보고는 내일 듣지.”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올 테지만.
그렇게 오르덴 일행을 보내고, 성진은 그대로 방에 틀어박혔다. 일단 다샤와 접선을 시도하려면 밤이 오길 기다려야겠지?
물론 남는 시간 동안은 숙소에서 조용히 명상이나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행 모두가 기겁하며 그를 뜯어말렸다.
“진심이십니까, 저하? 레지나는 볼거리가 많은 도시입니다!”
“설마, 이런 유명한 도시까지 와서 방구석 수련이라니요?”
“저하! 레지나에 엄청 유명한 맛집이 있습니다! 거기는 정말 꼭 가보셔야 한다니까요?”
음. 확실히 호위 대상인 자신이 숙소에 박혀 있으면, 기사들도 덩달아 이곳에 매여 있게 되는 거겠지,
무엇보다도 성진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맛본 마왕 놈이 잔뜩 들떠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댔다.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맛있는 거! 그 맛집이라는 곳에 정말 정말 가고 싶어!]‘…….’
좋아. 딱 오늘까지만 더 참는다.
내일도 이 지경이면 진짜 퇴마시켜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해서 성진은 일행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정신 사납다는 채널링 능력자 두 사람을 빼고 말이다.
숙소가 번화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행은 구경도 할 겸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비슷한 번화가라고는 하지만, 황도의 베르트랑 거리나 데스테 거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으니까.
여러 음식점을 비롯해서 각양각색의 특이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마치 외국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특히나 황도를 처음 벗어나는 칼멘 놈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신 고개를 돌려대기 바빴다. 데리고 다니기 부끄러울 정도라고.
‘그러고 보니 아버지한테 기념품 사 간다고 했지…….’
작은 골동품 가게 하나를 눈여겨보며 성진은 생각했다. 시간도 많은데, 이참에 누님이랑 로건, 그리고 애들 것도 하나씩 사 갈까.
[여기서 황도까지 고작 하루 거리인 건 알고 있냐? 이런 데서 무슨 기념품을 산다는 거야?]‘그럼 다른 데서 또 사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야?’
기념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마왕 놈과 시답잖은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사인 경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하. 저것이 바로 물류 중계소 건물입니다.”
“……!”
물류 중계소.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 구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거대한 장방형의 건축물이었다.
층수가 꽤 높았지만, 그것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건물.
1층은 벽 대신 높은 기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그 사이로 수없이 많은 마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모든 길들이 곧장 건물 내부로 통해 있는, 지극히 실용성을 기반으로 한 구조. 그리고 거기서부터 뻗어 나온 넓은 방사형의 도로가 도시 전체로 이어져 있다.
과연 북부와 동부로 향하는 모든 물류가 모이는, 유통의 중심이라고 평할 만한 모습이었다.
[이성진.]상상 이상의 규모에 멍하니 압도되어 있는데, 갑자기 마왕 놈이 긴장된 목소리로 성진에게 소곤거렸다.
[조심해. 희미하긴 하지만, 저 안에서 마기가 느껴지는데?]‘…뭐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인퀴지터인 발레리 경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도시 경관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왕 놈은 설명했다.
악마숭배자건 악마계약자건, 악마를 이 자리에 직접 소환하지 않는 한 인간 자체가 마기를 풍기기는 어렵다고.
그런 마기가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틀림없어, 이성진. 저 건물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