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8)
성황의 아이들-178화(178/469)
§ 178. 계약의 명부 (4)
동부 방면의 물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콜린스 이사는,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에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마사인 경이? 갑자기 왜 나를?”
물론 표면적인 친분은 있었다. 현재는 계승권이 없다고 하나, 마사인은 어엿한 성황가의 일원.
따라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날 때마다 콜린스는 매번 그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간 나면 레지나에 방문해 달라는 의례적인 인사 또한 서슴지 않았지.
하지만 보통은 그냥 인사치레라고 생각하지 않나?
어쨌든 그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간단하게 차라도 대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훤칠한 기사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성황가 특유의 밝은 금발이 무색하리만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콜린스 이사. 이번 탄신연에는 첫 연회 참석 후 바로 돌아갔다 들었습니다. 따로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그거야 그만큼 일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마사인 경.”
바쁜 사람을 왜 찾느냐는 직접적인 타박이었다.
그러나 콜린스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기사는 사교적인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고귀한 출신을 생각하면 참으로 소탈한 태도다.
“그럼 앞으로는 더욱 바빠지겠군요. 조만간 나와는 더 자주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무슨……?”
“모레스 황자님께서 최근 참연어 사업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동부 오르토나산 참연어는 현재 키프로스 연합을 통해 공수되죠. 키프로스를 포함한 동부 물류 유통 일체가 콜린스 이사의 담당인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사업? 자신을 찾아온 용건이 그건가?
콜린스는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건 황궁에서 정식으로 추진하는 내용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저하의 개인적인 구상이죠.”
“하면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가져오셨습니까?”
“아직은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콜린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찻잔을 들이켜는 마사인을 쏘아보았다.
아무리 황위계승 후보였다고 하나, 클라노스로 전락한 지금에는 다 의미 없는 일. 예의상 성황가의 일원으로 대접해 주는 것 자체가 이미 그에게는 분에 넘치는 대우일 터다.
더욱이 최근에는 근위대 기사단장직까지도 던져버렸다고 하지. 그렇다면 이제 예의를 차려봤자 실익을 얻을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가 된 것 아닌가.
그에 비하면 콜린스 자신은 이미 동부의 경제 실권을 쥐고 있다. 한 국가의 존폐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륙의 가장 강력한 이익집단에 속해 있는 실질적인 권력자.
저런 허울만 멀쩡한 젊은이의 비위를 애써 맞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충 쫓아 버릴까.’
콜린스는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있던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여기 있습니까, 라움 님?’
[듣고 있다, 계약자여. 킬킬.]머릿속에서 쇠를 긁는 듯 갈라지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콜린스는 악마 계약자였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대면한 수많은 적들을, 그는 악마의 도움을 받으며 손쉽게 해치워 왔다.
[이자는 옅게나마 태초의 피를 이었구나. 건드리기에 까다롭겠다.]‘그래서 불가능합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지. 킬킬.]콜린스의 악마, 라움은 정신계 조작에 특히 능한 악마였다. 사람에게 환각을 보이거나 신경 쇠약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순간적으로 상대의 정신에 큰 충격을 주어 의식을 잃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많은 이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콜린스는 마사인에게도 그런 수를 쓸 셈이었다.
충격을 준 후 조용히 돌아가도록 세뇌를 가하면 완벽하겠지. 약간의 후유증은 남겠지만 일상에 장애가 될 정도는 아닐 거다. 그저 손가락을 튀기기만 하면 악마의 힘은 발휘될 터였다.
달칵, 기사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콜린스가 막 손에 힘을 주려는 그때.
똑똑.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마사인 경. 용무가 끝나셨다면 부디 저와 함께 지부장실을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사무실을 찾은 것은 슈미트 지부장의 비서였다. 콜린스는 재빨리 악마를 물리며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그 콧대 높은 지부장이? 이런 자를 왜 갑자기?’
그러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모레스 황자님께서 경을 급히 찾으십니다.”
“저하께서요?”
“예, 마사인 경. 덕분에 필요한 일을 잘 끝냈으니, 지부장실에 들렀다 함께 돌아가자 전하라 하셨습니다.”
콜린스가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마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저하의 사업 이야기는 지부장 선에서 진행될 모양이군요. 우리의 만남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사인의 모습이 어쩐지 처음보다 크게 느껴져 콜린스는 눈을 끔벅였다.
본래도 기사는 건장한 젊은이였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자신의 머리를 훌쩍 넘어선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아닌가.
‘…착각인가?’
그러나 곧 콜린스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마사인의 온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러 유저가 아닌 콜린스가 저도 모르게 그로부터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의 단단한 턱에는 여전히 관성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콜린스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사납다 못해 마치 불길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지부장의 비서에게 감사하십시오, 콜린스 이사. 당신의 손이 아직 붙어있는 것은, 순전히 그가 당신이 하려던 것을 방해한 덕분이니.”
그 말에 그제야 콜린스는, 아까부터 기사의 한 손이 검 손잡이에 닿은 채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마사인은 몇 년 안에 데카론 나이트에 이를 것이라 기대되는 상급 기사.
설사 악마의 기척은 파악하지 못했을지언정, 자신을 해치려 하는 상대방의 적의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황가의 일원을 향한 그 불손한 태도, 오늘은 못 본 걸로 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물류 중계소에 머물게 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싸늘한 어조로 내뱉은 기사는, 그대로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비서를 따라 사무실을 나서는 그 굳건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콜린스는 뒤늦게야 바짝 긴장하여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로 팔이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이 겨우 실감이 난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악마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것은.
[히익?! 저것 보라고! 저자가 가진 검! 저건 성유물이야!]‘성유물이요?’
[그래! 만일 저걸 뽑았다면 우리 둘 다 큰일 날 뻔했다고! 넌 알고 있었나?]콜린스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성황이 아카데미 졸업 선물로 성유물을 선뜻 하사할 정도로 자신의 조카를 총애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내가 대체 누구와 척을 진 거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콜린스는, 겨우 몸을 움직여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얼마간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을까, 문득 사무실 안에 있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두운 신형 하나가 마치 그림자처럼 벽에 기대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 일부를 덮은 새까만 머리.
간혹 기이한 안광을 흘리는 은회색의 눈동자.
“누, 누구?”
어눌하게 묻는데, 머릿속에서 악마 라움이 비명을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언제부터?]‘왜, 왜 그러십니까?’
[성황이 이곳에 있다! 어서 몸을 피해라, 콜린스!]당황한 콜린스 이사가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형이 입을 열었다.
[상인 연합 북부지부 이사, 매튜 콜린스. 수 건의 탈세와 수십 건의 절도, 그리고 역시나 수십 건에 해당하는 살인 혐의가 있지. 심판을 받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하구나.]‘이게 대체 무슨? 라움 님! 라움 님?’
심상치 않은 분위를 느낀 콜린스는 급한 마음에 악마를 불렀다. 하지만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라움은 도통 대답이 없었다.
“아…….”
사색이 된 콜린스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데, 서늘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대에게 처분을 맡기지, 샤론 경. 어찌하겠는가?]그러자 엑소시스트가 흐으흐으, 흐느끼듯 웃었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죄 많은 악마계약자는 즉결 처형함이 옳사옵니다.”
즉결 처형?
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후욱. 갑자기 은빛의 날카로운 곡검이 그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콜린스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촤악!
긴 은빛의 실선과 함께 사무실 벽에 피 보라가 흩뿌려졌다.
* * *
마사인 경을 기다리는 동안, 성진은 호기심을 가지고 슈미트의 사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악마가 일하는 곳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사무실에는 피로 그려진 소환진 대신 온갖 숫자가 적인 잡다한 서류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악마 지부장은 생각보다 제대로 업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바깥은 왜 이리 조용하지? 아까까지 그렇게 큰 진동이 있었는데?”
“아마 이변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저하. 이 사무실에는 비교적 단단한 결계가 쳐져 있으니까요.”
성진의 의문에 지부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잠깐 사이에 그의 태도는 더없이 깍듯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성진이 지시한 자료들을 손수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이따금 추려낸 서류들을 자신의 권속에게 맡겼다.
그러면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난 염소 악마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성진을 힐끔거리며 그것들을 한쪽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다.
“그럼 성직자들은? 그렇게 대놓고 마기를 풍겼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나?”
“이 근방에는 사제들이 잘 드나들지 않습니다. 도시의 큰 교회들은 모두 진작에 멀찍이 이전시켰으니까요.”
성진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이전시켜?”
“예, 저하. 비록 마기를 잘 감추고 있더라도, 저희들에게 있어서 사제는 무척 껄끄러운 존재입니다.”
슈미트의 설명에 의하면 물류 중계소와 교회를 떨어뜨리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고 한다. 상인 연합의 자본을 움직여 좋은 땅과 자본을 기부하면, 여지없이 그 땅에 새 교회가 지어졌다.
물론 막대한 돈이 들기는 했지만, 그 일을 진행하는 데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교회가 멀어지는 것은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으니까. 상인 연합의 요직에는 악마계약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진은 기가 찼다.
“다들 악마의 손아귀에서 잘도 놀아나는구먼, 제국의 경제,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그러자 슈미트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로 악마 스스로는 대량의 해악을 초래하도록 계약자를 부추기지 않습니다. 변방에 숨어있는 암흑 교단 같은 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특별한 의식을 치르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죠.”
“어째서 그렇지?”
“선을 넘지 않아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성황 폐하의 눈은 제국 곳곳에 닿아 있으니까요.”
‘악마를 위한 성공적인 제국 생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몇 가지의 금기만을 어기지 않을 시, 성황은 악마가 무슨 짓을 하건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년 전부터 [협정]이라는 이상한 규칙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나.
본래 치세 초기의 성황에게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수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악마들을 몰아내고, 악마계약자는 보는 족족 처단하기 바빴다.
속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되, 그 사회 깊숙이 숨어있는 악마들을 축출하는 데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전 대륙에 걸쳐 수시로 이적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회가 되면 마계로 직접 쳐들어가 악마들을 도륙하며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멈춰 선 것은 수년 전, [협정]이 생긴 다음부터다. 그 이후로 성황은 수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고, 어지간히 거슬리는 일이 아니면 악마들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협정? 대체 그게 뭐길래?”
성진이 눈살을 찌푸리자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악마들 역시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지난 수년간 쌓인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악마들도 그 허용 범위에 대해 나름의 기준을 정해두고 있다고 한다.
첫째. 악마의 힘으로 인간을 해치되, 인간의 능력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말 것.
악마의 힘으로 한두 명의 정적을 손쉽게 제거할 수는 있다. 어차피 잘 계획하여 암살자를 고용하면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악마를 대중의 눈에 띄게 소환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너무 드러내며 사람을 해칠 시에는 성황의 제지를 받는다.
둘째. 악마의 힘으로 사회를 혼란시키지 말 것.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악마의 힘을 이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뜬금없이 악마를 강림시켜 대규모의 학살을 일으키거나, 초자연적인 재해를 유발하여 대륙 물류 이동에 혼란을 줄 때는 역시나 성황의 응징을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악마계약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제국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건가.’
성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슈미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셋째.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성황의 아이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아이들?”
“아마도 그건 저하께서 더 잘 아시는 일일 테지요?”
성진의 물음에 그렇게 반문한 슈미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어린 시절, 저하를 납치하려던 암흑 교단 하나가 어찌 되었는지 말입니다. 그날, 안식의 교단 내에 있던 자들은 뼈 한 조각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지 않습니까?”
…납치?
성진이 뭔가를 더 물으려 할 때였다.
“으아악! 경비병! 경비병!”
“살인이다! 여기 사람이 죽었다!”
“사제! 어서 의원과 사제를 불러라!”
뒤이어 우당탕, 우르르! 복도를 울리는 수많은 발소리.
서로를 마주 본 성진과 슈미트는 동시에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우왕좌왕 달리는 경비병들로 가득 찬 혼란스러운 복도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야? 거기가 어디인가?”
“콜린스 이사님의 방입니다!”
“어서 서둘러!”
그리고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비서와 마사인의 모습이 보였다. 성진을 바라보는 마사인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콜린스 이사라니요. 제가 방금 나온 곳이 그의 방입니다,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