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
성황의 아이들-18화(18/469)
018. 마중물 (2)
성진은 성황과 함께 후원의 중앙에 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선택할 것은 하나뿐이다. 임시로라도 통로를 막아 폭주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막아둔 오러를 일부러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안전할 터.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성황은 성진의 오른쪽 쇄골 아래쪽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아마도 열려 있는 통로에 가장 가까운 위치이리라.
“유입되는 오러의 흐름이 거세지면 호흡이 조금 힘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의 감각이 아닌 순전히 오러의 흐름으로 인한 착각일 뿐이니 그 점을 유념해라.”
성진은 긴장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한다.”
순간 후욱 하고 커다란 물줄기가 가슴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여전히 신체에 부담이 없는 청량한 흐름이었다.
그 물줄기는 가슴 근처를 맴돌더니 오른쪽 견갑골 아래로 쉬익 하고 사라져 버린다.
저기가 바로 그 통로구나. 성진에게는 아까까지만 해도 모호했던 위치가 이제야 똑똑히 느껴졌다.
오러의 양이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한다. 통로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시 가슴께가 채워진다.
그러나 아직은 부족했다. 여전히 밀려드는 족족 오러는 통로 너머로 말끔히 빨려 들어갔다.
“흐읍.”
성진은 최대한 숨을 몰아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호흡을 조절했다.
실제로는 숨 쉬는 것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데도, 어쩐지 폐에 물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감각에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살랑살랑. 호흡은 점점 무거워지는데 머리카락은 후원 내를 맴도는 바람에 가볍게도 한들거린다.
‘이게 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문득 성진은 궁금해졌다. 아무리 성황이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라고는 해도, 그가 사람인 이상 몸에 축기되어 있는 오러에는 한계가 있을 터.
그런데 물량 공세는 전혀 끝날 기미가 없다. 통로는 여전히 오러를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빨아들이고, 밀려드는 오러의 양은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슬쩍 성황 쪽을 쳐다보니, 그는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 위에 시선을 두고 있다.
아니 어쩌면 성진의 가슴 너머, 보이지 않는 통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콰아아아아아.
폭포 쏟아지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유입되는 오러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감각에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는 물이 몸 안으로 쏟아진다기보다는, 숫제 몸이 강물 안으로 꼬르륵 잠겨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숨 막혀…….’
혹시라도 과호흡을 하지 않도록 호흡을 부단하게 억제하고 있는데, 마왕이 머릿속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이건 미친 짓이야. 인간에게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내 생각에도 정신 나간 짓 같아.’
점점 괴로워지는 호흡을 잊으려 애쓰며 성진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후원의 바람이 조금씩 거세진다 했더니, 자세히 보니 그들의 주위로 바람이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바닥의 잔디가 오른쪽으로 누웠다 땅 위로 솟구쳤다 정신이 없다.
성황이 걸쳐 입은 긴 법복 역시 후웅 바람을 타고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그들 주위의 공기가 통째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날리는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여기저기서 날아온 풀줄기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반시계 방향을 그리며 허공으로 치솟는다.
순간 성진의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성황이 어떻게 한 인간이 축적할 수 있는 양을 훌쩍 넘어서는 오러를 지속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는가.
‘설마, 이 양반. 지금 주변의 오러를 끌어모으고 있는 건가?’
그들은 그야말로 태풍이 눈이었다.
조금 떨어진 정원수들이 거센 바람에 곧 부러질 듯 흔들렸다. 그러잖아도 휑하던 후원의 잔디가 흙째 뽑혀나가기 시작한다. 아까까지 그들이 식사를 했던 작은 테이블은 바람에 힘없이 밀려나다 후원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나저나 이거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주변의 난장판에 식은땀을 흘리던 성진이 눈을 데구루루 굴려 성황을 돌아보았다.
이 양반도 이제야 좀 힘이 드는지 눈을 감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가슴에 닿아 있는 손에서 조금씩 떨림이 심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밀려 들어오는 격류는 여전히 더 거세지고 있다!
머릿속에서 마왕이 절규했다.
[이런 미친! 여기서 더 쏟아부을 생각이야!]콰콰콰콰콰콰!
몇 없던 정원수가 기어이 부러져 내동댕이쳐지고, 한쪽에 나동그라져 있던 작은 테이블은 이리저리 요동치다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들은 이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속이었다. 몸이 세찬 물결에 뒤로 확 밀려나는 느낌이 들며 숨이 턱 막혀 왔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순식간에 성진의 정신은 거센 급류에 휘말려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마왕 놈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삽시간에 멀어져 간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응?”
연무장에서 한창 진주궁 상주기사들을 때려잡고 있던 마사인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했는데, 공기 중의 오러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본궁 쪽인가. 설마…….”
그는 기합으로 녹초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상주기사들을 일별하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본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콰앙!
갑자기 기도실 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에 경계를 서고 있던 성기사들이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방금까지 개인 기도에 들었던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단장 카트리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약식 갑주를 걸치기 시작했다.
“부관은?”
여간해서는 기도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기사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프란시스 경은 현재 아카데미에 계십니다. 성유물 건으로…….”
“뭐, 좋아. 저도 느끼는 게 있으면 알아서 쫓아오겠지.”
그녀는 마지막으로 철컥 소리가 나게 검대를 차더니 턱 끝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본궁으로 간다. 너희들은 날 따라와.”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시종장!”
무시무시한 기세로 후원으로 달려 나온 친위대 1기사단장 발타자르가 노호성을 질렀다.
갑자기 공기 중의 오러가 모조리 어디론가 쓸려 나간다 싶더니 본궁 후원에 난데없이 폭풍이 내려앉아 있었다.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오러의 소용돌이였다.
나무가 뽑혀 날아가는 거센 기세에, 사용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폭풍의 가장자리에 모여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평화롭던 황궁에서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발타자르가 생각하기에 전 대륙에서 이런 묘기가 가능한 것은 바로 성황, 그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전말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을 붙들고 탈탈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대체 그분께서 또 무슨 일을 벌이시는 거요? 어서 대답해 보시오!”
그러나 멱살이 잡힌 루이스는 넋이 나간 얼굴로 오러 폭풍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기에 계시오……. 저기 성황 폐하께서, 폐하와 모레스 황자님이…….”
“모레스 황자님까지?”
기세등등하던 노기사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어린 황자마저 말려들어 가 있는 상황이라면, 이것은 결코 성황이 의도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폭풍을 돌아보는 발타자르의 눈에 처음으로 초조한 빛이 어렸다.
* * *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엉망으로 부서져 있는 목책과, 찢어지고 내려앉은 막사들, 전복된 군용 트럭.
그리고 온 사방이 시체로 덮여 있다.
여기저기 마물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의 주검.
이곳은 분명 성진의 기억에 있는 곳이다.
마지막 항전을 결의한 초인 부대가 눈물을 뒤로하고 떠나왔던 곳.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던 마지막 전진기지.
그때와 다른 것은 단 하나였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시에는 없던 시뻘건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타닥탁. 기울어진 목책의 나무가 쩍 갈라지더니 불꽃을 흩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피와 마물들의 체액으로 얼룩진 전투복, 전투화.
너덜너덜한 밴디지가 감겨 있는 상처투성이의 손.
평소와 같은 이성진 본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드는 걸까.
다시 고개를 들어 천막 위를 뒤덮고 있는 검붉은 불꽃을 바라보자, 마치 살아있는 듯 이리저리 춤을 추던 불꽃이 스르륵 성진을 향해 다가왔다.
마중하듯 손을 가져다 대니 불꽃이 화르륵 빨려들며 손에 달라붙었다.
이 열기. 언젠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열기다. 멍하니 불타오르는 손을 보고 있자니 불꽃이 슬금슬금 팔을 기어오르며 번지기 시작했다.
전투복의 소매가 불타오르고, 팔뚝의 피부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영혼까지 태워 버리는 화염이구나.”
화악.
갑자기 뒤에서 서늘한 공기가 몰아치더니 불꽃이 순식간에 저만치 밀려 나갔다.
“아무리 밀어내도 열기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더라니, 통로 내부가 완전히 연소되어 텅 비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다.”
검붉은 불꽃들이 더욱 더 거세게 불타오르며 발버둥 쳤지만, 성진의 주위로 둥글게 그려진 경계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몸에 옮겨붙었던 불꽃도 완전히 사라졌다.
놀란 성진이 뒤를 돌아보니, 절대로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아니, 이 양반이 왜 여기에?
“네가 열병을 앓았을 때의 이야기다. 어디서 이런 불을 끌어왔나 했더니, 과연 화염지옥이 따로 없구나.”
성황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성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지는 만큼 화염이 조금 더 바깥으로 밀려난다.
길고 하얀 법복에 화마의 빛이 반사되어 비현실적인 붉은 광택이 흘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성진과 거의 눈높이가 같았다.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서서히 머리가 맑아진다.
성황이 이쪽 세계에 있다.
그가 성진의 실체를 보고 있다.
그가…….
“…성황 …폐하.”
성진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자신도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잔뜩 배여 있는 목소리였다.
성진의 부름에 잠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성황이, 곧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그래, 모레스.”
뭐?
“아니, 저기… 하지만…….”
“그 정도의 오러도 버티지 못하고 여기까지 떠밀려오다니, 너는 조금 많은 수련이 필요한 듯 보이는구나, 아들아.”
“아들이라니… 저기, 아버지?”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있는데, 성황이 그에게서 몸을 돌리며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이제 슬슬 눈을 뜨려무나, 나도 조금은 피곤하구나.”
“네에?”
그 말을 끝으로.
쏴아아아.
어디선가 세찬 물줄기가 밀려들었다. 순식간의 눈앞의 풍경들이 사라진다.
폐허가 된 전진기지가.
기지를 가득 메운 시체가.
검붉게 몸부림치는 게헤나의 염화가.
성진의 정신이 다시 속절없이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레스.]꿈결처럼 성황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졌다.
[수로의 물을 당기면, 맞은편에 있는 것들이 함께 끌려온다는 것을 명심해라.]* * *
“…자님!”
“모레스님!”
누군가가 자꾸 시끄럽게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눈에 익은 순둥한 얼굴의 기사가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저하!”
“…마사인 경?”
어째서인지 성진은 마사인의 팔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다 핑 도는 느낌에 그냥 포기해 버렸다. 온몸이 나른한 게 기운이 하나도 없다.
“오오, 황자 저하!”
“다행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노기사와 본궁의 시종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제야 서서히 앞뒤 정황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아, 우리… 본궁 후원을 완전히 날려 먹었지. 난리가 났었겠군.
“…아버지는?”
그래, 정작 이 사고를 친 장본인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의 물음에 마사인과 노기사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성진을 향해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하. 폐하께옵서도 무사하십니다.”
“…….”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사인의 시선을 따라가던 성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황을 발견했다.
그 역시 근위대 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어쩐지 전혀 의식이 없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은빛의 약식 갑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그의 손을 잡고 희게 빛나는 신성력을 흘려 넣고 있고, 곁에 선 수석 시종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성진의 시선을 눈치챈 노기사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조금 탈진하신 것뿐이옵니다.”
“…그래.”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다. 마지막까지 잘난 척하던 양반이니.
저도 모르게 통로가 있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몸속 어딘가에서 찰랑하고 물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