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5)
성황의 아이들-185화(185/469)
§ 185. 참회목 (2)
막 잠에 빠져들려던 야영지가 삽시간에 횃불로 환하게 밝아졌다.
어느새 성진의 일행을 중심으로, 오르덴과 울프 기사단, 심지어는 음유시인 로랑까지 동그랗게 한데 모이게 되었다.
“원인은 파악되었나, 일마 경?”
“방금 정찰병이 돌아왔습니다, 대공자님.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밀로 상단 쪽에서 악마가 소환된 것 같다고 합니다.”
“…악마?”
“예. 검은 마기를 풍기는 괴물을 보았답니다. 꼭 나무처럼 생겼는데, 꿈틀꿈틀 움직이며 사람과 말을 닥치는 대로 잡아챘다더군요. 이미 밀로 상단의 대부분이 말려들었다고 합니다.”
오르덴이 눈썹을 찌푸렸다.
암흑 교단과의 결착을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뜬금없이 악마를 소환한다고?
“밀로 상단주가 의도한 일은 아니라고 봐.”
오르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성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잖나. 상행이 무산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상단주 본인인데.”
“우리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아닐까요? 증거와 증인을 한번에 인멸하려던 것은 아닌지…….”
뭐? 너 설마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조사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냐?
거기다가 증거 인멸을 왜 이런 식으로 해? 우리가 덩달아 말려들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런 어중간한 위치에서 자기 상단을 갈아 넣는다고?
성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쉽게도 놈을 면박 줄 여유는 없었다. 갑자기 야영지 밖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 도와……!”
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성진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최근 열흘간의 여정을 쭉 함께하며, 알게 모르게 안면이 익은 밀로 상단 측의 용병이었다.
그는 몸에 굵은 나뭇가지 같은 것을 잔뜩 휘감은 채였는데, 거기서부터 쉴 새 없이 검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
용병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야영지 앞에서 털썩 쓰러지자, 에디스가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 나가려 했다. 물론 성진과 발레리 경이 동시에 그녀를 붙잡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싸아아아.
꿈틀거리던 용병의 몸이 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바짝 쪼그라들었다. 마기에 의한 사체 침식이었다.
성진은 자연히 물류 중계소에서 죽어버린 콜린스 이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자 역시 악마계약자인가?’
[아냐, 이성진. 저건 그저 농도 짙은 마기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야.]마왕 놈이 대답했다.
[이제 마기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실감하겠어? 신성력 없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대번에 저 꼴이 나는 거야.]독한 마기를 뿜어내는 악마의 명부를 펼치고도 멀쩡한 성진을 보고, 슈미트가 크게 당황한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다샤는 괜찮으려나?’
어쨌든 지금은 밀로 상단에 잠입해 있던 다샤의 안위가 가장 걱정이었다.
물론 유능한 사람이니 늦지 않게 몸을 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런 큰일이 있는데도 아직 성진에게 별다른 보고가 없었던 것을 보면, 정말로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 같은데.
“대공자,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마 경이 오르덴에게 물었다.
울프 기사단은 숙련된 마수 사냥꾼이기는 하나, 성기사는 아닌지라 당연히 마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사제의 도움 없이 악마종을 상대한 적도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몇 안 되는 전투 사제들은 현재 모두 지그스문트령에 남아 있다.
오르덴은 잠시 고민했지만, 판단은 빨랐다.
“무언가 삿된 것이 상단을 불시에 습격한 것이라면, 델크로스의 신민으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비록 암흑 교단과 결탁한 것으로 의심되는 밀로 상단의 일이라도 말이다.
거기다 이 길은 지그스문트령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 악마종의 습격으로 상단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안 그래도 외진 영지가 완전히 고립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서둘러 지시했다.
“인력을 조금 나눈다. 저하를 호위할 기사 둘, 그리고 비전투 인력을 보호할 기사 둘을 남기고, 나머지는 일마 경과 함께 나를 따르도록.”
그 말에 울프 기사단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빠릿빠릿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전투를 앞둔 기사들의 얼굴에는, 미처 숨길 수 없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오르덴이 성진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하, 부디 마물 전담반 성기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울프 기사단의 기사 둘을 남기는 대신, 성기사인 발레리 경과 샤론 경을 빌리겠다는 말이다.
“흠…….”
성진은 잠시 고민했다.
겨우 기사 둘일 뿐이지만, 본래 성진이 데리고 있는 상주기사들까지 더하면 분산되는 전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지.
무엇보다도 단장인 일마 경과 함께, 일행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바로 마사인 경이다. 그는 분명 성진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할 텐데.
“그냥 다 함께 가는 것이 어떨까?”
넷?
주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성진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네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나 역시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지 않나?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괜히 인원을 분산시키지 말자고.”
“하오나 저하…….”
“그리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사인 경과 나는 성유물을 가지고 있다. 사제나 성기사가 부족한 지금은, 우리 둘도 제법 중요한 전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인이 오래 지니고 다닌 물건은 성유물의 격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물리력이 월등히 강해진다거나, 갑자기 막 신성력을 뿜어낸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단지 격이 높은 무기는 간혹 보통의 무기로는 베지 못하는 것들을 잘라낼 수 있다나.
마사인 경의 검 미스라가 그 좋은 예였다.
무에 뛰어났던 7대 성황이 패용하고 다닌 후, 두 차례에 걸쳐 성기사 단장에게 하사되었고 이후에 정식으로 성유물로 인정받았다고 하지.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의 마룡을 봉인한 주신의 창을 녹여 만든 전설의 무기들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호두까기. 이 검이야말로 두말할 필요가 없는 최강의 성유물이다.
이게 보기에는 좀 볼품없어 보여도, 무려 살아있는 신의 대리자가 반평생을 들고 다닌 물건이지 않나.
무엇보다도 성진이 이들을 따라가야만 하는,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만일 악마가 저런 마기를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다면, 놈의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을지도 몰라.’
이미 죽은 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악령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성진은 마기에 면역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처음부터 전면에 나서는 쪽이 불필요한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길일 터였다.
“하오나, 그 무엇보다도 저하의 안전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르덴은 그렇게 말하며 힐끔 성진의 뒤쪽을 일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반대할 것 같았던 마사인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성진의 뒤에 서서 미스라를 움켜잡고 있었다.
정작 성진을 만류한 것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저하, 잠시만…….”
샤론 경이 어쩐지 낭패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말했다.
“그저 잠깐이면 괜찮으니, 부디 안전한 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실 수는 없사옵니까?”
그리고 그녀는 성진에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흐, 하필이면 이럴 때 황궁에 [틈새]가 열린 것 같습니다. 지금은 바로 연락을 드릴 수가 없으니, 아무쪼록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운이 나쁘게도 아까처럼 쉽게 성황을 부를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바쁜 듯 별말 없이 자리를 뜬 것도 아마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샤론 경. 걱정은 고맙지만, 우리 앞에 놓인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해. 언제까지 아버지께 일일이 모든 것을 의존할 생각이야?”
도대체 다들 그 양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일일이 살펴 줘야 하는 거지?
성황은 하루 종일 시간에 쫓기며 부지런히 사는 인간일 뿐이지, 정말 시간을 초월한 신이 아니라고.
“…….”
성진의 말에 샤론 경이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 안전 문제라면 안심해. 아버지가 걱정하실만한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저 우리에게는 전력을 분산시킬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뿐이지. 나도 괜히 나서서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성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악마를 내버려 둘 수 없다면,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으로 부딪혀 보자. 그래도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다 함께 후퇴해서 지원을 요청하면 되는 거다. 나 혼자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들에게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무리하게 함께하자고 하지도 않을 거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용병이 마기에 침식되어 죽은 이후 딱딱하게 굳어있던 일행의 얼굴에, 미세하게나마 안도의 빛이 어린다.
강한 악마종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황자의 말에는 어딘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비전투 인원들은 이곳에 남는다. 처음 대공자의 지시대로, 기사 둘과 함께 안전한 곳을 찾아라. 나머지는 이대로 나와 함께 밀로 상단으로 향한다.”
성진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한차례 시선을 준 후, 짧게 내뱉었다.
“자, 가자.”
성진이 호두까기를 쥐고 걸음을 옮기자, 마사인 경과 브루노 단장을 포함한 일행이 조용히 그 뒤를 따른다.
또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오르덴을 위시한 울프 기사단 역시 자연스레 황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한 점의 의혹도 찾을 수 없더라. 검을 들어 마땅히 갈 곳으로 이끄니, 누가 감히 거스를 수 있으랴.”
야영지에 남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랑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며 띠링, 리라의 현을 튀겼다.
* * *
끼이이이이이!
상단의 야영지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파리가 다 떨어져 나간 한겨울의 떡갈나무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앗, 하고 놀라는 사이에 둥치가 굵어지고, 갈라져 나온 가지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주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멀리서 보면 갈라진 나무 껍데기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은 꿈틀꿈틀 움직이는 나무줄기들이 서로 뒤엉켜 꼬여있는 것이었다.
그 뒤틀리는 줄기들 사이로, 보기에도 불길한 시커먼 마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이 지독한 마기에 닿은 자들은 단숨에 말라비틀어져, 이제는 줄에 꿰인 고기처럼 나뭇가지에 줄줄이 엮인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마계수를 내려다보던 자코모 밀로는, 이미 야영지를 가득 채우며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거대한 나무를 보고 혀를 찼다.
자신이 오랜 기간 일궈온 상단의 말들과, 수많은 짐마차들이 허무하게 박살 나는 것을 빤히 지켜보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럴 바에는 처음부터 그의 힘을 빌리는 건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참회목이 움트기 시작한 직후.
빠르게 주변을 집어삼키는 마계의 나무로부터, 자코모만이 겨우 샐로스의 힘을 빌려 늦지 않게 몸을 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다였다.
[이미 늦었다. 자코모.]머릿속에서 샐로스가 한탄했다.
[움이 트기 전에 막지 못하면 어차피 방법이 없다. 저 저주받을 나무는 인간의 생명은 물론, 악마의 마기조차도 끌어당겨 양분으로 삼으니까.]즉 마계수를 상대하려면 못 할 것은 없으나, 샐로스 역시도 어느 정도 힘의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작 계약을 주고받은 인간을 위해 그런 손해를 감수할 의리도 없었다.
‘그럼 저 마계수는 어찌합니까, 샐로스?’
이대로 계속 자라나면, 저 나무 하나로도 능히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닐까?
[적당한 선에서 멈출 것이다. 일정 크기를 넘어가면, 마계수의 줄기들이 서로를 흡수하는 양 또한 늘어나게 되니, 처음 같은 기세로 번져나가지는 못한다. 단지, 도시 하나 정도의 크기로는 자라날 테지만.]즉, 이 일대가 모조리 박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 전에 성황이 나타나겠지.]어느 경우가 되었든, 어차피 자코모의 손을 벗어난 일이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횃불을 든 한 무리의 무장 병력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울프 기사단과 황자의 일행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상대할 생각인가.’
울프 기사단이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도 일반 군대나 마경의 마수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다.
‘성기사도 아닌 저들이, 저렇게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계수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렇게 속 편히 그들을 관찰하던 자코모는 순간 흠칫 놀랐다.
모레스 황자가 잠시 그가 있는 쪽을 똑바로 올려다본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
착각인가?
황자가 다시 마계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자코모는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그때 샐로스가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 어쩌면 저들에게도 승산이 있을지 모른다.]‘승산이요?’
[저들이 성유물을 가지고 있구나!]그때 마계수가 생물의 생기를 느꼈는지, 황자 일행을 향해 빠르게 두꺼운 가지를 뻗어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쉬익!
황자 일행으로부터 은은한 금빛의 오러가 휘익 떠오르는가 싶더니.
쿠아앙!
뻗어 나온 가지를 모조리 잘라내며, 마계수의 몸통 한편에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