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89)
성황의 아이들-189화(189/469)
§ 189. 참회의 방식 (1)
바람처럼 마계수를 타고 오른 황자가 가지 무성한 나무 꼭대기 위로 모습을 감춘 후.
끼이이이…….
갑자기 마계수가 움직임을 멈추고 빠짝 쪼그라들기 시작하자, 브루노는 황자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해치웠나?”
그러나 기쁨도 잠시.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앉는 마계수의 잔해를 바라보던 일행은 기겁했다.
나무는 부피가 줄어들다 못해 아예 부스러지며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죽은 악마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빠르게 마계로 역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어어, 잠깐! 이렇게 되면……!
“모레스 저하!”
아니나 다를까.
마계수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붕 떠오른 황자의 몸이, 이내 빠른 속도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예 의식을 잃은 듯 축 처진 모습이다.
“저하!”
사색이 된 마사인 경이 바닥에 검을 내동댕이치며 황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런……!”
브루노 또한 미약한 양이나마 오러를 일으키려 노력하며 추락하는 황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점점 가속하기 시작하는 소년의 몸을 떠받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양. 브루노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차라리 저하의 의식이라도 깨어 있었다면!’
처음 황자가 마계수에서 추락했을 당시.
떨어지는 황자를 무사히 받아낸 것은 마사인 경이었지만, 마지막 순간 결정적으로 황자의 속도를 줄인 것은 갑자기 실체화된 다량의 오러였다.
그리고 브루노는 분명 그 익숙한 오러를 알고 있었다. 황자가 명상할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특유의 거칠면서도 섬세한 오러를.
분명 저 불가사의할 정도로 오러 운용이 능숙한 황자가, 위기 상황이 닥치자 무의식중에 오러를 실체화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지금, 그러한 요행을 더는 바랄 수는 없을 터.
‘…이제라도 폐하께서 이곳에 임해주신다면!’
그러나 그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샤론 경을 슬쩍 돌아본 브루노는, 곧 낭패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허공에 멍하니 시선을 둔 그녀가, 정신이 완전히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어가 되지 않는 채널링이 미친 듯이 폭주하는 중이었다.
“오셨나이까? 마침내 오셨나이까?”
“한데 어째서 저에게 이리도…….”
“바람아, 불어라!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모레스, 기다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더 천천히…….”
“아아, 그랬군요!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데, 단지 우연일까.
샤론 경이 중얼거리기 시작한 직후, 어쩐지 주변을 맴도는 바람이 조금씩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러의 실체화와는 조금 다른, 그저 자연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황자를 향해 세차게 불어 닥친다.
덩달아 황자가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미세하게나마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허공에서 그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한 브루노가 샤론 경을 힐끔거리는 동안, 그녀의 뜻 모를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아아아,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어!”
“정신 차려! 이성진! 이성진!”
“우리는 언제까지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으니, 이제는 그저 명하기만 하소서!”
그 순간.
일행의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계수가 사라지며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던 마기들이, 갑자기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데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기들은 이내 황자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마치 무수히 많은 손들이 그를 붙잡는 것처럼.
조금씩, 추락하는 황자의 속도가 늦춰지고 있다.
“성황 아빠! 어서 빨리! 빨리! 빨리!”
“아빠 폐하! 아빠 폐하! 아빠 폐하!”
“이성진! 이성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명하시기만을…….”
이제 샤론 경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채널링을 제어하지 못하는 그녀는, 사념에 실려 오는 실낱같은 감정들에조차 깊이 동조하고 마는 것이다.
브루노로서는 감지조차 불가능한, 희미한 사념들까지 모조리 잡아내는 예민한 영능력자의 채널링이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휘청.
그 말을 끝으로 샤론 경은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기함한 브루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외쳤다.
“샤론 경!”
급히 샤론 경의 상태를 살폈으나, 다행히도 그녀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마도 과도한 채널링에 따른 일시적인 부작용인 듯 보였다.
그사이 더욱 속도가 줄어든 모레스 황자는, 이제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이라도 된 양 천천히 하강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행 전체가 뭔가에 홀린 심정으로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요람처럼 그를 감싸고 있는 마기에 휘감긴 채, 황자가 가뿐히 마사인 경의 팔 위로 안착했다.
* * *
찰랑찰랑.
잔물결이 이는 수면에서 네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틈새에서 막 나왔을 때는 언제나 지독한 멀미가 생기곤 했지만, 그때마다 기도실의 인공 연못은 제 기능을 톡톡히 하곤 했다.
바로 다른 공간과의 괴리감을 없애는 것.
최대한 몸에 느껴지는 힘을 배제하고 있으면, 틈새에서 돌아왔을 때도 현실로의 적응이 한층 빨라졌다.
그렇게 잔잔히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얼마 전 아들놈이 그에게 했던 당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버지, 부탁이 있습니다.
황도를 떠나기 전날, 아들은 자신을 찾아와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부탁.
-네. 제가 한동안 이곳에 없을 텐데, 그냥 가기는 아무래도 영 불안해서 말입니다.
네이트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불안해한다는 것인가.
-그래. 무슨 부탁이더냐?
-아주 간단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또다시 틈새를 여는 녀석이 있으면 아주 혼쭐을 내주십시오. 델크로스를 침입하는 놈들이 있다면 끝장을 내주시고…. 아니, 아예 침입하기 전에 놈들을 미리 없애 주시면…….
-…….
-이게 아닌가? 차라리 침입하려는 의도만 가지고 있더라도 처음부터 모조리…….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주억거리는 아들을 보던 네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설명해 준 적도 없었건만, 아이는 그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궁리하며 어떻게든 인과를 만들어 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괜한 심력의 낭비다, 모레스. 인과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되었건, 네가 인지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그러했다.
인형의 몸속에 숨어있는 한, 그자는 [협정]에 의해 한 명의 어엿한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따라서 이 세계의 규칙을 벗어나거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행동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인과는 발생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성황은 먼저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협정]에서 요구하는 성황의 제약이다.
아들이 의지만이 유일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단지 여기에는, 아들이 그자의 인형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요청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인형의 정체에 대해 네이트가 먼저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 [협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아들에게 정체를 들킨 후, 바로 인형을 버려야 했던 것 또한 그러한 이유였다.
아들이 인형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한, 그는 언제든 아들의 요청 여하에 따라 성황의 손에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뭐든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면 소용이 없단 말인가요? 흠, 그럼… 아! 이건 어떻습니까?
아들은 잠시 골똘히 궁리하다 말했다.
-틈새에 말려들게 되면, 언제나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아버지.
휘익.
순간 자신과 아들을 휘감은 미약한 바람.
네이트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었더니, 이를 기민하게 눈치챈 아들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하하. 이번에는 분명 반응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것 맞죠?
그래. 아마도 그 아이가 만든 인과가 작용한 것이리라. 수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네이트는 생각했다.
이번에 침입한 것은 드물게도 강력한 외계 군주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손쉽게 해결되지 않았나.
‘하지만 자리를 제법 오래 비웠다.’
삐이익-
조급한 마음에 채널을 열자, 시끄러운 이명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틈새가 공간을 심하게 뒤튼 영향으로, 아직 이 근방에서는 채널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 샤론 경에게 야간 보고를 들어야…….’
멀미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네이트는 축축 끌리는 발을 이끌며 기도실 문을 나섰다.
그런데 문밖에서 모포를 들고 대기하고 있던 카트리나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아렌쟈로부터의 전언입니다, 폐하!”
그 말에 네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급한 일이 있으면 직접 사념을 보내면 될 일이 아닌가.
코른시임.
틈새가 열리면 아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약삭빠른 족속들 같으니.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네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레스 황자님 일행이 [마계수]라 불리는 악마종과 조우했다고 합니다. 황자님의 주도하에 토벌을 성공적으로 진행했으나, 저하께서 큰 부상을…….”
네이트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채널을 확장했다.
그러나 막상 샤론 경은 그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 의식을 잃고 있거나, 아니면 네이트의 사념을 수신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과부하에 걸려 있는 모양.
대신에 그는, 어디선가 자신의 아이들이 울먹거리며 애타게 그를 찾는 소리를 들었다.
[성황 아빠! 어서 빨리! 빨리! 빨리!] [아빠 폐하! 아빠 폐하! 아빠 폐하!]카트리나에게 뭐라고 언질할 새도 없이, 네이트는 대번에 몸을 내던져버리고 영혼 상태가 되었다.
-페하!
멀리서 카트리나가 외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았던 장소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저하! 저하! 괜찮으십니까?”
마사인은 모레스 황자를 바닥에 눕히며 다급하게 외쳤다.
일견 황자는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눈에서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거기다 전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겁기만 했다.
“사제를 불러라! 어서 저하의 치료를!”
그러나 선뜻 그들의 옆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황자의 주변을 자욱하게 감싼 마기 탓이었다.
이를 눈치챈 마사인이 손으로 마기를 휘저으며 흩뜨리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도 황자를 중심으로 뭉친 마기는 쉬이 떨어지지 않고 뱅글뱅글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마사인 경! 일단은 경도 피하십시오!”
“벌써 침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마사인의 얼굴과 팔에는 이미 다수의 검은 얼룩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기에 비교적 강하다는 성황가의 일원이었지만, 계속해서 짙은 마기에 노출되는 데에는 그도 별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황자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이 지독한 마기 속에서도, 아직은 황자에게 별다른 침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이대로는 결국 시간문제였다.
“우선 마기를 정화해 보겠습니다!”
발레리 경은 물론, 급히 불려온 구스타프 사제까지 동원되어 마기를 정화하기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차, 브루노 단장을 윽박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있었다.
‘…빨강이 님?’
브루노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미친 성기사는 뭘 하고 있어? 어서 쟤 아버지를 부르라고 해!]그러자 브루노는 낭패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샤론 경은 지금 의식이 없습니다. 당장은 무리입니다만.’
[뭐?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어? 그럼 너라도 빨리 그를 불러야 할 것 아니야?]‘하지만 빨강이 님. 제 보잘것없는 채널링으로는 저 멀리 황도까지 사념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전 폐하를 담을 만한 그릇도 되지 못하고요.’
[그럼 미친 성기사를 어서 깨워! 몸을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가 이곳에 오더라도 뭔가를 하기 힘들 거야. 인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거라고!]그렇게 방방 날뛰며 브루노를 윽박지르던 마왕이, 갑자기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어? 어라?]‘왜 그러십니까, 빨강이 님?’
그러나 브루노 단장 역시 곧바로 이변을 알아챘다. 데카론 나이트의 날카로운 감각이, 미묘하게 무거워진 공기의 밀도를 감지한 것이다.
“이, 이건 무슨?”
한창 기도를 올리던 구스타프 사제와 발레리 경이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사방이 신성력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마치 황도에 들어가 처음 은총을 접할 때와 같은 신성한 느낌. 경건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기운이 주변의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쿠웅!
일대를 내리누르는 묘한 압력과 함께.
화악.
모레스 황자를 둘러싸고 있던 마기가 일제히 증발하여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