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96)
성황의 아이들-196화(196/469)
§ 196. 지그스문트령 (5)
성진은 오러로 체온을 조절하며 눈밭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누운 채 늑대와 거꾸로 마주보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던 터라.
다행히 성진이 비교적 무방비한 상태에 놓인 동안, 늑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얌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지금 당장 공격할 의사는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망토에 달라붙은 눈을 툭툭 털어내는 와중에도 마왕과 함께 부지런히 놈을 탐색했다.
‘야, 저놈 대체 뭐냐? 왜 늑대가 말을 하는 건데?’
[직접 말을 하는 건 아니야. 강한 사념을 보내는 거지.]‘그래, 그게 뭐든. 마경의 마수일까? 아니면 혹시 악마라든가?’
[흠. 글쎄? 특별히 마기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는데…….]마왕 놈도 뭔가 아리송한 눈치다.
뭐, 일단은 놈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뿐인가.
“좋아. 말하는 늑대.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 일단 통성명을 하자.”
어느 정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성진이 늑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신성제국 델크로스의 황자, 모레스 클라인이다. 너는?”
그러자 늑대가 성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당신이 대공자의 초청을 받은 그 3황자란 말입니까? 하지만 소문에 듣기로, 모레스 황자는 돼지… 실례. 비교적 과체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거, 대단히 예의 바른 늑대일세.
[게다가 당신에게서는 제 동족과 무척 비슷한 기척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정말 단순한 인간입니까?]“…그래.”
성진은 한 박자 늦게 시인했다.
자신은 엄밀히 말하면 모레스의 몸에 빙의한 악령이긴 했지만, 어쨌든 모레스 자체는 인간이니까. 늑대 같은 것과 동족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놈은 찬찬히 성진의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동족이라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저의 착각인 모양입니다. 대공자까지 동행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신이 밝힌 신원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이놈, 대체 뭐지?
사람들의 풍문은 물론, 오르덴의 얼굴을 알아보고, 놈이 모레스를 초청한 것까지 알고 있다고?
[저는 며칠 전부터 이곳으로 다가오는 당신의 기척을 느꼈습니다. 그저 동족이라 생각해 감시를 하려 했을 뿐, 설마 당신과 단둘이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성진이 다가가자 거리를 두고 멀어졌던 건, 이놈에게도 이 상황이 예상치 못한 사태라는 뜻이겠지.
[이왕 이렇게 된 것, 당신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마계수를 소환한 것이 당신입니까?]…뭐?
성진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는데, 늑대가 재차 물어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당신들뿐입니까? 대공자와 함께 있어야 할 울프 기사단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마계수에다, 울프 기사단까지 알고 있어?
그즈음에 이르러 성진은, 이놈의 정체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마수도 악마도 아니다. 그러면 혹시 이놈도 멀쩡한 늑대에게 씐 다른 영혼 같은 건가?
성진에게서 동족의 기운을 느꼈다는 말은, 즉 같은 악령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다, 뭐 그런 걸까?
“이봐. 난 분명 통성명을 하자고 했을 텐데? 네가 대체 뭔 줄 알고, 내가 그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하지?”
성진이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으르렁거리자, 늑대는 허를 찔린 듯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둥글어진 눈과 슬쩍 벌어진 아래턱.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도 놈의 당황한 표정이 여실히 보이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급한 마음에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저’의 이름은 막스.]“그래, 막스. 그리고?”
[이 부근에 터를 잡고 사는 평범한 늑대개입니다.]“…뭐? 평범? 늑대개?”
결국 참지 못한 성진은 벌컥 화를 냈다.
“야, 임마! 너 설마 지금 나를 늑대개로 착각했다고 할 셈이야? 네 생각에도 이건 뭔가 설명이 많이 부실하지 않냐?”
그러자 늑대는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낑낑거렸다.
[그것은 무척이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성황가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양해는 무슨! 너 이 자식, 당장 바른대로 말해! 너 늑대개에게 씐 악령이지?”
[악령이라니, 당치 않습니다!]“그게 아니면 네가 마계수에 대한 걸 어떻게 알아?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너 혹시 암흑 교단 놈이냐? 참회 교단의 악령이야?”
[괜한 억측입니다. 전 암흑 교단이 아닙니다!]“그럼 대체 뭔데?”
[그러니까 막스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그러자 마왕이 성진에게 속살거렸다.
[그건 사실이야, 이성진.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끄응…….”
성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화를 삭였다.
마수도, 악마도, 심지어는 악령도 아니라면 이놈은 도대체 뭐냔 말이야?
그때 늑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린다.
[…이런,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듯합니다.]그와 동시에 성진도 기척을 감지했다. 이쪽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마사인과 오르덴의 기척을.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시선을 맞췄다.
“네 정체가 뭔지 절대 말할 수 없다면,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 넌 지그스문트령에 해를 끼치는 놈이냐?”
그렇게 묻는 성진의 손은 어느새 호두까기에 닿아 있었다.
그러자 늑대가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희박하다 못해 건조한, 어딘가 초탈한 듯 보이기까지 하는 눈이다.
[적어도 제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저는 이곳에 해로운 존재가 아닙니다.]마왕 놈이 속삭였다.
사실이야.
안도한 성진이 검에서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늑대가 성진을 향해 물어온다.
[저에게도 하나만 확실히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이 마계수를 소환했습니까?]“아니, 난 아니야. 누구 소행인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늑대는 티끌 하나 없는 까만 눈동자로 잠시 성진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살랑. 꼬리를 두어 번 흔들어 보이곤, 늑대는 성진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아마도 두 사람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뜰 셈인 모양.
그때 문득 궁금해진 성진이 물었다.
“야, 막스. 너 만일 내가 마계수를 소환한 장본인이라 했다면 어쩌려고 했어?”
[…….]그러자 두어 걸음을 옮기던 늑대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당신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두 번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게 해드리려 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태연한 척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둘 다 피 터지게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거다.
그때 저쪽에서 성진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저하아!”
그것을 신호로, 늑대는 가볍게 눈을 박찼다.
성진이 두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늑대는 이미 숲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 * *
“후우…….”
연무장을 나직하게 울리는 작은 한숨 소리.
릴리움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훈련을 멈추고 단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인 로건 황자가, 우울한 얼굴로 아르쥬나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릴리움의 감상은 이러했다.
‘아아, 근심이 가득하신 저 모습! 이 또한 마치 한 폭의 성화와도 같구나!’
황자의 짙은 푸른색 눈은, 범인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고차원적인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제국의 신민들만을 생각하는 저 훌륭한 황자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이리 시름에 잠겨 계신단 말인가!
“분명 해수에게 고통받는 신민들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아니, 신민들의 걱정은 언제나 하시는 것이고. 최근에는 저하께서 마물 전담반의 일도 솔선수범 돕고 계시지 않나? 분명 참혹한 역병으로 희생된 황도의 신민들을 기리고 계시는 것일 게야.”
”그런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저분의 발끝이나마 따를 수 있겠소? 분명 황자님께서는 제국의 머나먼 미래를 생각하며 고뇌하시는 것이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로건이 슬픔 가득한 얼굴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만들고 싶다. 꼬마 성 아우렐리온의 주머니…. 성인의 대머리가 이리도 춥게 느껴진 적이 없건만…….’
‘아멜리아 누님의 꽃잎 자수는 참으로 귀여웠지. 시슬레처럼 레이스 미사포를 사용해도 어여쁠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어떻게 만든다지?’
‘생각할수록 부끄럽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바느질이며 뜨개질 같은 걸 해본 경험이 없다니…….’
아멜리아 누님은 평소 예감이 좋은 분이시지. 그리고 시슬레는 뛰어난 예지 능력까지 있다.
그 두 사람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다. 그러니 로건 역시 그들처럼 이 꼬마조각상에 부족하게나마 정성을 들이는 것이 좋으리라.
무엇보다도, 로건은 두 사람의 것에 비해 자신의 작은 성자가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품속에 넣어두고 있던 나무 조각상을 꺼내어,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성자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였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영감님. 저는 변변한 재주 하나 없어, 당신의 머리에 씌울 작은 고깔 하나도 만들 수 없는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무려 대륙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신세 한탄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릴리움의 성기사들이 바지런히 속닥거렸다.
“성 바스티안의 유지를 잇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성 아우렐리온의 미덕까지도 본받겠다는 뜻일까요?”
“어찌 이리도 훌륭하실까! 참으로 옳으신 생각이 아닌가? 비록 편의상 여러 성기사단으로 갈라져 있으나, 우리는 본래 주신의 뜻을 받들고 그 모든 미덕을 쫓아야 하는 주신의 기사들이 아니겠나!”
그렇게 릴리움 기사들의 수련 시간이 끝난 후.
기사들은 로건에게 겨우 그의 근심에 대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마음 깊이 감동했다.
‘어쩌면 이리도 마음이 따뜻한 분이신가! 수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형제에게까지 이토록 깊은 정을 보이시다니!’
“자네들에게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다니, 이거 참 면목이 없네.”
쑥스러운 듯 말하는 로건을 향해, 릴리움 기사들이 너도나도 외쳤다.
“아닙니다, 저하! 당연히 저희가 도와야 마땅한 일인 것을요!”
“꼬마 성자를 모실 최적의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성자를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최적의 장소?”
로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사들이 약식 갑주 위로 척 손을 올리며 확답했다.
“주신께 맹세코, 꼬마 성 아우렐리온을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성 가득한 장소에 모시겠습니다!”
“황도 어디에도 그 이상 축복이 가득한 장소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믿음직한 릴리움의 기사들을 향해, 로건은 드물게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고맙네! 모자란 내가 자네들 덕분에 한숨을 돌리게 되었어.”
아아, 추종자들에게는 마치 한줄기 주신의 광영과도 같은 성스러운 미소이리라.
그날 저녁, 성 바스티안 교회.
하루를 정리하는 기도를 위해 기도실을 찾았던 웨스커 대주교는, 어딘지 평소와는 다른 기도실의 전경에 움찔 놀라며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곧 기함하고 말았다.
성 바스티안의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웬 작은 대머리 영감님이 떡하니 서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
저게 뭐지?
그녀의 어이없는 중얼거림에, 상급 사제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무래도 성 아우렐리온이 아니신가 하여…….”
“그래. 대체 왜 성 아우렐리온께서 여기에 계신가? 이곳은 성 바스티안의 뜻을 기리는, 교회에서도 가장 축복받은 장소가 아니던가?”
“그것이, 릴리움 기사들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답니다. 부디 모레스 황자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만이라도 작은 성자님을 이곳에 모셔 달라는.”
“릴리움?”
“예, 듣기로는 로건 황자님을 위한 일이라고…….”
그 말 안 통하는 머저리들이!
웨스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같은 시각, 본궁의 집무실.
여느 때처럼 루이스로부터 자녀들의 근황을 보고받은 성황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성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민했다.
‘매일 축성을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내 아이를 위한 정성이 이리도 모자라다니,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