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198)
성황의 아이들-198화(198/469)
§ 198. 루이제 (1)
경비대장, 세바스티안 바텔 경은 여러모로 눈에 띄는 인간이었다.
프란시스 경 못지않은 큰 키에, 건장하게 단련된 단단한 체구.
무인 같지 않은 온화한 낯을 하고 있으나, 그로부터 전해지는 강대한 기세는 실로 성벽처럼 굳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인상적인 인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브루노 단장이 옆에서 슬쩍 일러 주었다.
“저하. 세바스티안 경은 일마 경의 부군입니다.”
뭐? 정말?
성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일마 경도 그렇지만, 이 경비대장 역시 마사인 경에 가까운 무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는 말은 두 사람 다 데카론 나이트을 앞두고 있다는 건데, 그야말로 대륙 최강의 부부가 아닌가!
혹여 두 사람 사이에 부부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온 영지가 들썩거리겠구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알 리 없는 경비대장이 정중하게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백작저에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해서 성진 일행은, 세바스티안 경의 인도를 받으며 지그스문트 백작저에 도착했다.
저택은 영지 북동쪽에 치우쳐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듯, 선이 그다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게 백작저라고?’
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투박한 벽이라든지, 해도 들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창이라든지.
커다란 테라스나 깔끔한 회벽을 가진 황도의 건물에 익숙해져 있던 성진에게, 백작저는 저택이라기보다는 고성이나 요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성 바스티안 교회보다도 오래된 건물이라 들었습니다. 과연, 반세기가 넘도록 마경으로부터 굳건히 대륙을 지켜온 명가의 저택이군요. 대단한 위용입니다.”
마사인이 감탄을 내뱉자, 경비대장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렇게 보신다니 다행입니다. 간혹 다른 지역에서 처음 이곳을 방문하시는 손님들은, 낯선 양식 탓에 실망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차례의 개축 시도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보니 계획 단계에서 무산되는 경우가 대부분. 거기다 대륙에서 유행하는 건축 양식으로는 단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나.
단지 저택 앞에 넓게 펼쳐진 정원만은 황도와 비슷한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기후가 기후인지라, 장미 잎이 죄다 시들어 떨어지고 을씨년스러운 가지들만 남아 있었지만.
바싹 말라붙은 정원을 지나쳐 마차에서 내리자, 성진을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천년의 성국, 델크로스에 주신의 축복을!”
지그스문트 백작가 사람들은 물론, 사용인들까지 총출동한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정성스러운 환대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선두에 있던 우아한 중년 부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영명하신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저하를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
대륙의 먼 남쪽, 아나톨리아에서 시집을 왔다는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이었다.
고운 잔주름이 잡히는 아름다운 얼굴에는, 그야말로 성진 일행을 향한 순수한 반가움만이 가득하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부인. 영지가 바쁜 시기에 괜히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어느 정도는 성진의 방문을 꺼릴 거라 여겼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하자, 부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닙니다. 본래라면 제가 황도에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 걸요. 올해는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탄신연에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따뜻한 지방의 손님이 이리 찾아주시는 것은, 제게는 언제나 큰 기쁨이 되옵니다.”
그때 오르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한데, 어머니. 가주님께서는?”
“아아. 할아버님과 함께 마경의 방비를 나가셨다. 올해는 기온이 낮아, 라이칸슬로프가 예년에 비해 일찍 남하하고 있다는구나.”
“…할아버님까지 말입니까?”
“일마 경이 영지 밖으로 나가 있지 않니. 그러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분께서 경계를 친히 둘러보겠다고 하셨단다.”
제국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빈센트 지그스문트는, 아들에게 작위를 이양한 후에도 정정하게 활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역시 데카론 나이트다 보니 여간해서는 기력이 쇠하는 일은 없으리라.
“최근에는 마경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늘 노래를 부르고 다니셨어. 정당하게 마경에 갈 구실이 생겼으니 그분께도 좋은 일 아니겠니?”
그렇게 덧붙인 백작 부인이 성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경에서 여름을 지낸 라이칸슬로프들이 슬슬 백작령 부근으로 이동하는 시기랍니다. 때문에 부득이하게 가주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나, 대신 제가 저하의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내밀자, 부인이 가볍게 팔짱을 끼어온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발을 맞추어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부인께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부러 가문의 주치의까지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안 그래도 여정 중에 크게 다치셨다고 들어 무척 걱정했사옵니다. 이제는 괜찮으십니까?”
“멀쩡합니다. 그저 다들 염려가 지나친 것이지요.”
“그만큼 저하의 옥체가 존귀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아까는 무척 놀랐답니다. 저하께서는 작년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셨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이리 뵈오니 성황 폐하와 리자베스 황비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러자 성진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봐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름다우신 부인의 에스코트를 하기에는,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어머, 저하도 참! 호호호. 나이 든 촌부의 마음을 이리 설레게 하시는군요!”
그런 그들의 뒤를, 백작가 사람들이며 사용인들이 줄줄이 따라 걷는다.
오직 오르덴을 포함한 성진의 일행만이, 입을 쩍 벌리고 황당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저 자연스러운 대화는?
저 인간이 정말로, 어제까지 눈밭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그 천방지축 황자라고?
“저하께서는 역시 대단하신 분이세요. 저 매끄러운 수작질을 보세요!”
“클로디아 경! 수작질이라니!”
“…핏줄인가? 타고 난 난봉꾼의 자질 같은 건가?”
“쉿! 칼멘 경! 그런 불경한 말을!”
상주기사들의 수군거림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숙부와 로건 황자를 차례로 떠올린 마사인은, 이내 하얗게 질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설마. 저하마저 그럴 리가…….”
* * *
성진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일행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난로를 지핀 듯, 온기가 가득한 호화로운 침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성진에게는 전용 사용인까지 딸려왔다.
“시종 중 가장 뛰어난 아이입니다. 현재 집사 수업까지 받고 있으니, 어지간한 일은 이 아이를 시키시면 될 겁니다.”
집사가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소년 하나를 데려와 그렇게 소개했다.
“루이제 바텔입니다, 저하.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는 딱 모레스의 또래로 보였는데, 나이에 비해 대단히 침착하고 진중해 보였다. 성진에게 고개를 숙이는 절도 있는 모습이, 시종보다는 오히려 기사에 어울리는 소년이다.
내심 융통성 없는 에디스가 백작가에서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불안했던 성진은,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되었다.
“그래, 나도 한동안 잘 부탁하네.”
그렇게 인사를 건넨 성진은, 어딘지 묘한 기시감에 소년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니까…….
“흠, 우리 어디선가 보지 않았나?”
“…네?”
소년은 일순 당황한 듯 보였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고개를 저였다.
“저는 아직 영지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하께는 이곳에서 처음 인사드리는 것으로 압니다.”
하긴 그렇겠지.
무심코 질문을 내뱉은 성진이, 오히려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하네. 아무래도 초면임이 분명한데, 오늘 참 여러 번 이런 느낌을 받는단 말이야.
“…그런데, 바텔이라고?”
성진이 반문하자, 루이제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마도 이곳에 오시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신 모양입니다. 제 아버지는 지그스문트 백작령의 경비대장인 세바스티안 바텔입니다.”
“뭐?”
의외의 정보에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성진이 재차 물었다.
“잠깐만. 그럼 자네는 설마 일마 경의…….”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일마 바텔의 여식입니다.”
…여식?
성진은 경악했다.
‘완전 남자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마왕 놈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라는 거야? 딱 보기에도 여자애 같은데? 눈이 좋은 놈이 이상한 데서 둔하네.]어, 호리호리한 것이 단순히 어린 소년이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루이제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점심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식당으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루이제가 담담하게 다음 일정을 알려왔다.
일마 경과 경비대장 세바스티안 경의 딸.
과연,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느낌이 들 수밖에. 소녀는 부모 양쪽을 골고루 닮아 있었으니까.
시원한 이목구비며 절도 있는 자세는 일마 경을, 옅은 아마빛의 머리카락과 차분한 눈동자는 세바스티안 경과 완전히 똑같았다.
“아니면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따뜻한 목욕물을 올리겠습니다.”
“어, 아냐. 지금 식당으로 가지.”
성진은 두터운 방한복을 벗어 루이제에게 넘겼다.
한데 그녀가 옷을 넘겨받는 그 찰나의 순간, 눈썰미 좋은 성진의 눈이 그녀의 손에서 보이는 특이 사항을 발견했다.
‘…검술을 익혀?’
길쭉한 소녀의 손에는, 오래 검을 잡은 자 특유의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녀의 부모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그래도 지금 집사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성진은 의아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고 루이제를 따라 방을 나섰다.
웡웡웡!
루이제를 따라 1층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러 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를 키우나?”
그러자 힐긋 창밖에 시선을 준 루이제가 설명했다.
“백작님께서 기르시는 사냥개들입니다. 마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군요.”
“그래?”
그러고 보니, 헤르만도 그랬지. 마경을 접하고 있는 지그스문트령에서는, 사냥개들의 능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고.
그렇다 보니 아예 백작저에서 전문적으로 사냥개들을 기르고 훈련시킨다고 한다. 뛰어난 사냥개의 혈통을 관리하고, 일부는 늑대와 교배를 시켜 늑대개를 얻는다 했다.
웡웡!
우우우우.
누군가를 찾는 듯한 긴 하울링.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은, 어쩐지 묘한 예감에 루이제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지금 사냥개들을 구경해 볼 수 있을까?”
순간 그녀의 얼굴에 옅은 당혹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회중시계를 꺼내 잠시 시간을 가늠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후원을 거쳐 본관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사육장이 가까우니 둘러보시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방한복을 가져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오러를 쓰면 되니까.”
잠깐이라면야 수고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런데 막상 성진이 추운 후원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두두두두.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정원을 가로지르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
어어?
전혀 적의가 없어 방심하고 있던 성진은, 순간 육중한 개의 무게에 휘청이다가 우당탕 바닥으로 넘어졌다.
“저하!?”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진의 얼굴에 축축한 것이 닿아왔다. 기세 좋게 성진을 깔아뭉갠 개가, 마구 그의 얼굴을 핥기 시작한 것.
놀란 루이제가 재빨리 손을 휘저어 개를 성진에게서 떨어뜨린다.
‘이건 또 뭐야.’
황당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이놈의 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이제는 붕붕 꼬리를 흔들며 성진의 주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막스, 막스!”
곧이어 사육사로 보이는 노인 하나가, 허둥지둥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막스! 너 이놈! 갑자기 그렇게 달려가 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막스?
그러자 막스라고 불린 개가, 노인을 향해 뭐라고 하듯 낮게 짖었다. 꼭 그를 나무라는 것처럼 보였다.
웡웡!
‘막스라니, 우연인가…….’
그런데 기분 탓인지, 정말로 개의 외양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전체적으로 늑대를 닮은 모습. 짙은 잿빛의 등과, 회갈색으로 옅어지는 옆구리.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양 볼과 배의 털.
…설마?
“…막스?”
성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개를 불렀다.
그러자.
웡!
마치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 개는 그렇게 크게 짖고는 바닥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막스? 진짜로? 그런데 왜 말을 안 하고…….”
성진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개가, 곧 축축하게 젖은 혀로 성진의 코와 볼을 핥아온다.
이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저 활발하기만 한 똥강아지.
성진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막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너, 어쩌다 이렇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