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
성황의 아이들-20화(20/469)
020. 폐관 기도 (2)
마왕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온몸에 오러가 충만한 감각에 취해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놈의 기척이 전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끔 아무 말 없이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조용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아니, 아침부터 없었던 게 맞나?’
어제저녁에는 어땠나. 오러 폭풍에 휘말린 후 비몽사몽 간에 진주궁에 운반되어 그대로 쓰러져서 아침까지 잤다.
그때 마왕이 있었나?
‘어, 잠깐만. 걔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 게 언제였지?’
성진은 오러 폭풍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던 마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런 미친! 여기서 더 쏟아부을 생각이야!
– 끄아아아아아아아!
설마, 설마 그게 마지막이었나?
성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그때 성진의 의식이 지구로 날아가 버렸던 것처럼, 마왕도 어딘가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던가.
아니면 혹시나 만에 하나 싶은 가정이긴 하지만, 그 강력한 폭풍 속에서 하찮은 마왕의 영혼이 그대로 소멸해 버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 떠내려갔다면 그놈을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근데 내가 걔를 굳이 찾을 필요가 있나?’
이세계에 단둘만 날아왔다 보니 나름의 동지 의식도 생겨서 두고 보고는 있지만, 둘은 원래 철천지원수지간이다. 이대로 없어져 버리면 서로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잠시 굳은 얼굴로 생각하던 성진이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아, 몰라. 이 몸을 멀리 떠나지 못한다고 했는데, 혹시 살아남았다면 곧 돌아오겠지.
* * *
평소보다 느지막한 시간에 연무장에 도착한 성진은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다. 그가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기사들 대여섯 명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일제히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3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목소리 한번 우렁차다. 뭐지? 순간 본궁 근위대를 보는 줄 알았네.
성진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지만, 틀림없는 진주궁의 상주기사들이다.
얘들이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들 이래?
“저하! 오셨습니까!”
저쪽에서 마사인 경이 상큼한 얼굴로 걸어온다.
본능적으로 이 변화가 저 인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성진이 물었다.
“마사인 경? 이들은?”
“네, 저하. 기강이 해이해져 있기에 어제오늘 정신 훈련을 좀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곁에서 저하를 보필하는 데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마사인이 밝은 얼굴로 덧붙이자, 각 잡고 있던 상주기사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그러고 보니 성진에게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사인 경이 연무장에 나타나자 기사들이 모조리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더랬지.
당시는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마사인 경은 보기보다 기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모양이다.
성진은 조금 딱한 생각이 들어 상주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감히 황자님을 향해 불손한 모습만 보이던 괘씸한 놈들이었지만, 지난 이틀간 얼마나 굴렀는지 벌써부터 면면이 꺼멓게 죽어간다. 그 불쌍한 꼴을 보고 있자니 미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흠, 마사인 경. 본궁 근위대 일도 하고 내 검술까지 봐주는데, 상주기사까지 관리하는 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마사인 경은 단호했다.
“상주군은 여기저기서 차출되기는 하지만 소속은 근위대입니다. 저의 책임하에 있는 자들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 그래…….”
눈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져 가는 상주기사들을 향해 성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들 하지 그랬나.
한 번 오러를 느끼기 시작하자 수업은 일사천리였다.
마사인에게 축기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명상을 하던 성진은, 곧 단전 부근에 좁쌀만 한 오러 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정하려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여기저기 빠져나가던 오러들이, 일정량을 채우는 순간 갑자기 동그랗게 뭉치며 안정을 찾았다. 아직은 소량이긴 하지만 오러들이 핵을 중심으로 조금 더 활발하게 회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 전체에 고르게 퍼져서 흡수되는 마물의 정기와는 확실히 다른 성질이긴 하구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핵 주위로 오러의 첫 번째 층까지도 쌓아올릴 수 있었다. 핵보다 안정시키기 어려웠지만, 오러는 결국 포도알만 한 크기의 공을 만들며 단전에서 매끄럽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 단번에 오러 층까지 만들어 내다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전까지 헤매던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군요.”
무엇보다도 그의 성과를 기뻐한 것은 마사인이었다.
“이제 부단히 층을 쌓는 일만 남았습니다! 물론 근육과 골격에도 오러가 축기됩니다만, 이는 오러를 오랜 세월 운용하면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오러 핵에 층을 두르는 것만큼 폭발적인 힘을 낼 수는 없죠.”
제대로 검술 식에 엮어내려면 최소한 3개 층은 쌓으셔야 할 겁니다, 하고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모처럼의 성과에 신이 난 성진이 바로 2층까지 시도하려 하는데 마사인이 고개를 저었다.
“2층을 쌓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핵을 만드는데 드는 힘이 1, 첫 층을 만드는데 드는 힘을 대충 3이라고 본다면, 다음 층을 쌓을 때는 적어도 10에 가까운 오러를 단번에 끌어모아야 하니까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층을 형성하는 것보다, 층끼리 반발하는 힘을 상쇄하는 데에 훨씬 많은 오러가 필요하다고 한다. 층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 반발력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기사의 정점. 오러 10층의 기사 데카론 나이트 정도 되면, 1층에 비해 반발력만 거의 수백 배에 이르게 된다나.
“따라서 오랜 시간 명상을 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오러를 운용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빠른 속도이니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하시지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하고 마사인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하께서 연공에 한창 열중하시는 데 방해하는 듯하여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본궁을 방문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의 말로는 오늘 성황의 공식 일정이 모조리 취소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이야 그가 멀쩡히 잘 있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후원이 박살나고 성황이 탈진으로 쓰러졌던 사건이었다. 아무래도 황자가 너무 늦지 않게 병문안 정도는 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도 좋다나.
그러잖아도 어제 마지막으로 본 것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모습이었던 터라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단지 성황 폐하씩이나 되시니 알현 약속 없이 막 방문하기는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말했더니 마사인 경이 피식 웃었다.
“아마 중요한 사람들은 이미 병문안을 마쳤을 겁니다. 기세 좋게 일정을 뺐는데 반갑지도 않은 사람들 문안 인사받느라 쉬지도 못했을 터이니 폐하도 참 딱하시지 않습니까. 황자님이라도 잠시 얼굴 비추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사인에게 목검을 내밀었다.
앞으로 수련할 시간은 많을 터였다. 그나마 이렇게 오러 축기가 가능해진 것도 전부 성황의 덕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가슴 쪽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지금도 찰랑찰랑하고 뭔가가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목검을 받아드는 마사인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웃느라 둥글게 휘었던 눈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미소를 그리던 입가가 씰룩씰룩 떨리고 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저는, 두 분이 다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
웃는 건지 일그러진 건지 모를 표정 그대로 말을 삼키던 마사인은, 성진이 뭔가 묻기도 전에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주기사 중 둘을 지목했다.
“너와 너! 저하를 본궁까지 호위하도록. 나머지는 지금부터 연무장을 돈다!”
예에에?
기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지자, 마사인이 호통을 쳤다.
“어제는 호위도 따라붙지 않고 황자님을 본궁에 홀로 보냈다지? 너희들이 그러고도 자랑스러운 델크로스의 근위대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그 덜떨어진 정신머리부터 뜯어고쳐 주마!”
으아아아아.
기사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성진은 조용히 속으로 애도를 전했다.
* * *
성황은 모든 방문객을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받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성진이 도착했을 때, 응접실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오오, 모레스 황자님! 어쩜 이리도 헌앙하신 자태이신지! 신성 제국의 미래에 더없는 광영이 깃드는 듯합니다!”
수석 시종장 루이스는 한바탕 거창한 찬사를 늘어놓은 다음 슬쩍 귀띔을 해 주었다.
“…황후마마께옵서 드셔 계십니다.”
성황이 업무를 비우는 일이 생기면, 보통은 황후 타티아나가 그를 대신해 공식 일정을 수행한다고 루이스가 설명했다.
열린 응접실 입구로 다가가니 조곤조곤한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는 어찌하면… 로한의… 항의를…….”
“…비공식적인… 일일이… 필요는…….”
“…문제의 소지… 탄신연까지… 주의…….”
루이스는 열려있는 응접실의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며 고했다.
“성황 폐하, 황후 마마. 모레스 황자님께서 드셨습니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두 사람은 동시에 성진을 돌아보았다.
“어머!”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황후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살짝 처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황자! 잠시 뵙지 못한 사이에 몹시도 훌륭해지셨습니다. 리자베스가 얼마나 기뻐할지!”
딸그락. 뒤를 이어 조금 거친 소리를 내며 성황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살짝 눈이 커진 것 외에 표정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았는데, 성진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미미하게 떨리는 성황의 동공을 알아챘다.
잠깐만?
당신이 제일 놀라면 어쩌자는 거야?
왠지 모를 배신감에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아프신 분을 제가 너무 눈치 없이 업무 이야기로 붙잡고 있었나 봅니다. 저는 이만 일어날 터이니 두 분이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럼 뒷일을 부탁하지, 타티아나.”
“네 폐하. 부디 탄신연이 가깝다는 것만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더니 물이 흐르듯 우아한 동작으로 사뿐사뿐 성진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큰 키에 학처럼 고아한 인상의 미녀였다. 물방울처럼 살짝 처진 눈꼬리에 관성적인 눈웃음을 달고서, 황후는 성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이리 건강해진 황자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폐하의 심려가 얼마나 크셨던지요. 그래, 듣자 하니 기억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지요?”
“네, 뭐…….”
적절한 예를 잘 모르기도 하고, 그냥 뚱한 얼굴로 대답했더니 황후가 살포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자께서는 연연하지 마시고 보중하십시오. 과거는 그저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모두가 기뻐할 테지요.”
“……?”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왜 뭔가 돌려 까이는 느낌이지?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성진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자, 황후는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녀는 어쩐지 서늘해진 성황의 눈을 일별하더니, 우아하게 절을 해 보인 후 응접실을 떠났다.
“…….”
“앉거라.”
성황이 턱 끝을 까딱하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성진은 황후에 대한 조금 찜찜한 기분을 뒤로 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쁘신데 괜히 방해한 건 아닙니까?”
“아니, 마침 잘 왔다. 내일부터 당분간은 알현이나 공식 일정이 없을 거라,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 테지.”
“네? 설마 장기 요양이 필요할 정도입니까?”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시는데.
성진이 의아해하고 있자니 성황이 고개를 저었다.
“곧 기도실에 들어갈 생각이다. 겸사겸사 조금 일찍 업무를 인계했을 뿐이야.”
“기도실이요?”
“…그것도 기억에 없는 것이군.”
성황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간혹 기도를 위해 수일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동안 황후에게는 공식적인 일정을, 의회의 의장과 집행부 부장을 맡고 있는 추기경들에게도 각각 권한을 위임하고 폐관에 들어간다나.
본궁의 심처에는 성황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기도실이 있어, 그가 들어가 있는 동안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도록 성기사단에 의해 문이 봉인된다고.
신정일치 국가라더니, 국가의 수장이 무려 폐관 기도도 하는구나.
이전 세계에서도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성진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요? 제국을 위한 겁니까? 그거, 효과가 있습니까?”
주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성황에게 하기에는 좀 독신적인 질문인가 했는데, 그의 대답은 예상외로 쿨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리 믿지 않겠느냐.”
공식적인 땡땡이라는 말이구나.
아닌 게 아니라 편안한 차림으로 찻잔을 들고 있는 성황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늘 구색으로 걸치고 다니던 법복마저 없으니 그야말로 휴가 중이라는 느낌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오러 연공에 진척이 생긴 모양이로군. 아직은 1층인가.”
성황의 눈이 자신의 단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성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인간, 정말로 오러나 뭔가가 눈에 보이는 모양인데.
“네, 아버지 덕분에 마침내 오러 층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궁금한 것.”
“네, 제 몸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오러를 감지하게 된 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 적어도 어제의 그 사건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성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흠…….”
성황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짐작 가는 것이 없지는 않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이 드물게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너도 알겠지만, 오러는 사람의 신체를 회복시키고 몸을 이상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진도 마사인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바 있었다. 오러가 몸을 타고 흐르다 보면 신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다고.
단지 그건 일생에 걸쳐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러 총량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설명으로는 그랬다. 매일 오러를 운용한다고 해도 평생 신체에서 흡수하여 운용하는 양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 충분한 양의 오러만 공급된다면 신체의 변화 또한 급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어제 제 몸을 지나쳐 간 오러의 양이 인간이 한평생 굴리는 오러 양을 능가한다는 말입니까?”
성진이 입을 쩍 벌렸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