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0)
성황의 아이들-200화(200/469)
§ 200. 루이제 (3)
병문안을 온 후배 놈이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셔서 천만 다행입니다.
뻔뻔한 놈의 말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대참사가 일어날 몸 상태임을 자각한 성진은, 곧 즉각적인 응징을 포기하고 병상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저 새끼를 진짜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나저나 선배는 정말 대단하시네요. 누가 거길 걸어서 복귀할 거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옆에 걸터앉은 후배가, 지극히 무해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억거린다.
-개새끼야. 쿨럭!
무심코 대꾸하자, 기침과 함께 점점이 작은 핏방울이 튀었다.
쿨럭쿨럭.
그래도 지독한 기도 화상을 입은 것 치고는 양호한 편이다. 인공호흡기의 도움 없이, 코에 작은 산소줄 하나로도 어느 정도 버틸 만했으니까.
-이게 다 네놈 때문 아냐! 쿨럭! 관제탑에서 복무도 했다는 놈이, 어떻게 리마(LIMA)와 로미오(ROMEO)를 헷갈리냐? 미친 새끼.
잘못된 지령 덕분에 성진 혼자 작전지대를 벗어나, 파이어 캐터필러 둥지 한가운데 고립되어 버린 게 아닌가.
파이어 캐터필러는 맹독을 뿜어내는 마물이었다. 순간의 기지와 극도의 집중력으로 겨우 상황을 모면했지만, 본래라면 고립된 즉시 독무에 휩싸여 한줌 핏물이 되었을 터.
후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동안 성진의 곁에 머물며 순순히 병수발 드는 시늉을 했다.
-전부터 가끔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선배는 짬밥 하나를 드셔도 참 고상한 척하신단 말입니다. 지난 이틀간 물 한 모금 못 드신 거 아닙니까?
모처럼의 환자식을 부지런히 먹고 있는데, 옆에서 물을 떠다 나르던 후배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성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선배의 그 매사 젠체하는 태도 말입니다. 그건 자존감이 낮은 걸 감추려 하는 일종의 보상 심리 같은 겁니까?
-뭐?
-극도로 허기가 지면 사람이 망가질 법도 한데, 참 예절 지킬 거 다 지켜가며 드신다 싶어 그렇습니다. 그건 어쩌다 생긴 버릇입니까?
성진은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정신 빼놓고 지령을 읊더니, 이제는 사람 밥 먹는 걸로 시비를 다 거네?
본래라면 냅다 뒤통수를 갈기고 끝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씹을 때 소리 내지 마라. 젓가락질 제대로 해라. 그냥 평범한 가정교육 아냐? 대체 뭐가 문젠데?
-…네?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듯, 후배는 잠시 멍청하게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미심쩍은 표정으로 재차 물어온다.
-지금 그거 진심이십니까?
-진심이 아니면?
뭐? 왜? 뭐?
젓가락을 움직이며 뚱한 얼굴로 놈을 노려봐 줬더니, 후배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갑자기 병실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선배가요? 가정교육이요? 아하하하!
배를 잡고 폭소하던 놈은, 급기야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나 심하게 웃었는지 이제는 숫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지금 병문안을 온 거야, 사람 약 올리러 온 거야?
-하하하. 최근에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웃겼습니다. 마지막에 유쾌한 기억 남겨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건 진심이에요.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까, 겨우 몸을 추스른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네. 슬슬 인사를 드려야죠. 진작 이렇게 직접 움직였어야 했는데, 요행만 바라고 있었으니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놈은 전투화 끈을 고쳐 매고,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가다듬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님, 그거 아십니까? 어차피 이 세계는 곧 멸망합니다. 조만간 모두가 죽을 거고, 그건 필연적인 사실이에요.
그러더니 후배 놈은 오른쪽 눈을 부산하게 깜박이며, 남은 한쪽 눈으로 뚫어져라 이쪽을 응시해 왔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살아 계십니까? 이제는 다 부질없는 일인데, 그렇게 아득바득 버티면서 대체 뭘 기다리고 계신 거죠?
성진은 놈의 그 버릇이 어떨 때 나오는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왼쪽 약시. 사냥감을 바라보는 징크스.
너 이 새끼, 당장 눈 깔아라.
지금 이게 누구를 그딴 식으로 쳐다보는 거냐!
반사적으로 익숙한 검의 위치를 더듬던 성진은, 문득 휑하니 비어있는 허리춤을 깨닫고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어?
호두까기가 없어? 어째서?
* * *
헉!
번쩍 눈을 뜬 성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호두까기!’
정신이 들자마자 그는 허둥지둥 허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익숙한 위치에 있는 검대와 힐트를 확인한 성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뭐야. 놀랬잖아.’
쿵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과 함께 서서히 현실감이 찾아온다.
‘전부 꿈이었나…….’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아까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지던 온몸의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지글거리던 기도의 작열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긴, 벌써 십여 년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맥이 탁 풀린 성진은 자리에 누워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지?’
올려다보니 대단히 낯선 천장의 모습이 들어온다. 성진이 누워 있는 곳은 정말 손바닥처럼 작은 방이었다.
‘…델크로스에 이런 곳이 있었나?’
원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밝은 조명이 쏟아져 내리고, 천장과 벽을 뒤덮은 수수한 파스텔 톤의 벽지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꿈이라도 꿨더냐? 그냥 그대로 누워 있거라.]이제는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차분한 목소리.
흠칫 놀란 성진이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방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성진이 누워있는 작은 침상과 사이드 테이블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작은 책상이 다였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 성황이 서 있었다.
평소 걸치고 다니던 법복도 없이 가벼운 평상복 차림을 한 그가, 몇 개 없는 책을 뒤적거리며 여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책이라도 읽어 볼 테냐? 그 차의 효과가 완전히 끝나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소요될 듯하구나.]…약차!
그제야 번뜩,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성진의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지그스문트 백작 부인이 내준 약차를 마신 후, 뭔가 증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성진은 곧바로 성황을 호출하려 했었지.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은, 루이제가 성진의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었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성황이 온다면 분명 샤론 경의 몸을 빌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야, 마왕아? 듣고 있냐? 그동안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급히 마왕 놈을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대신 성황이 책 한 권을 골라내더니, 느긋한 걸음걸이로 성진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그것을 불러도 지금은 듣지 못할 게다.] […예?] [이곳은 외부의 모든 사념이 단절되는 공간이니라. 그러니 이곳의 사념 역시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한단다.]마왕의 사념조차 단절되는 공간. 귀가 아니라 마치 머릿속을 울리듯 직접 전해지는 성황의 목소리.
생각을 거듭하던 성진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은 현실세계가 아니군요.]그러자 성황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글쎄다.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그리고 그는 침상 끝에 걸터앉아 가만히 성진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하지만 이곳이 델크로스 차원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현실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 이곳은 새로 만들어진 염상차원이다.] [염상…….] [그래. 사방에서 쏟아지는 사념들을 완전히 차단할 방법이 그 외에는 달리 없었느니라.]성진은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다 경악했다.
잠깐만, 이 양반이 지금 사념을 막겠답시고 작은 차원 하나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야?
‘신의 대리자 정도 되면 차원 하나둘 생성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건가?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정말 아무런 대가도 없을 리가?’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지 성황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한 것 같기도 하고.
[괜찮으신 겁니까? 혹시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신 건 아니죠?]성진이 걱정스럽게 묻자, 성황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무리? 왜 그리 생각했느냐?] [안색이 좀 나빠 보이시는데요?] […….]그러자 성황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조금은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아니다. 그저 이곳이 썩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서 그리 보인 모양이구나. 어차피 다 지난 일들이니 마음 쓰지 말거라.]하긴, 이렇게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염상이 만들어지려면, 아무래도 시전자의 기억이 토대가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 기억이란 것이 늘 좋은 것만 있진 않겠지.
[죄송합니다, 아버지.]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의 의도야 어찌 됐건, 일단 약차를 제 손으로 마신 것은 사실이니까.
그 당시에는 상황을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온 사방에서 환청이 들리는 기현상이 나타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역시나 어느 정도는 사정을 짐작하고 있는 듯, 성황은 고개를 들어 성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만하구나. 너도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한 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로페룸의 알이 일부 원료라고는 해도, 오르덴이 입수한 공정 과정을 들어보면 그 함유량은 극히 미약한 것.
벌써 수년째 지그스문트 영지에서 약차가 돌고 있지만, 뚜렷한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모두가 최근의 일들이 아닌가.
설사 한 잔을 마셨다고 그런 지독한 환청에 시달릴 줄이야.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사념들을 막기 위해 차원을 새로 만들었다고……!’
그렇다면 아까 들은 것들이 환청이 아니라는 건가?
그것들이 모두 실존하는 사념들이란 말이야?
순간 성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약차와 로페룸의 알. 회색 역병과 사념을 수신하는 기관. 헛소리를 하며 서서히 미쳐가는 지그스문트령의 사람들.
‘약차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게만 빠르게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어쩐지 기분 나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성진의 복잡한 표정을 가만히 살피고 있던 성황이, 때를 맞춰 넌지시 일러 주었다.
[너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 지그스문트령에서 유통되는 약차는 분명, 오래 복용한 자의 머릿속에 극히 낮은 확률로 염상 결정을 만든단다.]오래 복용하면, 낮은 확률로.
그리고 이어진 성황의 다음 말에, 성진의 불안감은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미 있는 것을 자극하는 데에는 소량의 약차만으로도 충분하겠지.]성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그러니까 저는 본래…….]아니, 내가 아니지.
입고 있던 익숙한 전투복과 두 주먹에 감긴 너덜너덜한 밴디지를 확인한 성진은, 입술을 깨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허리에 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검대와 호두까기 역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염상세계.
강한 사념이 실체를 만들어내는 공간인 것이다.
[모레스는-]성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선천적으로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는 본래 쌍둥이들과 같은 영능력자였습니까?]문득 성황의 시선이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높이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성진의 가슴에 깊이 사무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