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1)
성황의 아이들-201화(201/469)
§ 201. 루이제 (4)
모레스는 처음부터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물음에, 성황은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성진을 보더니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그 작은 머리로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네?] [그래, 아들아. 네 짐작이 맞느니라. 너는 처음부터 염상 결정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매번 활성화되지는 않았다만, 간혹 헤르나나 가데스와 작당하고 장난을 칠 땐 잘도 채널링을 써먹더구나.]뭐? 아들?
순간 성진은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 양반이 진짜……!
벌떡 침상을 박차고 일어난 성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는 성황을 향해 외쳤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모른 척하실 겁니까?]지난 수개월간 마치 목을 꽉 움켜쥐기라도 한 듯 걸려있던,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했던 의문.
그것이 마침내 물꼬를 트자, 그간의 불안감과 의구심, 그리고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어째서 아직도 절 아들이라고 부릅니까? 성황 폐하. 당신에게는 지금 제 모습이 보이지도 않습니까?]거울을 보지 않아도 성진은 현재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피부에 닿아오는 대기의 감촉만으로도 얼굴의 세세한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으니까.
헌터가 되어 마물의 정기를 흡수하기 시작한 이후 수십 년간, 단 한 치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거 아십니까? 이래 봬도 전 나이가 아주 많습니다! 아마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실은 당신이 내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나이다.
아니, 나이를 몰라도 마찬가지지.
딱 액면가만 놓고 봐도, 지금의 내가 댁의 형님 아니냔 말이야!
[왜……!]그리고 마침내, 성진의 입에서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왜 진짜 아들을 찾지 않습니까?]두근.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굳게 닫혀있던 빗장들이 하나씩 열려간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저 멀리 차원의 경계에서도 절 찾아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 같은 악령이 아들의 몸을 차지한 걸 빤히 보면서도 모른 척하는 겁니까?]두근.
점점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이 마치 문을 두드리듯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무감해 보이는 성황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가신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번 쏟아낸 말들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혹시 그건가요? 진짜 모레스의 영혼을 찾을 때까지 이 몸을 살려둘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럼 그냥 저에게 그렇게 사실대로 얘기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원하시는 대로 고이 돌려드릴 테니까요!]그래. 지금이라면 아직은, 아직은 돌려줄 수 있다.
당신이 더 이상 이 몸에 미련이 생기도록 만들지만 않는다면.
두근두근두근.
이것은 그저 자신의 맥박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다른 뭔가의 몸부림인가.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는 순간 단숨에 터져 나올 이것을, 그냥 쏟아내야 할지 다시 억눌러 걸어 잠가야 하는지 성진은 판단할 수 없었다.
[제가 아무리 악령이라도 새파란 어린애의 몸을 빼앗을 만큼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괜한 가족 놀음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서로에게도 좋을 겁니다! 당신은 정말 이대로 괜찮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누님이나 로건 그리고 마사인 경은 또 무슨 죕니까!]감정이 고양되는 동시에 사고가 급격하게 가속된다.
화악.
의식이 확장되며 좁은 방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성진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성황을 보는 동시에, 멀리서 그를 향해 소리 지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관조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이게 뭔지 알고 있다.
분명 언젠가 이런 감각을…….
[진정하거라.]툭.
갑자기 머리를 건드리는 가벼운 손길에, 흠칫 놀란 성진이 일순 생각하기를 멈췄다.
어, 잠깐만, 잠깐만! 지금 뭔가가.
툭.
미처 그 감각을 낚아채기도 전에, 재차 성황이 성진의 머리를 두드렸다. 찬물을 끼얹은 듯 서서히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툭 툭 툭.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토닥임은, 성진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그의 사고가 마구잡이로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며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너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직은 네가 그곳에 이를 필요가 없느니라.]정신을 차려보니 성진은, 마치 오랜 시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진을 향해, 성황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모레스.]이 양반이 아직도……!
울컥 치솟는 반항심에 성황의 손을 치우려던 성진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시야가 그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라?
성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의 양손을 들여다보았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지만, 분명 기억 속 자신의 손보다는 작고 어린 손이다.
분명 모레스의…? 이게 대체?
[모레스.]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로, 성진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래. 이곳은 염상세계. 혹시 이 양반이 내 모습까지도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들아.] […네.]계속해서 재촉하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대답했더니, 성황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성격에 참 오래도 참았겠지. 그간 영문을 몰라 무척 답답했으리라는 것을 내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를 생각해 보았느냐? 너는 어째서 진작 내게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왜 그랬냐고?
그야, 처음엔 의미 없이 퇴마당하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는 복잡하게 생각하기가 귀찮았지.
게다가 모레스의 행방을 걱정할 성황가 사람들을 생각하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그것뿐일까?’
머릿속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의구심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그럼, 왜 이제야 비로소 그 의문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겠느냐?] […….]복잡한 심정으로 성황을 올려다보자, 그는 마지막으로 부스스 성진의 머리를 흩뜨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건 지금 네가 어설프게나마 델크로스의 차원을 벗어났기 때문이니라. 한 세계에 온전히 속하기 위한 조건과 제약에 대해, 아마도 너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거겠지.] […조건과, 제약?]성진이 완전히 진정된 것을 확인한 성황은, 천천히 침상에 걸터앉으며 내려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 마침 잘 되었다. 너에게 지금 내가 막 만들어낸 이 염상차원에 대해 설명해 주마.]갑자기 맥락을 벗어난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성진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그 설명의 끝이, 성진의 의문과 맞닿아 있을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재앙]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단절시켜 파괴하기도 하고, 또한 모든 것의 경계를 무너뜨려 뒤섞어버리기도 하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었지. 심지어 그 재앙은, 때때로 차원을 넘나들기도 하는 강한 사념들까지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들곤 했단다.]휘리릭.
책장을 성의 없이 넘기며 말을 이어가는 성황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래서 한 오만한 자가 이런 발상을 하였다. 혹시 재앙으로 경계를 완전히 뒤덮는다면,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영능력자들까지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영능력자들을요?] [그래.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계획은 성공했다. 아무리 강한 사념이라도 [재앙]의 장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지. 많은 영능력자들이 그의 손에서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탁.
책을 소리 나게 덮은 성황은 가만히 성진을 마주 보았다.
[이곳은 그 장소를 비슷하게 흉내 낸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재앙만이 존재하는 어설픈 차원이지. 변변한 물리 법칙도 또 제대로 된 실체조차도 없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너와 나는 영혼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불안정한 몸을 가지게 된 거란다. 소리를 만들 성대와 이를 전달할 대기조차 어설프니, 대화는 오직 사념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지.]그의 설명을 곱씹고 있던 성진은 문득 생각했다.
그런 장소가 어떻게 성황의 기억에 이리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걸까.
[그런데 모레스. 이 차원을 만든, 차원의 왕인 내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단다.]성황이 책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차원에는 종이가 없지 않은가. 종이를 만들 문명이 없으니, 어쩌면 이 책은 실은 석판으로 이루진 것이 아닐까.]순간 그의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진 책이.
쿠웅!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세게 내리찍었다.
[……!]방금, 책이 돌로 변한 건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 책은 387페이지의 분량에 해당하는 역사서더구나. 그러니 저 책을 이루는 돌판도 정확히 387페이지가 되어야 하겠지.]끼이이이.
갑자기 책이 바닥에서 들썩들썩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성진은 그 광경을 경악하여 바라보았다. 장장 387개에 달하는 석판이, 작은 책 한 권에 욱여넣어지기 위해 부서지고 망가지며 끊임없이 압축되는 광경을.
[그런데, 또 이런 의심이 들더구나.]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썩이는 책을 내려다보는 성황의 얼굴은 지극히 무기질적으로 보여, 일순 성진은 그가 저 책처럼 돌조각으로 변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차원에 기록할 역사가 존재하나? 이를 새길 돌은 또 제대로 존재하나? 어쩌면 저 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부들부들.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책은 이제, 그 압축되는 힘을 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한 뼘가량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너무나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부피에, 작은 방이 무너질 듯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위험하다!’
성진은 이 무서운 장난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예감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그때.
퍼억!
일시에 책이 소멸하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때맞춰 책을 감싸 쥔 성황의 손 역시 같은 꼴이 되었다.
촤아악!
오른팔이 팔뚝째 날아가며 핏빛 보라가 방 안에 흩뿌려진다.
[아버지!]기겁한 성진이 달려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그런데 성진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몸을 지탱한 채, 성황은 덤덤한 얼굴로 이딴 소리나 주억거리고 있었다.
[봤느냐? 차원의 왕이 내뱉은 섣부른 언사가, 의도치 않게 이 훌륭한 역사서의 운명을 완전히 뒤틀어 버렸구나.]빠직.
성진의 이마에서 핏대가 솟았다.
[지금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할 때입니까? 빨리 신성력으로 이걸 좀 어떻게 해보세요!]성진은 급한 대로 침구를 끌어다 성황의 팔을 둘둘 감으며 지혈을 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이불이 피로 흥건히 젖어든다.
[…그런데 문득 또 이런 의문이 드는구나.]아니, 대체 뭐가 또 궁금합니까?
잔말 말고 당장 이것 좀 어떻게 해보란 말입니다!
[물리 법칙은 물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떠한 힘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곳에, 과연 신성력이라는 힘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이 양반이……!
성진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릴 하면 어쩝니까? 있습니다! 신성력은 당연히 있어요! 아버지가 계신 곳에는 항상 그 힘이 존재합니다! 아무렴, 의심할 걸 의심하라고요!]그런데 다량의 출혈로 창백해진 양반이 힘없는 목소리로 또다시 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신의 대리자임에 틀림이 없지. 신의 대리자란 곧 세상에 주신의 축복인 신성력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자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단다. 그렇다면 나는 뭘까? 신성력이 없는 곳에 과연 내가 존재할 수는 있을까?]…설마?
성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성진의 불길한 예감은 곧 사실이 되었다. 성황의 몸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마치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듯 발치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혼비백산한 성진은, 혹여 완전히 사라질세라 와락, 그의 남은 한 팔을 움켜쥐고는 정신없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전 아버지 아들 맞습니다! 정말입니다!] […….] [절 아들이라고 마음껏 부르십시오! 모레스라고 부르세요! 아니, 그냥 제가 아예 처음부터 모레스입니다! 네! 아무렴요!] […….]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툭.
갑자기 달래듯 머리 위로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툭 툭 툭.
‘…오른손?’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성황은 어느새 멀쩡한 얼굴로 성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비롯한 그의 몸은 이미 말끔하게 재생되어 있고, 심지어는 벽지에 튄 핏방울 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열 받으리만치 침착한 목소리.
[그래, 참으로 바람직한 태도이니라.] [어…….]성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