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3)
성황의 아이들-203화(203/469)
§ 203. 루이제 (6)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성진을 옆에서 부축하며 루이제가 물었다.
“응.”
당연히 멀쩡했다. 샤론 경에 빙의한 아버지가 완전히 고쳐 주셨으니까.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루이제는 여전히 근심어린 기색이었다.
“피를 제법 많이 흘리셨습니다. 역시 의원에게 보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아까 성기사가 왔다 가지 않았나?”
“물론 저하의 명대로 엑소시스트만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하온데 저하. 저하를 치료하던 중, 그녀의 기척이 조금…….”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이제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희미한 걱정마저 지워낸 얼굴에는, 유능한 사용인 특유의 냉철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식사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성진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였다.
‘설마, 루이제. 샤론 경에게 아버지가 빙의한 걸 알아챈 건가?’
볼수록 여간내기가 아니다. 황족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다니.
담대하기도 하고, 눈치도 제법 빠른 것 같단 말이지.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루이제가 방을 나선 뒤, 마왕 놈이 기다렸다는 듯 성진을 추궁해왔다.
[네 아버지가 그 미친 기사의 몸을 빌려 여길 왔었어. 그런데 치료를 하나 싶더니 갑자기 네 영혼의 기척이 희미해져 버리는 거야. 그 여자도 그래놓고는 방을 떠나버렸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래?’
성진의 영혼은 성황이 만든 염상 차원에 다녀왔다. 그런데도 영혼이 완전히 몸을 떠나지 않고 몸이 죽지도 않았다니.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황궁에 [틈새]가 열렸을 때도, 몸이 두 군데에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지…….’
어쩌면 차원 이동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긴 거리를 두고 넘어가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왕 놈이 흥분하여 덧붙였다.
[참. 놀라지 마, 이성진! 내가 그사이에 엄청난 걸 알아냈다고! 아까 네가 약차를 마신 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당시에 마왕 놈은, 평소처럼 성진의 머릿속에 있는 자신의 아늑한 보금자리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너의 보금자리?’
[그래. 네 머릿속에는 영혼이 머무르기 딱 좋은 장소가 있어. 난 거기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는 걸 제일 좋아한다고.]자리를 깔고 앉아? 턱을 괴고 있어?
넌 몸이 없는 영혼 아니냐?
[그런데 네가 그 차를 마시고 나서, 세상에! 내 보금자리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갑자기 엉덩이 밑이 막 번쩍번쩍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영혼에 그런 신체 부위가 있느냐를 떠나서, 그런 표현, 어쩐지 기분 나쁘다.
그런데 머릿속이 빛나다니, 그거 설마?
[짜잔! 알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금자리로 삼고 있던 곳이 바로, 염상 결정 안이었지 뭐야?]새로운 발견에 기세등등해진 마왕 놈은, 이제 성진의 머릿속에서 한껏 영혼을 펼치며 뻗대고 있었다.
[엄청나지 않냐? 모레스에게도 염상 결정이 있었어! 지금까지 한 번도 빛난 적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 어쩐지, 영혼이 머무르기에 너무 아늑한 공간이다 싶었다고!]‘…….’
[그 쌍둥이들이랑 마찬가지야. 보통의 인간들과 달리, 정확하게 후두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더라고! 이걸로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어. 마물과 닮은 그 염상 결정은, 분명 네 아버지의 핏줄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사실!]아아. 아마도 그게 코른시임 일족의 특징인 모양이다.
아까 성황이 그들 일족에 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해 줬지. 듣자 하니 일족 전체가 영혼 단말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거 어쩐지 군집 마물들의 특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근데 그거 알아? 내 보금자리는 쌍둥이들의 것보다도 훨씬 더 섬세하고 멋진 기관이었어! 결점이라곤 전혀 없는 24면체의 핵에, 유려하게 솟아난 일곱 개의 아치들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사방으로 뻗어 있었지! 난 솔직히 이제까지 그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염상 결정은 본 적이…….]마치 슈퍼카를 앞에 둔 양 흥분해서 떠들어대던 마왕 놈이, 성진의 떨떠름한 반응을 깨닫고는 의아해했다.
[…놀랍지 않냐?]‘아니, 뭐.’
진작 성황으로부터 들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그런 거 하나하나에 일일이 놀라기에는, 염상 차원에서 성황과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잠깐 동안에 정말 감정 소모가 극심했다고.
[쳇!]성진이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자, 빈정상한 마왕 놈이 투덜거렸다.
[이러면 재미없잖아! 내가 요 며칠간 널 위해 준비한 것들이 이 염상 결정을 통해 완성 되었는데, 자꾸 그러면 안 보여 줄 거다!]‘뭔가 준비했다고? 그게 뭔데?’
성진은 급격하게 흥미가 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어쩐지 마왕 놈이 말한 ‘준비’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요즘 혼자서 머릿속에 처박혀 꾸물거리는 일이 잦더라니, 그런 걸 하고 있었나?
[쳇! 됐어. 어차피 너한테는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게 빤한데. 그냥 잊어버려. 괜히 알고 나서 실망하지나 말고.]마왕 놈은 팩 토라지며 무심한 듯 투덜거렸지만, 성진의 머릿속에 전해지는 놈의 감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어봐 줘. 더 물어봐 줘.
두근두근두근.
마치 박동이라도 하듯, 설렘 가득한 진동이 놈으로부터 여과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정말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한 모양인데?’
근데 이놈. 자신의 기분이 성진에게 이렇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걸 알고는 있을까?
뭔가 짠한 기분이 된 성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뭔데, 응? 말해봐. 궁금해 죽겠다고.’
그로부터 얼마간 어르고 달래며 놈의 비위를 더 맞춰준 후에야, 마음이 누그러진 마왕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성진에게 털어놓았다.
[얼마 전 네가 내 영안을 강탈했던 것 기억해?]그걸 어떻게 잊겠는가.
덕분에 시신경이 다 타들어가고, 눈을 영영 못쓰게 될 뻔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 일이 있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좀 해 봤어. 방법이야 어땠던, 네가 내 영안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말은, 너에게도 그에 대응되는 감각이 분명 존재한다는 이야기니까.]처음 성진이 마왕의 감각을 공유해 보겠다는 발상을 했을 때, 놈은 자신의 감각이 ‘시각’과는 다르다며 불가능할 거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성진은 놈의 영안을 수월하게 빼앗아서 마계수를 죽이는데 잘도 써먹었던 것이다. 비록 그 결과는 꽤나 처참했지만.
[그래서 난 그동안에 틈틈이 네 머릿속의 여러 감각들을 건드리며 나와 동조하는 부분이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봤어.]과연, 요 며칠간 놈이 머릿속에서 계속 혼자 사부작거렸던 게 그런 작업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난 포기하고 있었는데, 혼자서 잘도 그런 일을 하고 있었네?’
제법 지난한 작업이었을 거 같은데?
그러자 마왕 놈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네가 포기하긴 뭘 포기해? 그게 아니란 걸 잘 아니까, 여유 있을 때 나라도 미리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준비?’
[그래. 네 성격에 분명, 필요하다 싶으면 또 서슴지 않고 그 짓을 할 거잖아? 하지만 나는 게헤나의 겁화를 소유한 불의 마왕이야. 지난번처럼 무턱대고 내 감각을 그대로 강탈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네 머릿속까지 완전히 타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럴 바에야 내 쪽에서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찾아내는 쪽이 백번 낫지 않아?]‘…….’
성진은 차마 마왕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마왕 놈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몇 달 전만 해도 놈에게서 느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는 말이겠지?’
[물론이지. 자, 잘 봐.]꼬물거리며 머릿속에서 뭔가를 이리저리 건드리던 마왕 놈이 이윽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짜잔!]그 순간, 정말로 성진의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로 일전에 보았던, 그 오색찬란한 빛으로 덮인 세계가.
‘이건…….’
파랗게 빛나는 난로의 불과, 거기서 퍼져 나오는 따뜻한 푸른 공기들.
창과 벽으로부터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는 분홍빛의 한기들.
심지어는 벽 너머의 사람들도 보였다.
방 밖에 서 있는 노란 그림자는, 기척으로 보건데 분명 칼멘 경의 것이다.
그리고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는 여러 사람의 그림자들이…….
‘이건 굉장한데? 야, 마왕아! 너 진짜 엄청난 걸 해냈구나!’
성진이 순수한 감탄을 내뱉자, 마왕 놈이 음하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떠냐? 이 마왕님의 능력이! 이제야 이 몸의 위대함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겠느냐?]성진은 신기한 기분이 되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복도를 부지런히 오가는 희미한 그림자들은, 아마도 시종들이나 시녀들 같은 일반인들이겠지.
반면, 밝은 푸른빛이나 노란빛을 띤 사람들은 분명 강한 오러를 가진 기사들이다
후원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노란 그림자의 경우는, 밝게 빛나다 못해 거의 금빛으로 보일 정도로 오러가 강한 사람이었다.
기척을 보니 분명 마사인 경이다. 역시, 틈만 나면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구나.
[사실 요 며칠간 전혀 성과가 없어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 아무리 찾아봐도 너한테서는 ‘영안’의 감각이 없었거든.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말이야.]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는 성진을 향해 마왕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한 거야?’
[약차야.]‘약차?’
[그래, 이성진. 네가 그걸 마시는 바람에 모든 것이 확실해졌지! 너에게는 사실 영안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 말이야.]‘…뭐?’
의외의 대답에 성진은 황당해졌다.
영안이 없어?
그럼 그날의 감각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나도 네 염상 결정이 활성화되고 나서야 뚜렷하게 알게 되었지. 내 영안에 동조하고 있었던 건 너의 영안이 아니라, 네 염상 결정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마왕 놈은 흥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 놈이 감지한 것들이 사념의 형태로 염상 결정에 그대로 수신되어, 그곳에서 성진이 감지할 수 있는 시각 정보로 변형되고 있었단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본래 내가 보는 광경은 영적인 빛으로 둘러싸인 오색의 광경이야. 하지만 네 감각을 공유하면서 경험했던 것은 전혀 달랐어. 마치 온 세상의 사물이 가진 모든 가능성들이 일시에 빛의 형태로 펼쳐진 듯 보였거든!]‘가능성의 빛…….’
놈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마계수를 상대할 당시 성진은, 나무의 가지들과 화살 하나하나, 심지어는 모든 공기의 흐름조차 미리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으니까.
[그때 내가 강탈당한 건 영안이 아니었던 거야. 그저 시각의 주도권을 빼앗기며, 강제로 너와 시각을 공유하게 된 거지.]‘흠.’
[그렇게 해서 네가 보는 것들을 내가 보게 되고, 내 영안 또한 네 시선을 따라가게 되었어. 그 감각이 만든 사념을 염상 결정이 수신해서 시각 정보로 변환하고, 그 정보가 네 시각을 통해 다시 고스란히 나에게로 반복해서 전해지게 된 거야!]멈추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나가는 통에, 숨 쉴 필요도 없는 놈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복잡하게 중첩된 비효율적인 정보 이동이, 근방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거지! 그러니 그걸 감당해야 할 눈과 시신경이 멀쩡할 리가 있었겠어? 모조리 망가지고 괴사할 수밖에!]‘…….’
성진은 마왕의 복잡한 설명을 반쯤 흘려들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확실히, 놈에게서 감각을 전달 받은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전과 달리 지금은 조금 뜨끈뜨끈한 느낌 외에는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은 거구나.’
[응. 원리를 알고 나니까 꽤 간단한 문제였어.]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마왕이 으쓱거렸다.
[애초에 너와 내가 강제로 ‘시각’이라는 좁은 감각 하나에 묶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념을 전달하기만 하면 끝인 거야. 그럼 염상 결정이 알아서 네 시각에 맞춰 감각을 전환해 주니까.]‘염상 결정이…….’
[그래. 네 염상 결정은 평소에는 비활성 상태라서 외부 사념을 수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에서 사념을 전달만 해주면 나름의 기능은 하는 것 같거든. 물론 이것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면 조금은 신경에 무리를 주겠지만.]아냐.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성진은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까 염상 차원에서 성황이 경고했었지. 되도록이면 함부로 약차를 마시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그 말인즉, 앞으로 성진이 약차를 마실 것을 고려할만한 상황이 몇 번이고 닥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성진은 순수한 마음으로 마왕 놈을 칭찬해 주었다.
‘잘했어! 다음에도 곰 고기 스테이크가 나오면, 체면 불구하고 기꺼이 두 접시를 먹어 줄게!’
[음하하하핫!]바로 그때였다.
뚜벅뚜벅.
복도 저편에서 무척 독특한 그림자가 방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노랗고 파란 그림자들 사이에서 홀로 은은한 보랏빛을 내뿜는 호리호리한 신형. 모종의 방법으로 오러 활성이 숨겨져 있지만, 필시 강한 오러 유저일 것이 분명한 밝디 밝은 그림자가.
똑똑똑.
정중한 노크 후, 루이제가 저녁이 든 트레이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저하.”
그러더니 그녀가 흠칫 놀라며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하, 눈이…….”
마왕과 사념을 공유한 뒤로 성진의 동공 안쪽은, 보통 사람은 감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옅은 붉은 빛이 점멸하는 중이었다.
“하하, 루이제는 눈이 정말 좋구나.”
성진은 그녀를 향해 입매를 끌어올리며 칭찬했다.
코도 엄청 좋던데 말이지. 아무리 봐도 보통 시종은 아니란 말이야.
“아, 그리고 칼멘 경?”
갑작스러운 황자의 부름에, 열린 문틈으로 칼멘이 얼굴을 빼곰 내밀었다.
“네, 저하?”
“다시 봐도 자넨 역시 수련이 부족해. 밝기가 그게 뭔가? 더 정진하게.”
“…네?”
갑작스러운 성진의 타박에, 칼멘 홀로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