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4)
성황의 아이들-204화(204/469)
§ 204. 루이제 (7)
지그스문트령에서 맞는 첫 아침. 성진은 같은 시각에 어김없이 눈을 떴다.
하지만 평소처럼 벌떡 일어나 명상을 시작하는 대신, 그는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것은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었다. 슬쩍 고개만 돌려도 흩어져버릴, 불온하고도 아슬아슬한 감상.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그런가?’
아니면 어젯밤에 너무 늦게까지 무리를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던 성진은, 문득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소년의 작은 손에 눈이 닿았다.
‘…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제부터 정말 모레스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야 한다. 무의식중에 부담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
복수라는 목적 하나로 점철된 이전의 삶과는 분명 다르리라. 삶의 끝에 여분으로 받은 휴가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돌려주기 전 잠시 맡아두는 삶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가능성을 가진,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들을 가진,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어린 소년의 온전한 삶인 것이다.
‘그런 건, 나처럼 다 늙은 영감에게는 너무 버겁다고.’
이제까지 명확하게만 보이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이렇듯 모호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다니.
그런데 그게 또 설레는 듯도 하여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뭐,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 에디스가 물병을 들고 들어온다.
“기침하셨습니까, 저하.”
아, 에디스.
어딜 내놔도 남부끄러운 내 전담 시녀.
부디 백작가에 머무는 동안에는 별다른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할 텐데.
성진이 평소와 달리 빤히 쳐다보자, 에디스는 조금 당황하며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송구합니다, 저하. 어제는 집사장님을 따라다니며 백작저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느라 제 업무에 소홀했습니다. 다행히 루이제 씨가 대부분의 일을 맡아주셨습니다만, 많이 불편하셨습니까?”
“아냐. 괜찮았어.”
그래. 어쩌면 네가 나에게 쓸개차를 먹인 횟수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기억해둘 테니 앞으로 잘하자.
그러자 에디스가 부르르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뭐지? 갑자기 왜 오한이…….”
그녀가 열심히 몸 안의 오러를 활성화시키는 동안, 마사인 또한 평소처럼 성진의 방을 찾아왔다.
“저하, 간밤에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 어서 와. 마사인 경.”
몸을 일으키며 대답한 성진은, 새삼스럽게 마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저 양반은 처음 봤을 때부터 모레스에게 한결같이 다정하게 굴던 사람이지.
평소라면 그냥 ‘참 충직한 성격이구나.’ 하고 말았겠지만, 어쩌면 그 대상이 정말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기자마자 기분이 미묘해지는 거다.
나는 정말로 그의 충실함을 제대로 알고 있었나.
또 지금까지 그에 대한 충분한 응답을 했던가.
“…어찌 그러십니까, 저하?”
평소와 조금 다른 성진의 분위기를 감지한 마사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성진은 눈가를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큰일인데. 계속 이런 식이면, 앞으로 성황가 사람들 얼굴은 또 어떻게 본다지?
‘아멜리아 누님은 아멜리아 누님이고, 로건은 로건이고, 또 꼬맹이는…….’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지.
지금까지 개망나니 모레스가 저질러놓은 업보들은 또 어떻고. 그게 사실은 모두 내가 한 짓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인가!
성진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하?”
마사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성진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마구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떨쳐냈다.
아냐, 지금 여기서 생각만 하면 뭐 하나. 일단 뭐든 부딪혀 봐야지.
우선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빨리 여기 일을 끝내고 황도로 돌아가야겠다!’
뭐든 후딱 해치우자.
겸사겸사 여행 기념품도 좀 찾아보고.
* * *
“지그스문트 변경백을 만나겠다.”
간단한 아침 식사 후.
갑자기 성진의 호출을 받은 오르덴과 헤르만은, 다짜고짜 황자가 내뱉은 발언에 아연실색했다.
이렇게 갑자기?
“외람되오나, 저하. 이 조사는 어디까지나 가주님 몰래 행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탐탁지 않아 하실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먼저 밀로 상단을 배제할 결정적인 증거들을 찾는 게 아닌지요?”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하며 성진을 만류했다. 어린 황자의 충동적인 행동이 자칫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흠.”
“게다가 저하, 만에 하나라도 가주께서…….”
거기까지 말한 오르덴은, 차마 뒷말을 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가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사를 하던 중 발견한 암흑 교단의 증표.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가주가 삿된 무리들과 직접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
그러나 성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걱정 마. 지금까지 내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변경백은 밀로 상단의 만행을 알면서도 묵인했을지언정, 특별히 암흑 교단과의 관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어.”
“…네?”
오르덴의 얼굴에 안도와 혼란의 표정이 동시에 스쳤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단언을 하니 몹시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독자적인, 조사입니까? 대체 어떤…….”
“지난 수년 분량의 영지 운영 기록들이지. 영지의 재정 상태. 상단과의 거래 기록. 영지민의 출생과 사망, 그리고 실종 수. 마수의 크고 작은 남하 기록들과 토벌 횟수 등등.”
촤르륵.
테이블 위에 펼쳐지는 양질의 서류들을 본 오르덴과 헤르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자가 이곳에 온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다. 대체 언제 이런 상세한 자료들을 구했단 말인가!
일행이 서류를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동안, 성진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는데?’
그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겠지만, 사실 성진은 처음부터 변경백을 만나 담판을 짓는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성진은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했다.
첫째. 지그스문트령이 이미 암흑 교단의 손에 넘어갔거나, 변경백이 직접 삿된 뭔가와 깊이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
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황도의 성기사단을 끌어들여 가며 대규모의 작전을 펼쳐야 했겠지.
오르덴을 포함한 지그스문트 가의 사람들은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을 거고, 영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 거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악마는커녕 별다른 삿된 것의 개입을 감지할 수 없었어.’
무려 마왕 놈의 영안을 통해 확인한 사항이다.
거기다 서류로 본 영지의 재정은 나쁘지 않았고, 수년간 마수의 침입 또한 안정적으로 막아내는 중이지.
굳이 변경백이 암흑 교단과 손잡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여기서 두 번째 경우의 수가 생긴다.
바로 약차의 유통이 실질적으로 영지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변경백이, 이를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을 가능성.
그리고 이 경우를 위해 성진은, 회유나 협박을 통한 평화로운 담판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저하. 정말 세심하게 조사된 자료들이군요!”
그러는 중에도 헤르만은 서류를 검토하며 연신 감탄하는 중이었다.
“뭐 하나 틀린 내용이 없습니다. 거기다 이 중 몇몇은 내부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기밀 시항까지 포함되어 있군요. 이것들을 다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흠.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나한테는 아주 유능한 정보원이 붙어 있거든.”
“어허, 그런 대단한 정보원이…….”
모두가 그 수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 그런데 잠깐…….”
그때, 서류에서 뭔가를 발견한 헤르만이 흠칫 놀라며 중얼거렸다.
“이 필체는 분명 집사장님의 것인데? 게다가 결재란에는 정말 가주님의 서명이…….”
후다닥.
재빨리 서류들을 갈무리하며, 성진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흠, 그러니까 나한테는 아주 유능한 정보원이 붙어 있거든.”
“…….”
“…필체 위조쯤이야.”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성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야, 일이 커지기 전에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때?]‘미쳤냐? 난 지금 손님이라고!’
신성제국 황자로서의 체면이 있지.
영지에 온 첫날 밤, 당당히 가주의 서재를 털었다는 말을 차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아쉽다. 계획대로 다샤가 함께였다면, 감쪽같이 이것들을 필사하고 돌려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단 모든 조사는 다샤가 한 일로 해두자. 마침 가주가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 한동안 절도가 발각되지는 않겠지.
어쨌거나 성진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기로 결심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저하.”
묘한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던 오르덴이, 이윽고 턱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이 자료들의 출처에 대해서도 더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하면 그분을 만나 어쩌실 셈이십니까?”
“잘 설득할 거다. 알아서 밀로 상단과의 거래를 끊도록.”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암흑 교단에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를 묵인하고 계신 거라면, 가주님께는 분명 자신만의 합당한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그렇게 말하는 오르덴의 눈에는, 마치 범접하지 못할 거대한 벽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한 희미한 좌절감마저 어려 있었다.
‘자기 아버지인데도 저렇게 어려운 거구나…….’
다샤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검술의 천재라 칭송받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끼어있음에도, 변경백은 영지 경영만으로도 이에 뒤지지 않는 큰 두각을 나타내는 남자라고.
아마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않겠어.
“하지만 안심해. 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다. 약차에 대한 건, 내가 직접 그를 만나 확실하게 담판을 짓지.”
성진에게는 다샤가 긁어온 자료들은 물론, 지난 수십 년간 엑소시스트들과 인퀴지터들이 쌓아 올려둔 많은 기록들이 있었다.
그걸 잘 조합하기만 하면, 영지 하나 암흑 교단의 소굴로 둔갑시키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게 뭐 대수라고.
영지에 이단 재판부를 끌어들이겠다고 협박하는데, 변경백이라고 배길 재간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오르덴과 헤르만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응? 왜들 그래?
마왕 놈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어디 가서 그렇게 웃지 말라고.]아니, 왜 사람이 맘대로 웃지도 못하게 해?
* * *
그날 저녁, 백작저에 몰래 잠입한 다샤는 나무 위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지그스문트 백작저는 암살자가 침입하기에 참으로 까다로운 장소였다.
일단 테라스는 물론, 별다른 요철 하나 없는 투박한 벽은 타고 오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건물 구조조차 단순하기 짝이 없어 다른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창들이 죄다 손바닥만 한 탓에, 자칫 몸이 끼이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역시 틈을 봐서 복도 쪽으로 몰래 접근을…….’
그때 그녀는 흠칫 놀랐다.
갑자기 작은 창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 황자가, 정확히 다샤가 있는 쪽을 향해 열심히 손짓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샤! 들어와, 들어와.’
‘……?’
아직 황자의 주위에 사람들의 기척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데?
다샤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재차 그를 부르는 황자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결국은 작은 창을 타고 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황자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직 기사단장 두 사람이었다.
바로 점잖게 미소 짓고 있는 브루노 단장과, 흉흉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마사인 경이다.
의외에 사태에 당황한 다샤가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데, 황자가 민망한 듯 사과를 해왔다.
“이렇게 갑자기 대면시켜 미안해, 다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이런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저하…….”
“물론 다샤에게 정체를 숨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언제까지고 함께 가는 운명공동체라고.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가자고. 응?”
그러자 전직 데카론 나이트, 브루노 단장이 콧수염을 쭉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언제까지 당신을 모른 척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터놓게 되니 마음이 편하군요. 브루노라고 합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입신양명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
다샤가 엉거주춤 마주 고개를 숙이자, 단장이 흐뭇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 지그스문트령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만에 그 많은 정보들을 찾아내셨다지요? 황자님께서 당신에 대해 어찌나 칭찬하시는지.”
“…네?”
“평소 진주궁을 드나들 때도 대단한 분이라 생각은 했지만, 정보력까지 그리 뛰어나실 줄이야. 다시 봤습니다.”
다샤가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성진은 슬그머니 그녀의 눈을 피했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어딘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마사인 경이다.
“이자가 그 정보원입니까. 저하께 ‘오러 은폐’라는 삿된 재주를 가르친 무도한 자가 바로 이자였군요.”
딸꾹.
올 것이 왔구나.
저도 모르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하는데, 마사인 경이 순간 굳은 얼굴을 풀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그런 기밀 자료들까지 찾아내는 수완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후로는 저하를 보필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좀 더 각별히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연이은 기사단장들의 예상 외의 반응에, 다샤는 황당한 얼굴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저하?”
어, 미안해, 다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넘어가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