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6)
성황의 아이들-206화(206/469)
§ 206. 루이제 (9)
-평년보다 유난히 따뜻한 해가 오면, 때때로 마경의 혹한 속에서도 꽃이 피어난다. 그 희귀하고 매혹적인 꽃향기는 늑대와 라이칸슬로프를 미치게 만든다고 전해지지. 그러니 혹여 마경에서 흘러드는 바람에 꽃향기가 배여 있거든, 사냥개들을 단속하고 여간해서는 집 밖을 나서서는 안 된단다.
조모의 엄포 섞인 이야기에도 어린 루이제는 늘 코웃음을 치곤 했다.
어느 날 산책길에서 생소하고 달큼한 향기를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막스.
젖먹이 새끼를 보살피기에 여념이 없다가도, 산책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그녀를 따라나서던 충직한 친구.
그 신실하던 개의 눈에 또렷하게 맺힌 살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막스.”
새벽같이 사육장을 찾은 루이제는, 조미하지 않은 육포를 열심히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도도한 늑대개는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는 홱 도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막스의 새끼, 막스는 제 어미와는 달리 도통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강제적인 주종관계에서 오는 거리감인지, 아니면 새끼 시절 맡은 제 어미의 피 냄새 때문인지는 루이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처럼 아무런 성과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킁. 또 그 개를 보고 왔니? 최근에는 사육장에 가질 않는 것 같더니.”
마침 혼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물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개들의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자신의 몫으로 내밀어진 식어 빠진 스튜를 잠시 뒤적거리던 루이제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요 며칠은 막스가 영지에 없었거든요.”
“그래? 벤 영감이 사육장 단속을 허투루 하지는 않을 텐데, 그놈은 잘도 우리를 빠져나가는구나.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그렇게 돌아다니게 두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 세바스티안 바텔은 영지의 경비대장이다.
본래라면 귀가가 늦어지는 울프 기사단장을 대신해, 변경백과 함께 마경의 감시 초소들을 순찰했을 터였다.
하지만 대공자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온다는 전갈을 받고, 지금은 이례적으로 영지에 눌러앉아 있는 중이다.
대신 전대 변경백인 빈센트 지그스문트가 이를 핑계로 마경으로 내뺐지.
무력이 그리 출중하지 못한 변경백을 호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것이 실은 황자를 피할 구실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예전부터 늘 성황가 사람들을 불편해했으니까.
“엄마가 도착하시면 곧장 마경으로 복귀하셔야 할까요?”
루이제의 물음에, 그는 검을 집어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겠지. 올해는 유난히 기온이 따뜻하지 않니. 라이칸슬로프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단다.”
따뜻한 바람에 실려 이따금 미약한 꽃향기가 날아온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루이제는 밍밍한 스튜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루이제야.”
그런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바스티안이,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어떻게… 할 만하니?”
“…….”
“집사장님이 네 칭찬을 하셨단다. 워낙 완고한 양반이라 여간해서는 그러는 법이 없는데, 네가 백작저에서 무척이나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더구나.”
잠시 아버지의 눈이 그녀의 손에 가닿는다. 분명 최근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혼자서 검을 휘두른다는 걸 알고 계신 거겠지.
루이제는 결국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재미있어요. 적성에도 잘 맞습니다.”
맞지 않으면 또 어쩌겠는가.
마침내 영지에 도착한 모레스 황자는 소문과는 무척이나 다른 인물이었다.
상상과 달리 말쑥한 소년이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뚱한 표정의 그는 어딘지 냉정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백작 부인을 향해 미소를 보이자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화사해진다.
덕분에 백작가의 식솔들은 단번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하긴, 그 도도하기 짝이 없는 막스도 금방 길들이지 않았는가.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막스의 주인은 난데…….’
조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이 무척 세시네요.”
황자의 짐들을 방으로 옮기고 있는데, 양팔에 각각 거대한 트렁크를 짊어진 여자가 그런 소리를 했다.
“전 에디스라고 해요. 저하의 전담 시녀죠.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루이제입니다.”
그냥 시녀일 리가 없지. 저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분명 시녀를 가장한 비밀 호위다.
하지만 루이제는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대공자의 초청을 받았으니, 모레스 황자는 필시 ‘약차’에 대해 몰래 조사하러 온 것일 터. 그렇다면 만의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강한 호위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한창 짐을 나르던 루이제는, 문득 황자의 가방에서 무척이나 강렬한 꽃향기를 감지했다.
“…장미 향?”
추운 지그스문트령에서는 제대로 피어나지 않는 꽃. 그래서 이따금 백작 부인이나 아가씨들이 사용하는 향수로만 접해 본 강한 꽃향기.
“네?”
그 말에 에디스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분명 지브릴 의원이 뿌려 둔 방역 향수일 겁니다. 여행 중에 병치레하지 않도록 미리 방비를 한다나요. 저하께서 워낙에 질색을 하시니 대충 털어내긴 했는데, 그게 아직 남아있나 봐요? 루이제 씨, 코가 예민하시군요.”
그녀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루이제는 근원 없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분명 그날의 향기와, 약차의 그 달달한 향과는 다를진대. 한데 왜 이리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까.
그리고 루이제의 불안은 곧 사실이 되었다.
점심 만찬에 참여했던 황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초주검이 되어 방으로 실려 온 것이다.
그의 체취와 옅은 장미 향 사이에 뒤섞인, 예의 익숙한 향을 감지한 루이제는 경악했다.
“…약차?”
그러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황자는 태연하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응? 어, 맞아.”
루이제는 혼란스러웠다.
약차의 유통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황도로 떠났던 대공자가 초청한 손님이다. 분명 그와 함께 영지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이 차의 위험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은가?
“대체 그걸 왜…….”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황자가 갑자기 주르륵 엄청난 양의 코피를 쏟아내더니, 엑소시스트를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루이제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이를 어쩌지?
이 사람은 제국의 고귀한 황자. 이대로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물론 백작가 전원이 화를 면치 못하리라.
본래라면 당장이라도 의원과 사제를 불러야 마땅하지만.
‘…비밀로 하라고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게다가 황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루이제는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벼운 듯 툭툭 던지는 황자의 행동이나 언변의 기저에, 이상하게도 보통 사람은 항거하기 어려운 묘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일단은 명을 따르자.
마침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루이제는, 슬쩍 침구를 들어 출혈의 흔적을 덮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모레스 황자의 일행을 수소문하여 금방 그가 말한 엑소시스트를 데려올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루이제가 샤론 경을 데리고 나타나자, 호위를 서고 있던 젊은 기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상당한 수준의 오러 유저였음에도, 방 안의 소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쯧.]방으로 들어서던 엑소시스트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난데없는 싸늘한 태도에 기사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엑소시스트가 루이제를 돌아보며 명했다.
[너는 밖에서 기다리거라.]“……!”
자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친 루이제는, 순간 밀려든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묘한 은회색의 눈동자.
‘…검은 눈이 아니었나?’
루이제는 당황했다.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히죽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이상한 여자라 생각했건만.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마치 전대 가주를 마주하는 듯한, 어쩌면 그보다도 월등히 무거울지도 모르는, 자신으로서는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고고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
얄팍한 감각을 희롱하는 세상 모든 빛들을 단숨에 걷어내고, 능히 그 저변에서 맥동하는 심연을 응시하는 무서운 눈.
어쩌면 신의 시선과도 닮아있는 그 눈이, 지금 자신의 거죽을 넘어 그 생각과 영혼까지도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그래. 너는 결국 그런 길을 갈 것이더냐.]잔뜩 압도되어 얼어붙어 있는데, 이윽고 그녀는 루이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하나 내가 이제 와서 어쩔 수 있을까. 모두가 그 아이의 선택인 것을…….]“…….”
[북에서 오는 것에 철저히 대비하거라.]그 말을 끝으로.
타악!
그녀의 눈앞에서 거세게 방문이 닫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하루 만에 일어날 수 있는 출혈량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갑자기 쌩쌩해진 황자는, 밤사이에 혼자서 백작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귀빈께서는 밤사이 별일 없으셨습니까?”
새벽같이 출근한 루이제는, 평소와 다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곤 야간 경비조에게 물었다.
“응? 아아. 루이제냐. 황자님은 밤사이 조용히 주무셨다. 황도에서 여기까지가 보통 거리인가. 피로가 극심하여 어제는 저녁 만찬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다고 하던데?”
제법 난다 긴다 하는 경비원들이 설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건가.
킁.
루이제는 고개를 들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복도를 맴돌고 있는 것은 간밤에 새로 생긴 황자의 체취다. 특히나 그의 의복에 배어 있는 옅은 장미 향을 루이제는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체취는 2층 가주님의 서재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설마……?’
영지에 온 첫날, 그런 간 큰 짓을 했으려고.
루이제는 머리 한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의심을 애써 밀어 두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헤르만을 비롯한 대공자의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이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복도에서 헤르만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약차에 중독된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환각 증세가 심한 자들을 둘 정도만 추려 줬으면 한다. 넌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을 빨리 파악하니까.”
“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루이제는 남들에 비해 유난히 코가 좋아, 약차 향이 짙은 사람들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처음에 약차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조사를 위해 대공자와 헤르만에게 여러 차례 같은 일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 어쩌시려는 겁니까?”
“황도에 데려가려 해. 밀로 상단의 악행을 고발할 증거로 재판부에 넘길 거다.”
“그걸로 약차의 유통을 막을 수 있는 겁니까?”
그건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약차의 해악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잡는 데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루이제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헤르만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황자님의 지시다. 직접 가주님과 담판을 지으시겠다는구나.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약차의 피해자를 확보하고, 소매상점에서 차의 일부를 증거물로 압수하는 것뿐이다.”
“…….”
역시 루이제의 짐작대로, 황자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영지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되는 걸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모레스 황자는 정말로 이제 조사가 모두 끝나기라도 한 듯 굴었다.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당장 가주님을 이 자리에 대령하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다.
“지그스문트 변경백은 언제 온다나?”
“흠, 저하. 사람을 보냈으니 이제 곧…….”
“그러니까 언제 온다나?”
“그것이, 아무래도 초소들을 모두 정비하시는 데 시간이 좀 소요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언제 온대?”
“저하아…….”
시도 때도 없는 닦달에 헤르만이 울상을 짓는데, 황자가 고개를 들어 초점 흐린 눈으로 허공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순간 루이제는, 그의 눈에 스쳐가는 희미한 은빛의 안광을 보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때를 놓칠 것 같아. 여기에 오래 발이 묶일 것 같다고.
어린애도 아니면서, 모레스 황자는 그렇게 칭얼거렸다.
그렇게 황자가 온 지 사흘째가 되는 저녁.
울프 기사단이 마침내 영지에 복귀했다. 한 무리와 죄수들과, 어마어마한 양의 생필품을 동반한 채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경의 최전방에서 가주의 답신도 함께 도착했다.
“라이칸슬로프의 대규모 이상 준동을 확인. 남하하는 개체 수는 약 이… 이천?”
헤르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울프 기사단은 지금 바로 마경으로 복귀할 것. 경비대장 세바스티안 바텔은 영지 내 전투 가능한 인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헤르만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대공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갔다.
“저하. 무리 중에서 라이칸슬로프 로드의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 역시 침중하기는 마찬가지.
이는 지그스문트령에 들이닥친 전대미문의 재난이었던 것이다.
“최근 10여 년간 남하하는 마수들과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지만, 아무리 많아도 그 수가 기백을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약차에 대한 것은 뒤로 미루고, 지금은 우선 영지의 총력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
“아무래도 가주님과의 대화는 요원할 듯하니, 저하께오서는 서둘러 황도로 돌아가심이 좋을 듯합니다만.”
그런데 그 보고를 들은 황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거리던 그는,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어.”
그렇게 말한 모레스 황자는 예의 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사인 경. 상주기사들을 소집하지. 단장은 샤론 경과 발레리 경을 데려오게.”
기사들이 황급히 방을 나서자, 황자는 혼자서 주섬주섬 겉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루이제가 재빨리 다가가 그의 시중을 들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대공자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컥.
마지막으로 호두까기가 매인 검대를 찬 황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도 마경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