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08)
성황의 아이들-208화(208/469)
208. 라이칸슬로프 로드 (2)
“모레스 오라버니가? 심심하니 지그스문트령에 놀라오라고 했다고?”
앞뒤 없이 그게 뭐야? 당최 영문을 모르겠네?
잠시 갸웃거리던 시슬레는 곧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레스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니까. 예상과 정반대 방향이긴 한데, 원작을 크게 비틀수록 좋은 일일 거야. 잘 다녀와, 오라버니.”
막내의 여상한 대답에 로건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솔직히 말하면 시슬레가 하는 말도 영문 모를 소리인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놀러 오라니, 그건 대체 무슨 명분이란 말이냐? 황자로서 마땅히 돌봐야 할 의무들은 황도에도 많다. 한가로이 놀 때가 아니야. 게다가 아직 네 수련도 다 봐주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시슬레가 의연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수련은 혼자 반복하는 건데, 뭘. 어차피 오라버니가 날 오래 가르쳐 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본래라면 오라버니는 지금쯤 한창 키프로스에서 배를 타느라 바빴을 거거든.”
“…내가?”
“응. 해상 마수들이 기승을 부릴 시기였어.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계속 잠잠한 걸 보니, 모레스 오라버니가 또 중간에 뭔가를 해서 바뀐 모양이야.”
“……?”
두 사람은 지금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 연무장에 와 있었다. 최근 황도에 머물면서 여유가 생긴 로건이, 오전마다 시슬레의 오러 수련을 봐주고 있었던 것.
기사단에 입단한 후, 시슬레는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의 정규 훈련에 모두 참여했다.
하지만 오러 연공 교습만은 예외였는데, 무의식중에 홀로 오러를 깨치고 층까지 제법 쌓아 놓은 성녀님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없었던 탓이다.
부지불식간에 성녀로부터 발출된 오러가, 앗 하는 사이 치명적인 위치로 날아드는 일이 부지기수.
교관들은 혼비백산하여 교습을 포기했고, 결국 비공식 데카론 나이트이자 소드 마스터인 로건이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아바마마께 의논을 드려 봐야겠다. 일단 수련이나 할까?”
“아, 잠시만 오라버니. 이것만 좀 고쳐 놓고.”
그러더니 작은 성녀는 낑낑거리며 연무장 구석에 쌓인 갑주 허수아비들을 잔뜩 끌고 왔다.
“이게 다 뭐야?”
“음. 어제 오후에 내가 수련하다가 망가뜨린 허수아비들이야.”
로건은 황당한 얼굴로 종잇장처럼 구겨진 갑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구겨진 것도 아니다. 마치 절벽에서 떨군 후 거대한 바위로 짓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납작해져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그냥 다시 녹이는 게 낫지 않을까.
“이건 양호한 거야, 로건 오라버니. 적어도 구멍은 안 났잖아?”
“…….”
처음 오러 입문 수업을 시작했을 당시.
정석대로 오러를 엮어나가는 연습을 하던 시슬레는 곧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다.
오러의 타격점을 한 점으로 모을 수 있게 되면서, 그녀가 휘두르는 플레일이 마치 랜스로 꿰뚫는 것과 비슷한 관통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우그러지는 허수아비보다, 관통되어 아예 못쓰게 된 허수아비가 점점 쌓여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로건이 타격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추가로 가르치고 나서야 이 파괴 행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스플래시 대미지만으로 납작해져 버린 갑주들이다. 뭐, 성녀 본인은 그것으로 만족한 모양이지만.
“이게 다 오라버니 덕분이야.”
그렇게 로건을 치하한 시슬레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깡! 깡! 깡!
성녀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근처에 있던 인퀴지터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도 수련의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운용의 섬세함은 떨어졌지만, 적어도 자신이 우그러뜨린 플레이트 메일을 반대로 두드려 펴는 정도의 조절은 가능해졌으니까.
“이것도 은근히 오러 조절 수련이 되는 것 같아, 오라버니.”
“성기사단의 갑주가 연철 비율이 높은 게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두드리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을 테니까. 아, 시슬레. 거기 아직도 우그러졌어.”
“여기? 알았어.”
깡! 깡!
남매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이따금 질린 얼굴의 인퀴지터들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 * *
그날 늦은 오전.
정무회의가 끝나길 기다려, 로건은 성황의 집무실을 찾았다.
로건 역시 내심은 지그스문트령에 가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성진이 제대로 조사를 하고 있는지 걱정인 데다, 만일 그곳에 악마종의 마수가 뻗어있다면 분명 자신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단지 ‘놀러 간다’는 어이없는 구실을, 고지식한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뿐.
그런데 막상 집무실에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생각보다 지그스문트령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공식적인 소식은 아니었지만, 황도의 정보부에서는 이미 아렌쟈를 통해 라이칸슬로프의 이상 준동 소식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그스문트령에 문제가 발생한 지 고작 하루 만이다. 그런데 벌써 황도에 소식이 닿아 있다고? 과연, 이것이 천 년간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는 제국의 저력…….’
로건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는 성황이 조직한 영능력자 집단, 아렌쟈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로건의 착각이었지만.
“그래,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예, 아바마마. 하지만 그곳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은 결국 모레스의 지원군 요청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로건은 착잡한 얼굴로 성진이 보낸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라이칸슬로프 2천.
종종 마수 토벌을 다니는 로건은, 이 숫자가 얼마나 엄청난 군세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본래 라이칸슬로프는 인간에 비해 월등한 덩치와 체력을 가진 마수다. 그 하나의 숫자를 결코 인간 병사 하나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인간 오러 유저처럼 기이한 재주를 보이는 강한 개체들도 제법 많이 있다.
어쩌면 이성진은 황도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아멜리아.”
잠시 물끄러미 로건을 바라보던 성황이,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있던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네, 아버님 폐하. 저는 모레스의 요청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황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황도에서 정식으로 병력을 움직이기는 너무 이릅니다. 정식 소식통에 의해 전해진 정보도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순수한 선의로 병력을 파견한다 하더라도, 백작령을 사전에 감시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제국에 복속된 모든 왕국과 영지에서 이를 크게 경계할 것입니다.”
“그렇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변경백으로부터 아직 공식적인 지원 요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법과 제국법에 의하면, 영주에게 악마숭배에 준하는 죄목이나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영주의 요청 없이 병력을 이끌고 영지 경계를 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로건은 홀린 듯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서 모레스를 도우러 가야 한다고, 아니면 영지에서 당장이라도 그 아이를 빼내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구를 거라 생각했는데.
저 차분한 목소리가 내뱉는 것은 구구절절 옳은 소리뿐이다. 늘 상냥하기만 하던 누님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던가.
“또한 제국법에서는, 영지가 동원할 수 있는 총 군사의 1/5을 넘어서는 수의 병력을 경계 근처에 주둔시키는 것만으로도 영지를 위협하는 중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미리 병력을 지그스문트령 부근에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성황이,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하면 성기사단의 경우는 어떠할 것 같으냐, 아멜리아? 이미 정기적인 포교단이 대륙 각지를 경계 없이 오가고 있다. 오로지 주신의 뜻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성기사들을 파견하는 것은, 위험에 빠진 영지와 신민을 보살핀다는 취지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만.”
그러자 황녀의 맑은 회색 눈에 즐거운 빛이 어렸다.
“주신의 검이며 철퇴인 성기사단이야말로, 공정하며 이타적인 성격 탓에 오히려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는 집단일 것입니다. 성기사단의 공식적인 활동에는 언제나 성회의 사전 인가가 필요합니다. 단순한 봉사 활동을 하나를 하더라도, 성인들의 유지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특정 영지에 호혜적인 활동을 했다고 인식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면 그들은 언제 움직이느냐? 그저 검집에 갈무리된 장식용 무기더냐?”
“대륙의 신민이 도탄에 빠졌음이 누구의 눈에도 명확할 경우. 그리고 그 영주에게 악마숭배에 해당하는 중대한 결격사유의 증거가 있을 때입니다.”
최근 아멜리아 황녀는 이렇게 종종 성황의 집무실에 얼굴을 비추곤 했다.
성황의 정무회의가 끝나면 그의 곁에 앉아, 그에게 올라오는 보고를 듣고, 그가 처리하는 업무들을 익혔다. 덕분에 일각에서는 황녀가 후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반면 다른 의견들도 있었다.
탄신연 이후 황녀의 국혼 문제가 본격적으로 표면에 떠오르면서, 성황이 사랑하는 딸에게 본격적으로 정무를 가르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성황은 알현 시간 외에도 딸과 보내는 소소한 시간에, 그리고 아멜리아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돕는다는 관점에서 대단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하면 너는 모레스의 요청이 어찌하여 적절하다 판단했느냐?”
“네, 아버님 폐하. 그 아이는 ‘놀러 오라’는 목적을 명확히 함으로써, 지그스문트령에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가지지 않았음을 명시하였습니다. 또한 기사단 단위가 아닌 소규모의 별동대를 요청함으로써, 영지에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평소 자발적인 마수 토벌로 이름 높은 릴리움 별동대입니다. 비록 영주의 정식 요청이 없더라도, 이들의 작은 움직임에 대고 괜히 트집을 잡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총명해지는 딸의 모습에, 성황은 흡족한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들었느냐, 로건? 모레스가 놀러 오라는 이야기는 그런 의미인 듯하구나.”
“…….”
“황도에서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의 규모라고 해봐야, 들은 대로 릴리움 별동대 정도가 다겠다. 그것도 백작령의 공식 요청이 아닌, 토벌대 운영 중 모레스를 보러 들르는 그림이 되겠지. 그것이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지원이 될 듯하구나.”
확실히, 릴리움 별동대는 성 바스티안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발군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처음부터 로건의 무력과 인품을 흠모하여 모인 집단이고,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해 매일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성과다.
그런데 그 애가 그걸 다 예상했다고?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사태에 로건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성황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로건. 공식적으로는 계절이 바뀌어 이동하는 마수들을 경계한다는 정기 토벌의 형태로 가자꾸나.”
“…네, 아바마마.”
로건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로건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던 성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하자꾸나. 네가 무사히 모레스를 황도에 데려온다면, 토벌대 활동비의 남은 금액을 모두 네 용돈으로 돌려주마.”
“……!”
잠깐, 이성진에 이어 아바마마까지!
내가 무슨 돈 귀신이라도 붙은 줄 아는 건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옆에서 아멜리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 하나를 펼쳐 보였다.
“매년 토벌대의 정기 활동에 드는 비용이야. 이번에는 지그스문트령에서 토벌을 끝내고 돌아올 테니, 적어도 이 금액의 절반은 그대로 절약될 것 같단다.”
헉.
로건은 서류를 확인하고는 헛바람을 삼켰다.
‘이 정도면 오르토나를 재건하는 꿈도 금방… 아니, 이게 아니지.’
그 눈 돌아가는 금액에 순간 혹했던 로건은 곧이어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기사 중에 기사라 칭송받았던 가엘 베르트란 장군이 어쩌다 이리되었나.
그러나 소년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나의 조국 오르토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오명이든 짊어질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까짓 돈 귀신이라는 별명쯤이야…….’
로건은 이제 자신도 한걸음 전진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저 시슬레를 보라.
쪽쪽이를 물고 성황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이제는 혼자서 능히 허수아비를 부수고 또 수리하는 늠름한 성기사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아멜리아 누님은 또 어떤가.
마냥 돌봐주어야 할 여리고 어린 소녀였건만, 어느새 훌쩍 성장하여 성황과 성진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지지하는 노련한 위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성진도 마찬가지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수를 썼는지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지.
황도에서 멍청히 시간만 죽이고 있던 자신을 행동으로써 크게 질타하고 있는 거다.
‘이성진, 네가 찾아 준 삶의 목적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어. 이제부터는 나도 제대로 돈을 벌어 보이겠다. 더 이상 네게 부끄럽지 않도록.’
* * *
툭툭.
“저하,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까부터 간헐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황자를 향해 마사인이 물었다.
“어, 마사인 경. 아무것도 아냐.”
성진은 고개를 휘휘 저어 보이고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툭툭 귀를 두드렸다.
‘귀에 뭐가 들어갔나? 왜 이리 가렵지?’
게다가 아까부터 묘하게 껄끄러운 느낌이 든다고.
오랜만에 전장이라 부를 만한 곳으로 향하기 때문인 걸까? 뭔가 싱숭생숭한 것 같기도 하고.
성진은 현재 2차 병력의 끄트머리에 붙어 마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르덴은 물론 상주기사들과 성기사들도 함께다.
“이랴!”
귀를 두드리느라 잠시 뒤처졌던 성진은, 곧 능숙하게 말의 속도를 올려 행렬을 따라잡았다.
출발 당시만 해도 그다지 익숙지 않은 승마였지만, 몸으로 하는 것은 언제나 빨리 배우는 성진이었다.
“어때, 막스? 네 생각에는 우리가 이길 것 같니?”
발치에 졸졸 따라붙어 오는 늑대개에게 장난스럽게 묻자, 놈은 호박색의 맑은 눈으로 성진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우우우.
막스가 주둥이를 들고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아우우우.
이에 경계하듯, 길게 늘어지는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어느새 마경의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적나라한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