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0)
성황의 아이들-210화(210/469)
210. 라이칸슬로프 로드 (4)
빈센트 지그스문트.
전 지그스문트 변경백이자 대륙에 몇 없는 데카론 나이트.
그는 3개의 거대 빙벽을 완성하여 마경의 경계를 안정화시킨 장본인이다. 장성한 아들에게 백작위를 이양한 이후에는 남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명장으로서 위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일신의 무위도 뛰어났지만, 동물적인 직감으로 아군을 여러 차례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것으로도 유명했다. 신성력이 전무함에도, 그 예민한 감각으로 악마종까지 간파해 낸 적도 있다나.
물론 성진의 눈으로 직접 본 그는 고집불통의 노인네에 불과했지만.
“모레스 황자라고? 내가 그의 얼굴을 정말 모를 것 같은가? 에잉! 나는 속지 않는다!”
마사인이 제대로 예를 취할 것을 재차 종용했으나, 노인은 완고한 태도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황자라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하지만 저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척, 그건 절대 보통 인간의 것이 아니다! 살인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 평화로운 시대에 어찌 저런 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필시 저쪽은 오르토나 내전과 남부 전선을 오가며 평생을 구른 게 빤하다!”
그나마 ‘저놈’이 아니라 ‘저쪽’이라 칭하는 걸 보니, 노인도 나름 눈치는 보는 모양이었다. 악마라면 모를 리 없는 성기사들이 성진을 계속 감싸고 있으니 그로서도 긴가민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 눈치로 넘어갈 수 있는 불경죄는 아니지만.
“다시 경고하지 않겠소, 빈센트 경. 어서 저하께 깊이 사과드리고, 그대가 마땅히 보여야 할 적절한 예를 보이시오!”
“마사인 님! 필시 저쪽이 모종의 방법으로 당신과 성기사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오! 그것을 정녕 모르시겠소?”
“그대가 정말 끝까지……!”
좋구나. 이 불경죄들을 다 무마시키려면 변경백도 골머리 좀 썩이겠는데.
이참에 지그스문트령에 새로운 상단과의 거래를 강제하고, 중계 수수료라도 쏠쏠하게 챙겨 볼까.
내심 그런 계산을 하며 성진은 빈센트 노인네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 봤을 때 로건도 그런 말을 했어.’
성진의 기척은 모레스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했지.
소드 마스터도 아닌 노인네가 알아채는 것을, 그 로건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지구에서 보낸 투쟁의 기억들이 현재의 기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거라 성진은 짐작했다.
‘그렇다는 말은, 적어도 내가 어린 모레스일 당시는 지구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겠지.’
어떻게 자신이 모레스일 수가 있는가.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성황의 경고를 고려해, 자신도 로건처럼 델크로스에 환생한 게 아닌가 하고 대충 넘겨짚고 말긴 했다.
그런데 모레스일 때는 분명 성진의 기억이 없었는데, 또 성진에게는 모레스의 어린 시절 기억이 없다니?
‘무엇보다도 로건이 이걸 순순히 믿어 줄까? 아버지가 확인해 주셨지만 어디까지나 심증뿐이고, 사실 명확한 증거라고는 없는데…….’
성진이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옆구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추스른 오르덴이 노인에게 무섭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할아버님, 제발 더 이상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마십시오!”
“뭐라? 먹칠? 너는 지금 이 할애비가 부끄럽다는 말이더냐? 이 괘씸한 놈! 내가 누구냐? 이 빈센트 지그스문트는 대륙 제일의 기사라는 발타자르와도 호각을 다투는 몸이다!”
그러나 오르덴의 표정은 냉랭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스승님과 비교하실 정도는 아니시지요. 스승님은 소드 마스터이시지만, 할아버님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뭣이? 이런 고얀! 이 위아래도 몰라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방금 저하께 큰 불경죄를 저지르시고, 지금 누구에게 위아래를 몰라본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면 오르덴은 대륙 제일의 기사 발타자르의 수제자로도 유명했다.
왜 데카론 나이트인 할아버지를 두고, 굳이 다른 스승을 모시고 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너무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영지를 기꺼이 돕고자 오신 분께 이 이상 무례를 범하시는 건 제가 용납 못합니다!”
“이놈이! 감히 누구에게 용납하니 마니 하는 것이냐!”
“지그스문트령의 대공자로서, 제국에 항거하는 불온 분자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빈센트 노인네가 분노로 턱을 덜덜 떨었다.
“지금, 지금 네놈이 제 할애비를 불온 분자로 몰아?!”
“사실이 아닙니까?”
“넌, 네놈은 대체 혈육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설사 그게 사실이라도, 제 혈육의 편에 서서 끝까지 감싸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자 오르덴의 눈에서 파란 불똥이 튀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혈육이 그렇게 소중하신 분께서, 어린 시절 아멜 황녀님께 그런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뭐… 뭐?”
그 말에 노인네가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서 왜 갑자기 그 얘기가 나오는 거냐? 이미 다 지난 일이다.”
“할머님이 그렇게 집요하게도 괴롭혔는데, 언제 한 번이라도 황녀님을 감싸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이놈아! 이제 그만!”
잠깐.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지그스문트 백작가가 누님의 외가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순간 무엇을 느꼈는지 흠칫, 브루노 단장이 몸을 떨며 성진을 돌아본다.
“…저하?”
그의 경악에 찬 시선을 무시하고, 성진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난처한 얼굴로 보고 있는 마사인을 불렀다.
“마사인 경.”
“네, 저하……!”
무심코 고개를 돌린 마사인의 얼굴에 일순 핏기가 가신다.
“내가 예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말이네. 대공자가 말하는 아멜 황녀가, 설마 아멜리아 누님을 말하는 건가?”
“저하, 그것이…….”
“저 노망난 노친네가, 누님께, 뭘 했다고?”
“…….”
폐하께서 아멜리아 황녀님을 찾으시기 전까지, 백작가에서 황녀 저하를 박대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단지 지금까지 폐하도, 황녀님도 달리 이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없었던 터라, 그저 뜬소문이라고들…….
마지못해 그렇게 설명한 마사인은, 불안한 시선으로 성진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그가 당장이라도 호두까기를 뽑아 들고 무작정 노인네에게 달려들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그렇게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적어도 공식적으로 내가 먼저 검을 뽑지는 않을 거다. 진짜야.
성진은 일행의 걱정 어린 시선들을 일별하고는,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님은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쓸데없는 데 열을 내시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눈을 감아버리시죠!”
“아니, 내가 언제……!”
목청을 높이던 노인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뭐, 뭐냐. 그 눈초리는. 지금 나와 사생결단이라도 내겠다는……!”
“왜, 내가 못할 것 같은가?”
뭐, 겉보기에는 하급 기사가 데카론 나이트에게 대드는 꼴이겠지.
하지만 그거 아나? 조금 힘은 들겠지만, 제법 많은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댁을 상대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는 그려진다고.
그런 계산이 서는 상대의 말로는 사람이든 마물이든 언제나 같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땅 위에 서 있는 것은 내가 될 테니까.
“고작 그 정도의 오러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의심스러우면 눈 딱 감고 덤벼 보는 게 어때? 어차피 날 악마라고 의심하고 있지 않나? 아마 그 검을 뽑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영감.”
나도 바라마지 않는 바니까.
성진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리자, 잔뜩 긴장한 노인이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저하, 이게 대체?”
그제야 조금 머리가 식는지, 오르덴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성진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촉즉발의 상황.
“저하!”
아무래도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마사인이 성진의 앞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곧이어 브루노 단장의 신호를 받은 기사들이 앞다투어 성진과 노인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노인네가 슬그머니 검을 내려놓았다. 일순 황자에게서 뿜어져 나온 압박이 어찌나 위압적이었던지, 데카론 나이트가 하마터면 정말로 기세에 눌려 검을 뽑을 뻔한 것이다.
“쯧.”
성진은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노망난 노인네라도, 남들 앞에서 황가의 일원에게 무기를 뽑지 않을 정신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저하……!”
정말로 황자가 데카론 나이트와 대거리할 작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사인은, 이제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성진은 그런 마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저대로 놔두지, 마사인 경. 노인장이 영지를 위해 과로하다 조금 노망이 든 모양이네. 저런 심신이 미약한 노인에게 차마 반역의 죄를 물을 수는 없지 않나? 이야기는 제정신인 사람들끼리 해야지. 지금 바로 변경백을 만나겠다.”
반역.
오르덴이 불온 분자라는 말을 써 가면서도 피하고 싶었던 무거운 죄목.
황자는 지금 변경백에게 수틀리면 ‘반역’의 죄목까지도 언급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그것은…….”
뒤늦게 노인이 입을 뻐금거렸지만 성진은 노인에게서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애초에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황자가 앞장서서 2차 빙벽을 향해 걷기 시작하니, 오르덴과 근위대 기사들, 그리고 성기사들이 잠자코 그 뒤를 따른다.
이윽고 성진 일행이 저만치 멀어지자, 그제야 빈센트 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큰일이군. 정말 황자가 맞는 모양이야. 그 살벌하게 웃는 얼굴 하나는 확실히 제 아비와 똑같구먼.”
* * *
성진 일행이 3차 빙벽에 마련된 기지에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이었다.
우우우우-
여기서는 라이칸슬로프들의 울음소리가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빙벽에 올라서서 설원을 내려다보니, 환하게 빛나는 여러 쌍의 안광이 이쪽을 살피며 희번덕거렸다.
“여기로 바로 덤벼오지는 않는 모양이군.”
“네, 저하. 빙벽 바깥에도 얼음으로 만든 기지와 초소들이 있습니다만, 간간이 그것들을 건드리기는 해도 아직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미리 도착하여 기지를 정비하고 있던 일마 경이, 성진 일행을 맞으며 그렇게 설명했다.
무리 지어 병사들을 사냥하던 평소의 행태와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뭔가를 시험하는 듯하기도, 혹은 빙벽으로 병사들을 몰이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아마도 무리 사이에서 목격되었다는 로드의 존재 때문이리라. 그 개체가 라이칸슬로프들을 조직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몰이를 한다라. 무엇이 목적인지 모르는데, 이대로 병사를 집결시켜도 괜찮은 건가?”
마왕의 영안을 빌어, 밝은 보랏빛으로 빛나는 라이칸슬로프들의 그림자를 확인한 성진이 물었다.
“놈들의 노림수가 무엇이든 크게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놈들이 3차 빙벽을 넘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니까요. 초소의 병사들도 오늘까지 모두 빙벽 안으로 후퇴를 마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저들의 군세를 맞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피해는 사망자 하나와 부상자 조금.
어처구니없게도 후퇴하는 병사들이 동시에 빙벽을 넘지 못해 벌어진 피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설원을 향한 입구라고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틈이 다다. 그마저도 지금은 지렛대로 굴린 커다란 돌에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로 드나든다고?”
“보통은 여기도 막혀 있습니다. 급할 때는 빙벽에서 사다리를 내리죠.”
위에서 줄사다리를 내리거나 밧줄로 끌어올려 주는 구조였다. 그나마 오러 유저들이라면 손쉽게 벽을 딛고 올라올 수 있지만, 심한 부상이라도 당한 뒤에는 벽을 넘기가 난감할 수 밖에 없으리라.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제대로 성문을 만들지 않나?”
아무리 방어를 위해서라지만, 입구가 저렇게 좁아서야. 적어도 말이 이동할 정도는 되어야지 않은가.
“그것이, 문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빙벽 사이에 제대로 문을 설치할 수 없기에 생긴 문제였다. 어떤 구조로 만들건, 어떤 재질로 만들건, 다음날이 되면 문째로 벽에 꽝꽝 얼어붙기 일쑤였으니까.
여닫이문을 만들면 경첩째 벽에 얼어붙어 버리고, 도르래로 문을 끌어올리려 해도, 쇠사슬째로 도르래에 얼어붙었다.
애초에 빙벽이란 것이 제대로 축대를 쌓아 만든 구조가 아니다 보니, 문의 하중을 버티는 것도 문제였다. 간혹 축 없이 걸쳐진 도르래의 과중한 하중으로 얼음벽에 금이 가는 사태도 생겼다나.
“흐음, 그렇군.”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일마 경이 의아한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다들 분위기가 왜 이런가요? 오시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수일간 함께 여행을 한 덕분일까, 묘하게 경직된 일행의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이다.
게다가 매사 무관심한 듯 뚱한 얼굴이던 황자가, 오늘은 유난히도 말똥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긴. 그냥 여기까지 오느라 조금 지친 모양이지.”
성진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일마 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일마 경. 조금 늦은 시각이기도 하니 설명은 이쯤 듣고, 지금 바로 지그스문트 변경백을 만나볼 수 있을까?”
드물게 보는 황자의 점잖고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순간 일마 경은, 어째서인지 등줄기로부터 심한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