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1)
성황의 아이들-211화(211/469)
211. 라이칸슬로프 로드 (5)
“지금 바로 변경백을 만나볼 수 있을까?”
성진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변경백으로부터 이 면담에 관한 사전 언질이 있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잠시 굳어있던 일마 경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저하. 가주께서 저하를 맞이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바로 막사로 모시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황족이라고 해봐야, 전력으로 써먹지도 못하는 짐덩어리에 불과한 것.
그럼에도 울프 기사단의 단장이 마중 나와 기꺼이 기지를 구경시켜주는 데는, 아마도 변경백의 특별 지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빈센트 노인과의 마찰에 관해 어느 정도는 전해 들었을 테지. 그러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그리고 빙벽의 위용에 정신이 팔린 어린 황자가 조금이나마 기분을 누그러뜨리기를. 어쩌면 빈센트 노인의 무례를 깜박 잊어버리는 요행이라도 생기기를 바라는 거다.
[…야.]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마 경의 뒤를 따라 걷고 있자니, 마왕 놈이 조심스럽게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왜 계속 웃고 있는 건데?]놈의 말대로, 성진은 아까부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중이었다.
‘어, 아무것도 아냐. 변경백은 생각 이상으로 빈틈없는 자 같아. 그게 기뻐서.’
[어엉? 기쁘다고?]그래.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그는 오르덴 놈처럼 허우대 멀쩡한 허당이 아니라는 거지.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자기 몫은 충분히 지킬 역량이 되는 놈이다.
‘그 말인즉, 죄책감 가지지 않고 마음껏 털어먹어도 된다는 의미인 거지.’
[…에휴, 어쩌다 이런 놈에게 잘못 걸려서…….]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근데 이놈은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일행은 천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삭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일까, 천막과 천막 사이를 얼음벽이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움막들 같은 모습이었다.
“얼음 천막이라니, 보기만 해도 추워요.”
코가 빨개진 클로디아 경이 부르르 몸을 떨며 중얼거리자, 일마 경이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들어가 보면 생각 외로 보온이 잘 되어 놀랄 겁니다, 클로디아 경. 천막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따뜻하죠.”
그 말대로 보온을 위해, 천막 위에도 소복한 흰 눈이 빠짐없이 덮인 채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클로디아 경은 또다시 좌절했지만.
“천막에 아예 연통이 없네요…….”
물자가 부족한 이곳에서는 불을 때는 것도 사치. 추위 따위, 일신의 오러로 버텨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진 일행은 얼음 천막들의 정중앙, 작전회의실 겸 가주의 숙소로 사용되는 가장 큰 천막에 안내되었다.
“신성제국의 3황자님을 뵙습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변경백이 천막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헨드릭 지그스문트.
데카론 나이트인 아버지와, 천재 검사라 불리는 아들 사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알려진 남자.
“성황가의 자제분께서 몸소 빙벽을 살펴 주시다니, 지그스문트령의 더없는 영광입니다.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는 무게감 있고 수더분해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었다. 반듯하게 잘생긴 이목구비가 오르덴과 많이 닮아 있기도 했다.
단지 대충 면도하여 수염 자국이 남아있는 턱과 부스스하게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그의 인상을 한없이 평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물론 성진의 눈썰미에는 다른 것들이 들어왔지만.
‘의복은 정갈하고, 수염은 일부러 남기고 있군.’
서재에서 받은 인상과 마찬가지, 아무래도 의도된 흐트러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더는 그와 탐색을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변경백. 난 그대와 둘이서 담판 지을 일이 있어.”
“…….”
변경백은 황자의 돌직구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일마 경에게 일러 다른 일행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겨우 단 둘이 남게 되자, 그는 성진에게 자리를 청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앉으시지요, 저하. 다행히 이 천막은 규모가 큰 덕에, 별다른 환기구 없이 작은 화로를 놓을 수가 있습니다. 빙벽 기지에서 여간해서는 누리기 어려운 호사지요.”
그리고 성진이 망토를 벗으며 자리에 앉자, 손수 그것을 받아주며 가볍게 알은체를 했다.
“그나저나 작년 탄신연에 뵈었을 때와는 무척 달라지셨군요. 안면 없는 사람이라면 저하를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착각하겠습니다.”
성진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래서, 빈센트 노인네의 불경이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 물타기가 하고 싶은 건가?
“그래. 이해하네. 사리 분별이 늦는 자라면, 못 알아보고 실수 할 수도 있겠지.”
“네? 그것은…….”
“하지만 실수를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음에도 뉘우치지 않고 오만방자하게 군다면, 그자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거나 제국에 불온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일 거야.”
“저하…….”
“어떤가? 이제는 제정신을 차렸다나? 사죄를 위해 무릎이라도 꿇겠다던가?”
“…….”
성진의 서늘한 시선과 변경백의 건조한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상대가 어떻게 슬슬 구워삶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변경백은 자세를 바로 하고 성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님께서 최근 마경을 살피시느라 많이 무리를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한때 제국의 명장이라 불리셨으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처럼 사리 판단이 흐려지실 때가 있지요. 자식으로서는 무척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침중했다. 정말로 노쇠한 부친의 쇠락을 슬퍼하는 자식이 낼 법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부친이 델크로스를 위해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이 무례를 어찌 사죄드려야 할지요.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가 저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 무릎을 꿇으라시면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제국에 몸 바친 노장의 노고를 생각하시어, 저하의 관대하신 처분을 부탁드립니다.”
성진은 침통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짝 메말라 있는 변경백의 눈을 살폈다.
말만으로 조금이나마 면피할 수 있다면 무슨 소린들 못 하랴.
일견 영주의 자존심을 모두 버린 듯 보이지만, 실제 변경백은 성진이 그런 사과를 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딱히 실리가 없으니까.
‘아마 최근 며칠간의 내 동태를 모조리 보고받고 있었을 거야.’
황자가 일부러 백작가의 식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다 빈센트 노인의 무례를 그 자리에서 바로 꾸짖지 않은 것도.
그렇다면 이제는 그도, 성진이 백작가를 상대로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겠지.
“그래. 그대의 입장은 내가 충분히 이해하네.”
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일세, 그 노망난 노장께서 하필이면 데카론 나이트로군.”
“…….”
“오러의 균형을 이뤄 심신을 완성시킨 데카론 나이트가 노망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변경백은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성진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인즉, 그는 노망난 게 아닌 정말 불온한 자이거나, 혹은 데카론 나이트가 아닌 거겠지.”
“그 말씀은…….”
“불온한 자라면 데카론 나이트인 채로 내버려 둘 수 없다. 만일 데카론 나이트가 아니라면, 어차피 그를 대체할 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상관없지 않은가. 그대의 말대로 사리 판단이 흐릴 정도라면, 이제는 그 손에서 검을 빼앗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변경백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쯤 되면 그도 더 이상 사람 좋은 척 관성적인 미소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저 황자가 지껄이는 말은.
“저하, 지금 데카론 나이트의 오러를 폐하신다는…….”
변경백의 목소리가 충격으로 떨렸지만, 성진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전례가 없지는 않아. 그대도 알지 않나?”
“…….”
“참 공교로운 일이군. 우연히도 그의 죄목 역시 불경죄였지. 제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오러를 폐했다네.”
변경백 역시 그 일화를 모르지 않았다.
브루노 그린.
평민 출신으로 데카론 나이트에 이른 그 입지전적인 인물을.
“알겠나? 성황가를 향한 불경죄란 그리 무거운 것이다. 한때 제국의 명장이라 불리었기에, 마경 최후의 교두보라 불린 자였기에, 내 모두의 앞에서 노장에게 망신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배려를 알았다면, 이제라도 그대들이 내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명확하지 않나?”
“…….”
완전히 표정이 가신 변경백을 향해, 반대로 성진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말을 해주고 싶네, 지그스문트 변경백.”
성진은 의자의 손잡이를 습관처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지금껏 최대한 그대의 편의를 위해 애썼네. 황도에서 쌓은 그대 아들과의 친분을 봐서 말이야. 알고 있나? 나는 내 안전을 빌미 삼아, 황도에 대규모의 병력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어.”
그랬지.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없는 성진이 생각하기에도, 다른 영지에 멋대로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름 파장이 적고 또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지. 그것이 바로 릴리움 별동대였다.
“릴리움 별동대는 델크로스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집단 중 하나이며, 교회의 입김에서도 한 발 벗어난 부대지. 거기다 마수에 대항해서는 최고로 뛰어난 정예부대라고 자신하고 있어. 내 덕분에 적절한 도움을 받고, 또 영지에서 외부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마수 사태를 해결하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나?”
“…….”
잠시 말이 없던 변경백은, 이윽고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얼굴에 스쳐가는 옅은 낭패의 기색을 발견한 성진은, 경직되었던 자세를 풀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우리 밀로 상단에서 수거한 물품들에 관해서 먼저 의논하지.”
[…에휴, 어쩌다 이런 놈에게 잘못 걸려서…….]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근데 이놈은 아까부터 왜 자꾸 엉뚱한 쪽에 이입하고 있는 거야?
이후의 대화는 일사천리였다.
“마기에 오염되었던 물건들입니다. 그것들을 다 제값을 받으신다는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가격을 더 쳐줘야 하지 않을까?”
“…네?”
“무려 주신의 기적으로 정화되어, 축복까지 내려진 신성한 물품들이 되었네. 그걸 지금 그냥 날로 먹겠다는 건가?”
“아니…….”
처음에는 그냥 제값으로 만족할 예정이었지만, 아까 일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이윤을 듬뿍 남겨서 누님에게 드릴 선물이라도 사 가야겠어.
“밀로 상단주 자코모 밀로는 악마계약자의 혐의로 구속될 거야. 밀로 상단은 이제 끝이지. 그러니 그와의 독점 계약을 중단하고, 약차의 유통도 당장 중지하도록 하게.”
설마 여기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겠지.
변경백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는 다른 상단과 거래를 트게. 내 조건은 그대가 어느 한 상단과 독점 계약을 맺지 말고 적어도 2개의 상단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것. 그리고 그중 하나의 상단은 상인 연합의 슈미트 지부장에게 소개를 받는 것이다.”
슈미트 지부장? 왜 갑자기 그가 나오는가.
변경백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슈미트 지부장은 이미 성진의 수족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가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아마도 상인 연합의 실세인 아세인 대공의 입김이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그것으로 저하께서 얻으시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이익이라니,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델크로스의 황자다, 변경백. 자나 깨나 신민들의 안위를 생각할 뿐이지.”
“…….”
변경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이 허울 좋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 자도, 들은 자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네가 순순히 그 악마에게 좋은 일을 시켜 준다고? 솔직히 말해봐. 대체 무슨 꿍꿍이야?]뭘, 그냥 중간에서 나도 이익이나 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게다가 슈미트에게는 약간의 빚이 있다.
키프로스를 거치지 않고, 오르토나에서 자체적으로 참연어를 공급받을 안정적인 루트를 만들라고 지시했더니, 다 죽어가는 얼굴을 했거든.
투자해야 할 초기 자금이 만만치 않다나.
[근데 왜 하필 참연어야? 장사를 시작하기에는 더 효율적인 물품이 많을 텐데?]그야, 내가 제일 관심 있는 품목이 참연어이기 때문이지.
말했잖아? 황도에 참연어 전문점을 열거라고.
‘…그리고 또 뭘 뜯어낸다?’
그런 고민을 하며 찬찬히 천막 안을 살피는데, 갑자기 성진의 눈을 확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어?”
* * *
“마사인 경. 이것 좀 봐!”
그날 밤, 변경백과의 면담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온 성진이 마사인에게 소리쳤다.
“나 변경백에게서 엄청난 걸 받아 왔어!”
마사인은 눈을 끔벅거리며 잠시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위의 기온이 뚝뚝 떨어질 듯 한기를 흘려대더니, 그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기분이 풀려서 팔짝팔짝 뛰어오는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신이 난 성진이, 그의 앞에서 들고 온 길쭉한 물건을 풀어헤쳤다.
“…헤네시스 장검?”
꾸러미 속에서 나타난 것은, 보기에도 살벌한 긴 검이었다.
어느 오르토나의 이름난 명장이, 나라가 쪼개지기 직전 분노와 회한을 가득 담아 만든 마지막 무기.
일견 로건의 검과 비슷한 크기였으나, 그 생김새는 아르쥬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유려한 물결을 이루는 아르쥬나의 곡선과는 달리, 칼날에서 삐죽삐죽 솟아난 날카로운 돌기들은 마치 톱날이나 가시처럼 흉흉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 재질은 또 어떠한가.
특수 금속으로 짐작되는, 마사인은 들어본 적도 없는 시커먼 색의 철이, 잘 갈린 톱날을 따라 섬뜩한 광택을 흘렸다.
“어때? 아멜리아 누님에게 선물할 건데?”
…뭐?
마사인은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외람되오나 저하. 이것은 꼭 악마 들린 검 같습니다.”
마치 어느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왕이나 들고 다닐 법한 흉흉한 외관이 아닌가.
이런 검을 한 떨기 장미꽃 같은 아멜리아 황녀에게 선물한다고?
그런데 마사인의 솔직한 평가를 들은 성진이, 그를 향해 기쁜 듯이 활짝 웃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그지? 악마의 검 같지? 그러니까 이게 딱이야! 이거 완전 누님 취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