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17)
성황의 아이들-217화(217/469)
217. 화원 (3)
전투를 시작하기 전, 성진은 상당한 난전을 예상했다.
이는 예전에 미궁 보스룸에서 싸웠던 그 라이칸슬로프 로드를 고려한 생각이었다. 당시 오르덴과 둘이서 놈을 상대로 제법 고전을 하지 않았던가.
지금 눈앞에 있는 가짜 로드 역시, 그놈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월등히 강한 신체와 오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이성이 흐리다고는 해도, 다른 놈들과 함께 다짜고짜 덤벼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데 지금, 그 마수들의 우두머리가 자신들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진과 루이제 둘 모두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저놈이 지금까지 멍청히 서 있던 이유가……!’
붉게 핏발 선 눈과 흐릿한 초점은, 제대로 이성이 돌아온 이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일몽이라도 보는 듯 몽롱한 얼굴에 떠오른 놈의 표정은, 짓눌리고 뒤틀린 회환과 비애가 뒤얽혀 마치 희열에 찬 듯 보이기도 했다.
이는 누가 봐도 명백한 지적 생명체의 모습.
성진은 잠시 움찔했지만 호두까기를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전히 남아있던 두 마리의 라이칸슬로프가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으르르르!
컹컹컹!
타앗. 성진은 호두까기를 휘두르는 대신,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저놈이 저러는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일단은 이 상황을 완전히 정리해야겠지.
‘두 마리 정도는 금방 잡을 수 있지만…….’
하지만 이 마수들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알게 된 후다. 이후의 공격에는 자연히 신중을 기할 수밖에.
그렇게 아까까지와 달리 조금 더 시간을 들여가며, 성진은 남은 두 라이칸슬로프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저하…….”
그러는 동안에도 루이제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가짜 로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스타드 소드를 쥔 두 손은 이미 힘없이 아래로 처져 있다. 전투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루이제.”
성진이 다가가며 부르자,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검은 눈동자가 그를 돌아본다.
경악, 희망, 죄책감, 연민.
나이답지 않은 침작함을 유지하던 소녀에게서 드물게 보이는 원색적인 감정들의 소용돌이다.
“저하. 저는 이들을…….”
저들은 이미 자신의 동족이 아니라고, 이지가 없는 마수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며 검을 휘둘렀는데.
혹시 자신은 스스로의 안위에 눈이 멀어, 동족들을 위한 길을 모색하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해버렸던 것이 아닌가.
자신은 이미, 두 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저는 어쩌면 동족들을…….”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말끝을 흐린다.
그때 루이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짜 로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동족.”
크르르르.
뾰족한 마수의 주둥이가 저주파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명확한 의미를 가진 음절을 내뱉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제국의 언어였다!
“…나의 동족.”
그와 동시에 가짜 로드의 상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성진과 루이제를 응시하고 있었음에도, 어쩐지 초점이 흐릿하던 눈에 처음으로 그들을 향한 또렷한 인지의 기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라이칸슬로프가, 제국 공용어를?”
경악한 루이제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는데-
크크킁.
크게 코를 울려 눈물을 들이마신 가짜 로드가 한층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동족이군. 이 그리운 느낌은 분명 네브라스카의 유지…….”
그리고 가짜 로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회환으로 가득한, 더없이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그대들이 그 악마 놈의 [화원]을 없애주려 하는가! 미몽에 사로잡힌 불쌍한 동족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주려는가!”
* * *
라이칸슬로프, 바즈라.
그는 멀게나마 전설의 라이칸슬로프 로드, 네브라스카의 피를 이은 마지막 순혈 라이칸슬로프였다.
[재앙]이 범람하여 이오니아의 모든 것을 뒤덮었던 그날.일족을 임시 피신처로 대피시킨 라이칸슬로프 로드 무라트가 그에게 명했다.
-남은 동족들을 온 힘을 다해 지켜라, 바즈라.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6인 회의’의 헛된 말에 속지 말고 네 판단으로 이들을 이끌어라. 이제 내게 믿을 자는 그대뿐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비장하게 떠난 로드 무라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을 찾아온 ‘6인 회의’의 대표라는 자가 냉정한 목소리로 잔혹한 선택을 강요했다.
-그대들 스스로 자결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내 손에 죽을 것인가.
모두를 몰살시키겠다는 것이 빈말은 아닌 듯, 그는 이미 회색의 검을 한손에 뽑아 들고 바즈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비치지 않은, 불길하게 빛나는 은빛의 눈동자였다.
그때 그의 옆에 함께 있던 베르세우스, 그 마경의 교도관이 다급하게 제안했다.
-이러면 어떻겠소? 차라리 델크로스로 몸을 피합시다. 모두를 살리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나, 그래도 동족의 일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마경으로 열리는 길을 최대한 열어 두겠소.
바즈라는 망설였다. 베르세우스가 관리하고 있는 [마경]이란, 순혈의 라이칸슬로프가 발을 디디기에 결코 좋은 땅이 아니었으니까.
그곳은 [정수]와의 연결을 잃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동족이, 추악한 짐승의 되어 죽을 때까지 헤매고 돌아다녀야 하는 비참한 감옥이었다.
하지만 고뇌하는 그에게 베르세우스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이대로라면 동족은 모두 저자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뭘 망설이는 거요? 로드 무라트께서 그대에게 동족의 미래를 맡기지 않았는가?
결정은 빨랐고, 별다른 방해는 없었다.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6인의 회의’ 대표는, 검을 갈무리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또한 그대의 선택이라, 내게 허락된 인과가 아니구나. 하나, 그대는 지금 동족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희미하게 스쳐가는 연민의 감정.
갑자기 바즈라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으나, 마경으로 향하는 문은 이미 열렸고 동족들은 앞을 다투어 필사적으로 마경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동족은 임시 피난처에 있던 이들의 반도 되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들이닥친 붉은 [재앙]이, 동족의 후미를 무자비하게 쓸어가 버리더니 순식간에 그들의 코앞으로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마경을 닫아라! 베르세우스!
어떨 수 없이 공포와 절망으로 아우성치는 동족들의 앞에서 매정하게 차원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깊이 좌절한 바즈라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잠시 사라져버린 동포들을 애도했다.
바로 그때였다.
-푸하하하하하하!
그의 옆에서 거침없는 광소가 들려온 것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든 바즈라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마경의 교도관을 마주하게 되었다.
-베르세우스?
-하하하하! 이 멍청한 짐승들 같으니! 잘난 척, 긍지 높은 척, 숭고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다급해지니 스스로 죄수가 되고자 뛰어드는 꼴들이라니!
-…뭣이?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그를 바라보는 베르세우스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제 네놈들은 모두 나의 죄수다!
동시에 코끝으로 밀려드는 달큼한 꽃향기.
그것이 바즈라가 선명하게 인지하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마경에 이르는 순간, 분명 동족들의 정신이 흐려질 거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소. 그래도 어느 정도 동족들을 재정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리라 여겼건만…….”
“…그 꽃향기라는 건 무엇이었습니까?”
루이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향기를 내뿜는 푸른 꽃이오. 오래전부터 마경 깊은 곳에 자생하던 것이지. 그렇기에 이곳이 예로부터 동족들의 감옥으로 사용된 거요. 이성을 잃은 그들이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혹은 괜히 고통받지 않도록.”
“감옥…….”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그 푸른 꽃이 온 숲에 가득 피어 있었소. 마경 의 중심 전체가 마약으로 가득한 [화원]이 되어 있었지!”
그렇게 말한 바즈라는, 성진과 루이제를 바라보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자의 경고가 맞았던 거요. 나는 지금 그날의 결정을 이이상 깊이 후회할 수가 없소이다.”
라이칸슬로프들은 그렇게 이성을 상실한 채 수년간 마경을 떠돌았다.
간혹 머릿속에 내려오는 지령을 의미도 목적도 없이 따르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
인간들을 습격해라.
깊은 마경으로 돌아가라.
라이칸슬로프들은 자신들이 죽는 것도 모르고 지령이 이끄는 대로 마수들과 세력 다툼을 했고, 그러다 허기가 지면 동족 포식을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처절하리만치 완전한 짐승의 삶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았을까. 간혹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던 바즈라는, 점차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잘그락 잘그락.
네브라스카의 혈통임을 증명하던 영광스러운 금세공품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거슬리는 소음을 일으키는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새로운 지령이 내려왔소.”
지령은 간단했다.
빙벽이 보이는 설원에 동족들을 모을 것.
그리고 협곡에서 뭔가를 찾아낼 것.
“뭔가를 찾아? 그게 뭔데?”
성진의 물음에 바즈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오. 그저 이것을 사용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
그가 내민 손바닥에는, 박동하듯 옅은 빛을 뿜는 작은 얼음 조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며칠이고 손에 쥐고 있어도 조금도 녹지 않는 괴상한 얼음이었다.
[헉, 이성진!]순간 마왕 놈이 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저건 규상세계의 물건이야!]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녹지 않는 얼음이라니, 이 세상의 자연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물건 아닌가.
‘우리가 규상세계 물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성진의 핀잔에 마왕이 애가 닳은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저 물건을 지배하는 규칙이 너무나도 강력하단 말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규상세계의 물건에도 등급이란 게 있어! 그리고 저건 분명 다시보기 어려운, 엄청난 등급의 물건일 거라고!]‘그래?’
[응! 나 저걸 자세히 좀 보고 싶어! 저거 우리 달라고 하면 안 될까?]이렇게 다짜고짜?
성진이 마왕 놈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바즈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는 이 얼음 조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협곡에서 얼음의 박동이 강해지는 곳을 찾아라. 그리고 빙하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확인해라.
자연히 성진 일행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협곡의 빙하 속에 뭔가가 있나?’
어쨌든 그때부터 며칠에 걸친 협곡 탐사가 시작된 것이다.
지도도 순번도 없는 무식한 탐사였지만 바즈라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들이 탐사를 마친 협곡은 라이칸슬로프들이 흘린 피로 흥건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잔인한 탐사는 얼음벽을 기어오를 라이칸슬로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끝이 났다. 갑자기 눈앞에 검으로 무장한 작은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동족을 잔인하게 도륙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본 순간 어쩐지 바즈라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동족이다!’
그래. 이것은 분명 동족의 기운이다.
의식의 저편에 묻혀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본능을 자극하는 그립고도 강렬한 기운.
그는 그렇게 해서, 지옥과도 같은 미몽의 세계에서 현실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부디 도와주시오! 네브라스카의 유지를 이은 자들이여.”
그렇게 말하는 바즈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이 다시 뿌연 안개로 뒤덮이기 전에. 동족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무자비한 [로드]가 이변을 알아채기 전에.
“마경 깊은 곳에 있는 그 꽃들의 [화원]을 없애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동족의 미래는…….”
방금까지도 바즈라의 동족을 무참하게 도륙하던 성진과 루이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옛 혈족의 희미한 기척을 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철저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바즈라의 절박함.
그 처절한 심정이 자아내는 열기가, 협곡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고스란히 둘에게 전해졌다.
“그 [화원]의 위치를 가르쳐 주십시오.”
루이제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거요?”
“결과적으로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알지 못합니다. 어차피 이대로 지그스문트령을 침략하는 한, 당신들이 맞이할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어도 당신들이 마경의 [꽃향기]에 홀려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만큼은 막아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이것은 제 진심입니다.”
“아아!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흠.
루이제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심신이 미약해진 동족을 돕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겠지.
‘근데 왜지?’
뭔가 이대로 두려니 썩 내키지 않는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성진은 바즈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봐. 어차피 어디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면, 그걸 나한테 좀 넘겨 주면 어떨까?”
그 말에 성진과 시선을 맞춘 바즈라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침 햇살 아래서 간혹 은회색으로 보이는 묘한 눈동자. 언젠가 그는,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저 눈을 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뭔가에 홀린 듯, 바즈라는 성진을 향해 얼음 조각을 내밀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그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호오.]바즈라의 머릿속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