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2)
성황의 아이들-222화(222/469)
222. 얼음의 심장 (3)
경계조가 글래쳐 트롤의 대규모 이동을 발견하기 전. 다행히 빙벽 기지 내에서는 조금 일찍 이상을 눈치챈 자가 있었다.
“빈센트 님!”
병사로부터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받고 허둥지둥 얼음 천막을 나오던 일마 경이 빈센트 노인과 맞부딪혔다.
벌써 무장을 완전히 마친 노인은, 설원 방향을 바라보며 무척 낭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자의 전갈이 왔을 때는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정말 글래쳐 트롤들이 올 줄이야.”
데카론 나이트의 확언이다. 결코 경계조의 착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선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일마 경은 그길로 빙벽에 올라 설원을 살폈다.
과연, 설원을 빼곡히 덮은 수많은 글래쳐 트롤들이 보인다. 울프 기사단에 몸담은 지는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런 그녀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광경.
거대한 얼음 괴물들이 일제히 엎드려 꿈틀거리며 기는 모습은 일견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것 참. 내 평생 글래쳐 트롤들이 저런 식으로 모여 다니는 것은 처음 보는구먼.”
그녀의 옆에 선 백발의 노장 역시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비빈다.
그나마 덩치가 큰 놈들이라 경계조의 발견이 빨랐던 것이 다행이랄까. 아직 놈들과는 수백 미터의 거리가 남아있다.
“30마리…….”
딱 떨어지는 숫자의 글래쳐 트롤.
빙벽 중앙을 기준으로 거의 대칭으로 나열한 채 똑바로 빙벽을 향하는 모습. 정말로 누군가가 이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인가!
문득 일마 경의 머릿속에 불길한 그림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글래쳐 트롤이 몸을 완전히 일으킨다 해도 빙벽의 높이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저런 조직적인 통솔이 가능하다면, 그래서 만에 하나 놈들이 한 지점을 노리고 계속 모여 들 수 있다면?
‘글래쳐 트롤로 이루어진 거대한 얼음의 언덕이 된다!’
만약 저 정도의 숫자가 낙오 없이 성공적으로 뭉치기만 한다면, 충분히 빙벽의 높이에 도달할 수 있겠지.
섬뜩한 상상이었다.
‘아니! 지금 이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일마 경은 고개를 저었다.
글래쳐 트롤의 위력 자체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놈들이 모두 무사히 이곳에 도착해 빙벽을 두드리기 시작한다면, 제아무리 빙벽이 두껍게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반면 놈들을 상대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제한될 터.
“최대한 설원에서 숫자를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발이 빠른 기사들을 데리고 나가서 놈들을 상대하겠습니다.”
빈센트 노인 역시 일마 경과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그리 하지. 나도 돕겠네.”
그렇게 일마 경이 서둘러 울프 기사단을 호출하여 정비하는 동안, 빙벽 위에서도 병사들의 대비가 한창이었다.
“습격이다! 글래쳐 트롤이다!”
“빙벽에 도르래를 걸어라!”
“궁수들 모두 위치로!”
당황한 것도 잠시. 평생토록 마경을 수비하며 단련된 병사들은, 무의식중에 몸에 익은 대처들을 밟아나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도 해가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여기저기에 환한 횃불이 걸리며 회색의 빙벽이 노랗게 물들었다.
“놈들이 직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는 화살을 아끼게. 차라리 후퇴하는 울프 기사단을 제때 끌어올릴 수 있도록, 후열의 궁수들은 도르래의 운용에 집중한다!”
“네, 단장님!”
“전열의 궁수들은 혹시 뒤에서 나타날 라이칸슬로프들을 최대한 경계하도록!”
아군이 뒤섞인 상황에서 목표 없이 쏜 화살은 양날의 검이다.
물론 눈먼 화살에 맞을 울프 기사들은 아니지만, 아군의 화살까지 신경 써가며 글래쳐 트롤을 상대할 필요는 없으리라.
어차피 어지간히 강한 오러를 싣지 않으면, 화살로 글래쳐 트롤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입히기는 어려웠다.
그때 젊은 울프 기사 하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놈들이 완전히 엎드린 자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죠? 다수가 몰려오는 것도 처음입니다. 교전 수칙에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요.”
본래는 조를 짜고 얼음 괴물을 둘러싼 후, 발치께부터 깎아나가 바닥에 닿는 면적을 줄인다. 그리고 내리막으로 움직이게 만들어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만든 다음 제대로 심장을 공략한다.
10미터에 이르는 얼음 괴물과 싸우는 정형화된 교전 수칙이었다.
그러나 일마 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 우려를 일축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닌가. 엎드리고 있어 봐야 놈들의 심장이 우리의 검격 안에 가까워질 뿐이야!”
“네!”
기합이 바짝 든 기사들의 머리 위로, 그녀의 추상같은 호통이 연이어 떨어졌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저놈들이 다라고 생각하지 마라! 놈들의 뒤에는 분명 라이칸슬로프들이 온다!”
한편 빈센트 노인에게 불려나온 헨드릭 변경백은, 사태를 파악한 순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함을 깨달았다.
“제2빙벽을 넓히는 공사를 서두르라 이르게. 그리고 제1빙벽에도 전갈을 보내 같은 일을 수행하라고 명하도록.”
“네? 하지만…….”
“빙벽의 일부가 무너져도 상관없다. 서둘러라!”
그렇게 병사를 윽박지른 헨드릭은, 빙벽의 망루를 초조한 눈으로 돌아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3빙벽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글래쳐 트롤의 습격을 알아차린 황자의 말이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무렵.
글래쳐 트롤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빙벽이 환하게 밝아지고 기지 내의 병력들이 바쁜 움직임들 보이자, 이미 들킨 것을 깨달았는지 일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빙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어어어-
우우우-
그때 막 빙벽 아래로 낙하를 준비하던 일마 경은 문득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명령에 뚜렷한 시간 차이가 있다?’
왼쪽에서 다가오는 절반가량의 글래쳐 트롤이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오른쪽에 있는 놈들은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포복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개의 명령 체계……!’
어딘가에서 이쪽의 상황을 확인하며 조종하는 놈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글래쳐 트롤들이 놈들이 준비한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일마 경은 울프 기사단을 향해 소리쳤다.
“울프 기사단은 모두 나를 따른다! 설원에서 하나라도 많은 글래쳐 트롤을 잡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빈센트 님. 잘 부탁드립니다.”
영지가 맞닥뜨린 전대미문의 상황.
지금 이곳에서 가장 믿을 만한 전력이라면 유일한 데카론 나이트인 빈센트 노인뿐이었다.
“그래. 내가 앞장서겠네.”
빈센트 노인이 그렇게 대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거참 이상하구먼. 이렇게 설원에서 정면으로 오다니. 나는 어쩐지 북쪽이 더 신경 쓰인다고 생각했는데…….”
“서둘러 주십시오!”
“알겠네!”
휘익! 그대로 줄도 없이 몸을 날린 빈센트 노인은, 무려 4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빙벽을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이어서 빙벽 곳곳에 도르래에 걸린 줄을 타고 울프 기사단 역시 속속 빙벽 아래로 낙하했다.
“5인 1조의 훈련 대형을 기본으로, 가장자리의 놈들부터 하나씩 정리한다. 전에 없던 다수의 난전이 될 듯하니, 각 조의 조장이 유동성 있게 놈들을 유인하고, 상황을 봐서 옆 조와 연계하도록!”
“네!”
그때 눈안개를 일으키며 달려나간 빈센트 노인이, 가장 선두에서 달려드는 글래쳐 트롤 하나와 거세게 충돌했다.
쿠앙!
놈의 다리 하나가 산산조각나며, 얼음 조각이 사방에 비산했다.
우우우우-
비명 아닌 비명소리를 신호로-
“모두 돌격!”
일마 경을 선두에 한 울프 기사단이 제각각 슈니슈헤를 펼치며 눈밭을 달려 나갔다.
* * *
“현재 빙벽 기지가 공격받고 있다고 합니다!”
북쪽의 협곡.
새벽같이 날아온 전갈에, 초소의 모두가 이른 기상을 했다.
“수십 마리의 글래쳐 트롤이라고……?”
서신을 받아든 오르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모레스 황자의 말대로 되었다고?
일행이 일제히 경악한 표정으로 황자를 돌아보았다.
“음?”
한참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던 어린 황자가, 모두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아무래도 라이칸슬로프 놈들이 글래쳐 트롤을 조종하는 것 같다니까?”
“…….”
오르덴과 그를 따라온 일행이 시선을 교환했다.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그스문트령이 마경의 파수꾼이 된 이례로, 그렇게 많은 글래쳐 트롤이 한곳에 모인 적도 없거니와, 다른 마수에게 조종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대공자님. 역시 서둘러 제3빙벽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빙벽 기지에는 일마 경은 물론 빈센트 님도 계십니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그렇지.”
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고 있는 사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잠시 협곡 부근을 바라보던 모레스 황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오르덴을 불렀다.
“대공자.”
“네, 저하.”
“아예 여기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영지로 후퇴하는 게 어떤가? 그놈들이 양동을 시도한다면, 소수의 병력이 이 초소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할 거야.”
“양동…입니까.”
만일 어제 이 말을 들었다면, 오르덴은 지체 없이 확언을 했을 것이다. 이성이 없는 짐승에 불과한 마수들이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글래쳐 트롤의 대규모 습격이 사실로 확인 되었다.
그렇다면.
‘마수들이 직접 움직이든, 아니면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든. 저런 조직적인 움직임을 만들 수 있는 자라면 양동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르덴은 글래쳐 트롤과 라이칸슬로프들이 일시에 이곳에 몰려드는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협곡 여기저기에 만들어진 초소들은, 바위투성이의 고지대에 제법 높은 빙벽을 두른 방어기지들이다.
그러나 결코 그 하나하나가 마수의 대규모 공세에 견딜 정도는 아닐 터.
‘상황을 봐가며 뒤늦게 후퇴를 하다간, 자칫 한곳에 고립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가 이동하며 초소의 모든 병력을 합류시켜 협곡 입구로 가는 쪽이…….’
3차 빙벽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협곡과 영지의 경계 부근에도 입구가 꽉 틀어 막힌 요새가 만들어져 있었다.
병력을 모두 그곳으로 이동시키고, 세바스티안 경에게 추가 인원을 보내라고 하면.
‘…버틸 수 있다!’
그가 그렇게 결론을 지을 때쯤이었다.
아우우우-
갑자기 늑대개가 협곡 너머를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황자가 뭔가를 떠올린 듯, 반짝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맞아! 확인하고 챙겨갈 것도 있었지.”
“네?”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 아까 내가 이곳으로 불러놨거든.”
“……?”
오르덴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예민한 기감에, 쿵쿵 지축이 울리는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
오르덴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가까이 다가오며, 진동 또한 거침없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잠시 후,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 하나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 글래쳐 트롤이다!”
“뭣? 글래쳐 트롤?”
초소의 모두가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쾅쿵쾅!
그 말대로, 진동과 함께 협곡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얼음 괴물이었다.
눈과 얼음 조각에 뒤덮여 이목구비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둔중한 생김새. 움직임에 맞춰 무수한 얼음 덩어리들이 마치 근육처럼 물결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익숙한 모습.
“정말 양동이었단 말인가……!”
오르덴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저하께서 영지로 피신하시기 전까지, 우리가 이곳에서 놈들을 막아야 한다!’
스르릉.
각오를 다진 오르덴이 검을 뽑아 들자, 챙챙, 그의 일행들 역시 앞다투어 놈을 향해 무기를 겨눈다.
바로 그때였다.
“오, 글래쳐 트롤이란 게 저렇게 생겼구나?”
모레스 황자기 태평한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어서 피하십시오!”
마사인 경이 기겁하며 그를 붙잡았지만, 황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오는 글래쳐 트롤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의아한 듯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어? 근데 한 마리가 모자라네?”
“…네?”
“다들 걱정 마. 쟤들은 내가 부른 애들이야. 우리 아군이라고.”
…뭐?
오르덴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황자는 조금 뿌듯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라이칸슬로프들이 이 얼음 조각으로 글래쳐 트롤을 부리는 것 같다고.”
“……!”
“그걸 증명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해봐야 할 테니까. 마침 이 얼음 심장에 개체 세 마리가 등록되어 있길래 그냥 소환해 봤어. 그런데 한 놈이 어디 간 건지 모르겠네.”
그게 진짜라고?
모두가 경악하고 있는데, 황자가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흠, 오다가 어디 빙하에라도 걸렸나 봐.”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쿵! 멀리서 또 다른 진동이 들려온다.
모두가 아연실색하여 멍하니 서있는 가운데, 오직 어린 황자만이 기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 다 온 모양이다. 봐봐. 난 벌써 얘들 이름도 다 지어 놨다고. 도착한 순서대로 각각 빙수 1호, 2호, 그리고 3호라고 부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