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8)
성황의 아이들-228화(228/469)
228. 방어전 (1)
“빙벽 기지가 위험해!”
난데없는 성진의 말에 일행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 겨우 적을 물리치고 한숨을 돌린 것 아닌가? 어째서 갑자기?
하지만 일행은 결코 황자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글래쳐 트롤의 습격을 미리 경고한 것도 모레스 황자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늘 뚱한 얼굴 일색이던 황자가 드물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글래쳐 트롤의 또 다른 위험성을 어서 빙벽 기지에 알려야 해!”
“다른 위험성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사인의 물음에 성진이 난처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그의 눈에, 흐릿한 안내창의 문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어와 박힌다.
〚분리 위치를 사용자가 지정하지 않을 시, 개체의 위치는 얼음 내에서 무작위로 지정됩니다.〛
만일 그의 예상대로 이걸 활용하게 된다면.
“…일단 내가 직접 보여줄게.”
성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빙벽 전체를 쭉 훑어보았다.
아마 이곳에 규상세계였다면, 얼음 괴물의 위치를 선정할 수 있는 작은 맵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델크로스 본상차원에서 규상세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은, 사용자의 강한 의지 혹은 강한 사념이었다.
그렇다면 위치 선정 또한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작동하지 않을까?
‘어쩐지,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아……!’
빙수 2호가 분리되기를 바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애쓰며, 성진은 사념으로 창의 스크롤을 쭉 이동시켰다.
〚개체 2가 얼음에 융합된 상태입니다. 개체를 분리하시겠습니까?〛
〚온도 스크롤 : 활동(얼음 분리) -/—– 수면(얼음 융합)〛
그러자.
쿠쿠쿠쿠쿠.
굉음과 함께 갑자기 요새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또 무슨 일입니까!”
한스 경이 비명과도 같은 절규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던 그는,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만으로 거의 10년은 더 늙은 듯 보였다.
“저길 봐.”
황자의 말을 신호로 곧 일행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멀쩡하던 빙벽의 안쪽 입구로부터, 갑자기 다량의 얼음덩어리들이 분리되며 바깥으로 밀려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쿠르르르르.
마치 굴이 파이듯 커다란 터널을 형성하면서,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밖으로 밖으로 끝없이 밀려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굴러가 뭉치는 듯하더니,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윽고 진동이 잦아든 요새 안에는, 전에 없던 글래쳐 트롤 한 마리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얼음 괴물의 부피만큼 깊이 파여 나간 빙벽의 끝에는, 휑하니 뚫린 커다란 얼음 공동이 드러나 있다. 성진이 급히 병사들을 피신시켰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
“저하? 이게 대체……?”
안에서 검으로 열심히 입구를 파고 있던 오르덴이, 갑자기 확 밝아지는 시야에 황당한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럴 수가…….”
황자가 보인 시범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이를 깨달은 일행의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린다.
“그래. 만일 글래쳐 트롤이 한 놈이라도 빙벽에 닿게 되면, 빙벽은 더 이상 완전한 울타리가 아니게 되는 거야.”
성진이 그들의 짐작에 쐐기를 박았다.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빙벽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이대로 빙수들을 고스란히 통과시켜 그대로 영지로 돌진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처럼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세심한 조종을 해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아까 상대해 본 바로, 적들이 그런 섬세한 조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만약 위치를 선정하지 않고, 투박한 방식으로 무작위적인 분리를 한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빙벽에 융합된 글래쳐 트롤들은, 재분리되는 위치에 따라 어디고 빙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낼 수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융합과 분리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빙벽은 내부 구조가 엉성해진 상태가 되어 일시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일.
반면 이쪽에서는 빙벽을 완전히 부수지 않고서는, 융합하여 숨어있는 놈들을 공격할 방법이 전무하리라.
어떻게 놈들을 겨우 해치운다고 해도, 빙벽이 사라진 경계에 약 2천의 라이칸슬로프들이 덮쳐오게 되는 것이다.
필패할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럴 수가! 지금까지 글래쳐 트롤에게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단 한번도……!”
“그야, 아직까지는 직접 이놈을 조종하려 시도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성진이 손에 쥔 얼음 심장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거기다 놈들에게 이런 물건이 몇 개나 더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막막하기만 한 현실에, 그들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렸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우선, 이 사실을 빙벽 기지에 알리겠습니다.”
오스카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그리고 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얼음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데카론 나이트와 울프 기사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글래쳐 트롤들이 요새 내부에서 날뛰기 시작하면 아마도 큰 혼란이 일겠지.
변경백이 그의 경고를 제때 들었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병력을 영지까지 빠르게 퇴각시켜, 거기서부터 방어전을 펼칠 수 있을지도…….
그런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마사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는 빙벽 기지로 지원을 가고 싶으신 거군요.”
“으응?”
찔끔 놀란 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어,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다고. 거기에는 빈센트 영감과 일마 경도 있잖아? 누가 봐도 여기보다 사정이 나은데, 뭘.”
“기지 쪽이 위급한 것 같아서 어떻게든 가고는 싶은데, 저와 마리아 경이 저하의 뒤를 따라 요새를 떠나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거겠죠.”
“음…….”
그의 말대로였다. 이곳에서 상급기사 이상의 전력은 두 사람뿐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간 협곡 요새인데, 이 두 사람마저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되면 다음 공습에는 반드시 무너지게 될 거다.
그래서 성진은…….
“혹시 저 빈스들만을 그쪽으로 보내볼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저하?”
헉! 마사인 경, 귀신인가?
성진의 눈이 둥그레지자, 마사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하를 이제껏 보필하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저하께서 하시는 생각을 알 것도 같군요.”
“…….”
“저는 그 삿된 물건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 같군요. 만일 저것들을 멀리 보내어 조종이 힘들어진다면, 저하께서는 아까처럼 자신의 몸을 완전히 제쳐두고라도 저것에 매달리려 드실 것 아닙니까?”
성진은 제발에 찔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까처럼 빙수들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보지 않고도 원거리에서 이것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빙벽 기지가 아무래도 불안한데…….’
하지만 성진 역시, 자신이 지금까지 마사인 경을 얼마나 걱정시켰는지에 대한 자각 정도는 있었다.
“휴우…….”
그런데 흉흉한 기세를 슬금슬금 흩뿌리던 마사인이, 일순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리 경을 함께 데려가십시오, 저하.”
“…어?”
“그는 이단재판부의 대변인이니만큼, 저하께서 저 삿된 것을 대놓고 조종하더라도 교회가 함부로 책잡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마사인 경?
그 믿을 수 없는 말에 성진이 눈을 깜박거리는데, 옆에서 발레리 경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기? 그러니까 아까부터 두 분, 제가 언제부터 이단재판부의 대변인이었다고…….”
“거기다 발레리 경이 빠진다고 해서, 우리의 전력에 별다른 공백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니, 마사인 경?”
졸지에 기사로서 무의미한 전력으로 낙인찍힌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항의의 뜻을 담아 손을 들어 보였지만, 아무도 거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자 역시 데려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지인이 갑자기 마수를 타고 나타나 본들, 누가 아군이라 쉽게 믿어주겠습니까? 또 나중에 빙벽 기지 사람들과 합류하여 소통하는 데도 그가 필요할 겁니다.”
얼음 굴에 갇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오르덴이, 가까이 다가오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저,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시끄럽다. 오르덴 주제에.
지금 네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저희는 울프 기사들과 요새에 남겠습니다, 저하. 그러니 요새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
“글래쳐 트롤들을 확실하게 막아내는 한, 이곳 요새는 언제까지고 안전할 겁니다. 라이칸슬로프들이 아무리 몰려온다 한들 이 빙벽을 쉽게 넘을 수는 없을 테지요.”
어디까지고 따라오겠다며 고집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성진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에게 대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혹감과 고마움, 그리고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들며 가슴을 바짝 죄인다.
그런 성진의 복잡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사인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저하께서 또다시 아까처럼 몸을 완전히 내팽개치시는 일은 없으시겠죠.”
“……!”
크헉.
양심의 가책이 비수처럼 폐부를 찔러왔다.
* * *
[크으으으…….]외계의 마왕은 신음을 흘리며 희미해져가는 존재감을 부여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거의 반 토막이 나듯 사선으로 갈라진 몸체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검은 마기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영혼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
‘이게 이 몸의 끝이라고?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차원들을 지배하고 융합해 온 내가?’
자신만만하게 달려온 것 치고는 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는 결과다.
자못 비통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지극히 무심한 은색의 눈동자였다.
단지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왕은 그에게서 뿜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저것이 정말로, 단지 신의 대리자일 뿐이란 말인가?’
인간이면서 당당하게 차원의 왕 행세를 한다기에 가뿐한 마음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왕들 중 유일하다시피 한 인간임에도, 그 어떤 왕보다도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자. 인과에서 한발 멀어져 있으면서도, 또한 인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자.
그래. 마치 혼돈 속에 있던 머나먼 고대의 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나!’
인간에게 그런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이 세상이 이런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마왕이 속으로 절규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힐긋 바라본 성황이 말했다.
[슬슬 끝을 내야겠구나. 헛짓거리에 이끌린 멍청한 놈이 또 하나 이곳으로 오고 있군,]그래. 헛짓거리다.
그 듣기 좋은 꼬임에 넘어간 한가한 마왕들이, 지금 선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둘러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제발 날 놓아 다오.]현 상황을 조심스럽게 가늠하던 외계의 마왕이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거래를 하자! 날 이대로 무사히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내 친히 이곳을 침략하도록 부추긴 것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가?] [부추김을 받았다?] [그래! 날 이곳으로 이끈 것은 어떤 고위 마왕이었다. 그자가 나 말고도 여럿을 꼬드겼어! 분명 너와 네 차원을 노리고 저지른 술책이 아니겠느냐?!]그러자 잠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성황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무척 의아한 듯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한 차원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사를 친히 관장하는 자가, 정작 자신에게 얽힌 인과를 전혀 모르고 있다니.]석상처럼 무표정한 얼굴과는 별개로, 어딘지 애석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다.
[정말 그 고위 마왕의 표적이 이 차원이었더냐? 그가 꼬드긴 여러 마왕들이 정말 이곳으로 향했더냐?] [……?] [그들이 평소 너의 차원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더냐, 혹시 네게 이곳으로 오는 순서를 양보하지는 않더냐?] [……!]…설마.
더없이 창백하게 질린 마왕을 내려다보며, 성황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기에 이끌렸다고 하면서, 정작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온 것인지를 모르고 있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한가? 그 의도가 이렇듯 여러 단계로, 교묘하게도 숨겨져 있는 것을.] [나는……!]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죽어라. 어차피 여기서 돌아간다 한들, 너를 맞이하는 것은 네 살점을 갈라먹을 짐승들뿐이니라.]그 말을 끝으로.
서걱.
길게 뻗어진 백광의 오러 블레이드가 마왕의 머리를 무참히 반으로 갈랐다.
마지막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놈은, 눈을 부릅뜬 모습 그대로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마지막 남은 보잘것없는 마기가, 차원의 틈새 사이사이로 덧없이 흩어졌다.
긴 하루가 되겠다.
성황은 한숨을 휘며 참연어를 갈무리했다.
히든 퀘스트를 깨겠다며 덤벼온 놈 하나를 해치우고 났더니, 이번에는 제집이 도둑맞는 것도 모르고 달려온 멍청이인가.
모두 공교로운 타이밍에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이곳을 침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성황은 이 바람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임을 잘 안다.
‘그리고 그다음은…….’
또 다른 공간을 끌어당기기 전, 성황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찰나의 여유 시간 동안 눈을 떼고 있던 아이들을 살피기 위함이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집중하던 성황의 입에서, 어느덧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들아!’
어쩐지 아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니, 자신의 말썽꾸러기 아들이 방금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든 다음이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네. 처음부터 모두 예견된 일이었지 않나.
어르신은 그렇게 경고했었지.
하나 어쩌겠는가. 그 아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언제나, 매 순간이 이토록 위태로운 외줄타기와도 같은 것을.
-으아악! 글래쳐 트롤이 습격한다!
-공격하지 마라! 아군이다!
-이대로 지나갈 테니 다들 비켜! 잘못하면 밟힐지도 모른다고!
게다가 지금 아이는 또 다른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쿵쾅쿵쾅.
마구잡이로 돌진하는 얼음괴물 위에 올라앉아, 영지의 경계를 엉망으로 휘젓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 아이가 하는 일은 매사에 난장판이 따로 없지만.
‘하지만 아들아. 나는 네가 삶에 닥쳐오는 역경들을 스스로 이겨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천천히 눈을 뜬 성황은, 다가오는 다음 상대를 향해 참연어를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