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29)
성황의 아이들-229화(229/469)
229. 방어전 (2)
‘…부디 모레스와 로건에게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불안한 기분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아멜리아는, 결국 책을 아예 덮어버리고는 안락의자에 폭 파묻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탁자에 놓인 작은 나무조각상을 만지작거린다.
‘역시 모레스에게 당장이라도 돌아오라고 할걸 그랬어. 아니, 차라리 지원군을 더 보냈어야…….’
모두 헛된 생각이었다.
위기에 빠진 영지를 버리고 오는 신성제국의 황자라니. 비록 어리다고는 해도,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신민들의 시선이 어떻게 되겠는가.
지원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릴리움 별동대 이상의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휴우…….”
아멜리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성으로는 자신이 옳은 판단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모레스가, 그 아이가 지금 위험한 마수들의 한복판에 있는 것을!
이럴 때 아멜리아는 자신이 성황가의 장녀라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다못해 헤르나 정도의 위치라도 되었다면, 아예 성기사단을 통째로 보내자고 아버님 페하께 떼라도 썼을 텐데.
“아멜리아 님. 이것 좀 보세요!”
그때 전속시녀 미라벨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서재로 들어섰다.
“그 로한의 멋진 왕자님께서 또 이렇게 예쁜 꽃을 보내오셨어요.”
“레오나드…….”
아멜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탄신년 이후 자신과의 접점을 만들었다고 확신한 그 쓰레기 자식은, 이런저런 연회나 사교 모임에 얼굴을 들이밀며 끈질기게 황도에 붙어 있는 중이다.
꼴도 보기 싫은 그자를 아멜리아가 딱 자르지 않고 계속 두고 보는 이유.
그것은 이후 로한에서 움직일 포석을 만들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숨겨진 측근을 표면으로 끌어내기 위한 이유가 컸다.
로메인. 음침한 반가면의 남자.
로한 왕실을 한 손에 쥐고 흔들던, 때로는 기이한 재주를 부리기도 하던, 레오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책사.
‘그리고 로메인이 가지고 있던 [열쇠]…….’
존재한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기이한 이종족을, 마치 수족처럼 부리게 만들어주던 기물.
그 정체를 알아내고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그것은 장차 델크로스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리라.
아멜리아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미라벨이 들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공부하면서도 이따금 보실 수 있게, 여기 서재에 장식하면 어떨까요?”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버려.”
“어머, 어째서요?”
“매번 같은 장미꽃이라니, 퍽 진부하기도 하구나.”
“호호. 어린 아가씨들은 보통 신사분의 번뜩이는 재치와 풍부한 교양에 감화되곤 하더군요. 하지만 아멜리아 님. 진실하고 훌륭한 신사분은 언제나 우직하고 한결같은 법이랍니다.”
그녀의 은근한 말에 아멜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미라벨은 그가 마음에 들어?”
“네. 왜 아니겠어요? 우리 황녀님께 이렇게 지극정성인데요. 보면 볼수록 참 점잖고 잘생긴 왕자님 아니신가요? 그분을 보고 있으면, 나중에 아멜리아 님과 함께 로한에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순간 붉은 꽃다발을 끌어안고 미소 짓는 미라벨의 모습 위로, 선혈에 뒤덮인 처참한 여인의 잔상이 희미하게 겹쳐진다.
-너는 끔찍한 악마다, 레오나드! 너를 저주한다! 죽어서도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아아악!
비명소리. 그 비명소리.
마침내는 혀가 잘리고 성대마저 망가져, 한낱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토해지던.
“……!”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물론 아무리 멋지더라도, 우리 황녀님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지만 말이에요.”
핏기가 가신 황녀의 얼굴을 알아챈 미라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게 얼버무린다.
“…응, 미라벨. 조금 이르지만, 나는 이만 점심을 들러 진주궁엘 가야겠어.”
결국 과거의 끔찍한 잔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아멜리아는, 고깔모자를 쓴 꼬마 성 아우렐리온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며 우울하게 말했다.
“역시 아멜리아 언니도 가져왔구나.”
이제 남매들 중 둘밖에 남지 않은 쓸쓸한 점심 식사.
맞은편에 자리 잡은 작은 성녀가 식탁 위에 나무조각상을 꺼내 놓는다. 하얀 레이스로 장식된 대머리 영감님이었다.
“나도 오늘은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가시질 않더라고. 훈련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아서 일찍 돌아왔어.”
쉰다고 하니까 다들 엄청 걱정하면서 연무장 밖까지 데려다주더라고. 막 손을 흔들면서 배웅도 해줬어. 성 마르시아스의 인퀴지터들은 다들 무서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사람들이 생각보다 상냥한 것 같아.
시슬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걱우걱.
카드모스 모드의 서이서가 옆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하고도, 아멜리아는 한동안 음식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무서운 잔상들이 여전히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시슬레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 아멜리아 언니. 실은 어젯밤에 내가 좋은 꿈을 하나 꿨어.”
“좋은 꿈?”
아멜리아는 자세를 고쳐 앉아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동생이 이따금 꾸는 예지몽에 대해 황가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응. 좋은 꿈. 머리 위에서 방울 소리가 막 울리더니, 글쎄 내 앞에 성 아우렐리온께서 직접 모습을 보이시는 게 아니겠어? 빨간 고깔모자를 쓰고, 어째서인지 길고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어. 그리고 인자하게 호우호우 하고 웃음소리를 냈지.”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깔? 수염? 호우호우?
어쩐지 세간에 전해지는 그의 모습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그가 웃으며 나한테 말했어. 성황가의 아이들이 계속 착한 아이가 되어 열심히 모레스 오라버니를 위해 기도하면, 조만간 그에게 큰 도움을 주겠다고 말이야.”
“도움…….”
예지몽이라기에는 뭔가 많이 어설펐다. 그럼에도 작은 위안이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멜리아의 얼굴에 옅은 화색이 어리자, 시슬레가 그녀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멜리아 언니. 거기다가 이제는 나도 있잖아? 나 요즘 소질 있다는 말 많이 들어. 내가 어서 로건 오라버니만큼 강해져서, 우리 가족 모두를 계속 지켜줄게.”
그 고사리 같은 하얀 주먹을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결국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고기용 나이프나 휘두르기에 딱 맞는 저 앙증맞은 손으로 대체 뭘 한다는 말인지.
“넌 아직 한참 멀었단다, 시슬레. 더 많이 강해져야지.”
“여기서 더?”
“그럼. 너도 매일 황궁 기사님들을 보잖니? 그들처럼 되려면 지금보다 훨씬, 훠얼씬 더 강해져야 해.”
“음…….”
아까는 플레일을 휘둘러서 풍압만으로 허수아비를 망가뜨렸는데. 스콰이어들은 물론이고, 하급기사들 중에서도 그런 위력을 보이는 자는 많지 않다고 기사단장이 그러던데.
하지만 잠시 고뇌하던 작은 성녀는 곧 깔끔한 결론을 내렸다.
뭐, 어쨌든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좋은 거 아닌가.
“알았어.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란 말이지? 맡겨 둬!”
아마도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이 들었다면 기겁할 대화를 나누며, 자매는 서로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 * *
한편, 지그스문트령으로 떠난 로건은 현재 홀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그스문트령은 먼 곳이었다. 황도에서 여유 있게 이동하면 족히 보름은 걸리는 거리.
처음부터 별동대를 재촉하여 속도를 내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로건은 시종일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가십시오, 저하. 금방 뒤를 따르겠습니다.
결국 함께 출발했던 성기사들이 로건에게 그렇게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릴리움 별동대는 오랜 이동에 익숙해져 있는 만큼, 체력 하나는 탁월한 성기사들이었다. 타고난 신성력까지 아낌없이 활용하며 말을 달리면, 일반 사람들의 족히 2배가 넘는 속도로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속도는 로건의 성에 차지 않았다.
현존하는 대륙 최연소 데카론 나이트이자 소드 마스터.
그런 로건의 오러 운용은, 주변의 오러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실체화하여 마치 자신의 무게를 말이 거의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거기다 강한 신성력까지 끊임없이 말에게 전해준다. 그렇게 거의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않고 긴 강행군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지그스문트령에서 만나지!
평소라면 말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방식의 강행군을 피하는 로건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불안감.
황도를 출발하면서부터 서서히 커져가던 불안감이, 이제는 몸을 바짝 죄일 정도로 강한 느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록사나! 이번만큼은 조금만 더 힘을 내주렴!”
위로하듯 하얀 갈기를 두드리자, 씩씩하게 달리던 그의 애마가 히힝,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누님이나 시슬레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이건 예감 같은 것이 아니야.’
로건은 성황가 아이들에게서 이따금 드러나곤 하는 특출한 예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런 것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빠르게 뛰고 긴장으로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런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앞에 커다란 전장이 기다리고 있을 때.
-네가 무사히 모레스를 황도에 데려온다면, 토벌대 활동비의 남은 금액을 모두 네 용돈으로 돌려주마.
출발하기 전 들었던 성황의 말도 계속해서 뇌리를 맴돌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 않은가. 그는 분명 ‘지그스문트령을 도우라’고 한 것이 아니라, ‘모레스를 무사히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이성진은 이미 여러 차례의 전적이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막 나가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부디 내가 갈 때까지 섣부른 짓은 하지 마라, 이성진!’
히히히힝!
다시 한번 쏟아지는 신성력을 바탕으로, 록사나가 더욱 속도를 올리며 힘찬 울음소리를 냈다.
* * *
“으악! 글래쳐 트롤이다!”
“놀라지 마라! 아군이다!”
익숙한 비명 소리와 뒤를 잇는 해명.
성진이 질린 얼굴로 오르덴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상황에 놀라게 만들 거야? 영지에 미리 연락해두지 않았나?”
그러자 오르덴이 오랜만에 울컥한 얼굴로 성진에게 외쳤다.
“지금 우리가 전서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하!”
아, 그렇군.
지구의 무전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이곳의 시대상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어.
쿵쾅쿵쾅!
빙수 1호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빠르게 풍경이 변하고, 야트막한 언덕 따위도 긴 다리로 한걸음이었다.
“…저하, 저 진짜 죽을 것 같습니다.”
신성력으로 끊임없이 자가 치료를 하던 발레리 경이 뒤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서두르던 성진 일행은, 걸어서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완전히 주파해냈다.
“으아악! 글래쳐……!”
예의 비명과 함께, 그들의 눈앞에 좁다란 빙벽 하나가 나타났다. 높이가 거의 빙수의 크기에 맞먹는 반면, 입구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작은.
“저곳이 영지로 가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좋아!”
성진은 가만히 얼음 심장을 손에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개체 1을 융합하시겠습니까?〛
그래!
“멈추십시오, 대공자님! 이대로는 빙벽과 충돌합니다!”
기겁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성진이 사념으로 스크롤을 쭈욱 이동시켰다.
〚온도 스크롤 : 활동(얼음 분리) —–/- 수면(얼음 융합)〛
콰앙!
얼음 괴물이 빙벽에 부딪힘과 동시에 그대로 얼어붙으며 융합되었다.
쩌저적.
그때 성진 일행은 이미 빙벽 위로 훌쩍 뛰어오른 뒤였다. 병사들이 높이 활공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린다.
그리고 몸이 중력에 이끌리기도 전에, 성진은 바로 빙수와 빙벽의 분리에 착수했다.
〚개체 1이 얼음에 융합된 상태입니다. 개체를 분리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온도 스크롤 : 활동(얼음 분리) -/—– 수면(얼음 융합)〛
쿠르르르!
빙벽이 분리되며 빙수 1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성진 일행이 그것의 어깨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얼음괴물은 다시 폭풍 같은 질주를 시작했다.
쿵쾅쿵쾅!
“저게 대체…….”
얼이 빠진 병사들이 빙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빙수의 형체대로 밖이 볼록해지고 똑같은 형태로 안이 파이며, 마치 얼음 괴물의 거푸집처럼 변한 빙벽이 휑하니 서 있었다.
“적들이 이런 속도로 빙벽을 통과할 수 있다면, 빙벽 기지는 물론 영지까지……!”
빙수 1호의 가공할 움직임을 본 오르덴이 우려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그러자 성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놈들이 정말로 공략하려 한 곳은 아마도 협곡 요새였으리라.
라이칸슬로프들을 며칠에 걸쳐 3차 빙벽 앞에 천천히 운집시키고, 그렇게 영지의 병력을 모두 빙벽기지에 집중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만일 저들이 빙벽 기지를 이런 식으로 통과했더라도, 그곳에 모인 수많은 병력을 단번에 뚫어내지는 못했을 터.
하지만 텅 빈 협곡 요새는 사정이 다르지. 이런 식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면 단번에 영지까지 이를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요새로 쳐들어온 놈은 조종 실력이 형편없었잖아? 적의 주력이었을 텐데 말이야.”
“…그렇군요.”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된 오르덴을 향해, 성진이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감히 자부하건대, 나처럼 얼음 심장을 잘 쓰는 사람은 찾기 힘들걸?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영지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백의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마도 경비대장이 소집하고 있던 4차 병력으로 보였다.
“대공자님!”
빙수 1호를 타고 나타난 일행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세바스티안 경은 이내 침착한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심각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빙벽 기지가 함락되었습니다! 현재 빈센트 님과 울프 기사단이 후방에 남아, 병력이 후퇴하는 동안 적들을 저지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