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
성황의 아이들-23화(23/469)
023. 쌍둥이와의 외출 (1)
예기치 못한 약혼자의 방문 때문에 낮의 수련 시간 대부분을 날린 성진은, 클로에가 떠나자마자 부리나케 연무장을 향해 뛰쳐나가려 했다. 최근 수련에 탄력을 받고 있는 그에게는 일분일초가 아깝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예상치 못한 방해가 있었다.
“안녕, 모레스.”
“안녕, 모레스.”
뛰다시피 진주궁의 로비를 나서는데, 작은 마차 한 대가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이었다.
누구지?
설명을 요청하는 눈으로 곁에 있던 에디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치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방문하겠다는 기별은 따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하.”
만약 마왕 놈이 있었다면 잘난 척하며 정보를 풀었을 텐데. 갑자기 놈의 부재가 커다랗게 다가온다.
다행히 뒤를 따라 나오던 마사인 경이 성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며 아이들을 향해 각 잡힌 예를 취했던 것이다.
“황녀님과 황자님을 뵙습니다.”
“안녕, 마사인 오라버니.”
“안녕, 마사인 형님.”
그러니까, 얘들은 모레스의 동생들이었다.
헤르나와 가데스.
둘은 이제 막 13세가 된 쌍둥이 황녀, 황자였다.
수도의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하는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 알현 시간이 되면 마차를 타고 황궁을 방문한다고 한다.
성황의 폐관 기도 덕에 오늘의 약속이 취소되어 버렸다고 투덜거리는 둘은, 모레스와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묘하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성황 아빠가 일부러 우리를 피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하단 말이야.”
헤르나가 투덜거리며 성진의 오른팔에 팔짱을 껴왔다.
“아빠 폐하를 만나는 날을 일주일간 기다렸는데 말이지. 그래서 일단 황궁에 놀러 왔어.”
가데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성진의 왼팔을 잡았다.
“뭐, 성황 아빠가 체스 두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뭐, 아빠 폐하가 곤란해하는 게 재미있어서 체스를 두자고 하는 거지만.”
그러면서 두 사람은 당황한 성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랑 놀아 줄 거지, 모레스?”
“막 쫓아내고 하지 않을 거지, 모레스?”
똑같이 생긴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거린다.
와, 이거 뭐지?
성진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식은땀을 흘렸다.
이전 세계에서 성진은 결혼을 하기도 전에 게헤나 게이트 사태를 맞았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더랬지.
게다가 그 세계는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곳이었다. 초인 부대가 꾸려지고 마물들과의 전투가 지난하게 이어지면서, 얼마 없던 아이들마저 하나둘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렇게 막 매달려 오는 천진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양팔에 동생들을 달고 쭈뼛거리면서 마사인을 쳐다보니, 이 인간은 성진의 속도 모르고 혼자 감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레스 황자님이 동생분들과 이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보게 되다니…….”
원래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나 본데.
니네들 나한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성진을 바라보는 말간 얼굴들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난데없이 나타나 친한 척하는 것도 이상한데, 쌍둥이는 성진의 급격한 외모 변화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오랜만에 보는 터라 완전히 사람이 달라 보일 텐데 말이다.
“모레스는 원래 좀 이상했는걸.”
“모레스는 원래 정상은 아니었지.”
뭐, 이것들아?
그나저나 똑같은 목소리가 연이어 대답하니 누가 한 말인지 혼란스럽다.
같은 길이로 다듬어진 단발머리에 같은 얼굴을 가진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부분은 단 하나. 하나는 앙증맞은 원피스를, 다른 하나는 귀여운 반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옷 디자인마저 비슷비슷하다.
엄마가 누군지는 몰라도, 쌍둥이라고 이렇게 똑같이 입히는 거 애들 정서상 괜찮은 거냐?
양팔을 잡고 그를 마차로 끌어당기는 꼬맹이들로부터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성진은 다급하게 외쳤다.
“야, 야. 나는 지금 연무장에 가야 한다고. 다음에 놀아 줄 테니 오늘은 아멜리아 누님한테나 가 봐라. 어?”
오늘은 기필코 오러 3층을 쌓아 올리고 말리라 다짐했건만 이 무슨 방해냐!
쌍둥이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멜리아 언니는 아직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지?”
“아멜리아 누나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지?”
그러더니 둘은 뭘 납득한 건지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성진의 팔을 당기기 시작했다.
꼬맹이들이 당기는 힘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확 집어 던질 수도 없고.
속절없이 끌려가던 성진이 도움이 절실한 얼굴로 마사인을 돌아보았지만.
“크흑, 저하께서 형제분들과 이렇게 사이좋게…….”
마사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저 사람, 이미 글렀구나.
결국 성진은 쌍둥이들과 함께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사인 경이 수련 따위 집어치우고 당장 형제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뭘 하느냐는 노골적인 눈빛을 이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근위대 기사단장께서 스스로 그들의 호위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마사인 오라버니라면 든든하지.”
“마사인 형님이라면 걱정 없어.”
근데 이것들이.
아멜리아는 언니 누나고 심지어 마사인 경도 형님 오라버니인데 왜 나는 그냥 모레스야?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헤르나와 가데스는 히죽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탄 마차는 곧 황궁을 벗어나 중심가로 향하는 거대한 대로를 달렸다. 황궁 대로가 그대로 일직선으로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대로와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였다.
잘 다듬어진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끝나자 곧 듬성듬성 상점가가 보이더니, 어느새 커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번화한 광장이 되었다. 형형색색의 인파가 부산하게 거리를 메우고, 화려한 사두마차나 커다란 짐마차들이 줄지어 거리를 내달린다.
새삼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의 수도라는 실감이 든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쌍둥이들이 이후의 일정을 공표했다.
“우리는 시내 의상실로 갈 거야.”
“지금 살롱 드메르시로 가야 해.”
“……?”
살롱 드메르시가 뭔데?
눈을 끔벅거리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마사인이 슬쩍 귀띔을 해줬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남성복 전문점입니다.”
애들이 왜 거기로 놀러 가? 아직 아동복 전문점에 갈 나이 아니야?
“그리고는 베르트랑 거리의 새 인형극을 보러 가자!”
“잔인한 용사와 불쌍한 마왕이 나오는 인형극이야!”
이제야 좀 애들이 갈 만한 곳이다. 근데 그거 뭔가 반대로 된 거 같은데.
“그러고 나서 분수광장에 있는 원숭이 망루에 가면 끝이네.”
“그래, 오늘 가야 할 곳을 모두 알차게 돌았다고 할 수 있네.”
원숭이 망루?
자동으로 마사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술값이 저렴하여 단골이 제법 많은 주점입니다. 근위대 기사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죠.”
이번엔 무려 술집이다. 애들이 거긴 또 왜 가는 걸까.
대체 얘들이 논다는 기준이 뭐지? 거기다 내가 왜 따라가야 하는 거냐?
“응, 글쎄, 선택 기준이 뭘까?”
“응, 그러게, 왜 가야 하는 걸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을 뿐이다.
살롱 드메르시는 유명한 의상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데스테 거리의 중앙에 입점해 있었다. 대륙의 복식 유행을 선도한다는 브르타뉴 왕국의 최신 동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거리라나.
드메르시의 입구에도 브르타뉴식 최신 의상이 걸려 있다. 잘록한 허리라인에 루비 버튼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통 좁은 소매를 본 성진이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쌍둥이가 그를 입구 안으로 떠밀며 말했다.
“느긋하게 놀다 와, 모레스. 우리는 조금 있다 데리러 올게.”
“천천히 얘기하고 와, 모레스. 너무 늦지 않게 찾으러 올 테니까.”
뭐? 같이 놀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성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쌍둥이는 어느새 인파 속에 묻혀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따라가려고 몸을 돌리려니 우렁찬 점원의 인사가 그를 붙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훤칠하신 공자님! 이곳은 처음이신가요? 어서 들어오세요!”
짙은 화장에 화려한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만면에 과한 미소를 띠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잘 오셨습니다. 살롱 드메르시는 델크로스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지요! 수도의 멋진 신사분들은 모두 이곳의 단골이시랍니다. 어서 이쪽으로…….”
그녀는 성진의 팔을 우악스레 잡아끌려고 했지만, 순간 그녀와 성진의 사이로 끼어든 마사인 경에 가로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사인은 상점 전체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점원에게 호통을 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무례를! 이분은 위대한 신성제국의 황자, 모레스 님이시다!”
의상실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서리더니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성진은 괜히 민망해졌다.
다행히 드메르시의 점원은 높으신 분들의 상대에 이골이 난 프로였다. 그녀는 재빨리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고는 성진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귀하신 분께서 직접 행차하시리라 생각지 못하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곧이어 달려 나온 다른 점원들이 입구로부터 일렬로 늘어선 후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성진은 상점을 나갈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델크로스에 주신의 축복을! 영명하신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점원들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짙은 핑크색 일색의 유니폼을 걸치고 있었다. 그 괴악한 센스에 뜨악하고 있는데, 상점 안쪽에서 거구의 남자 하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성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화려한 쥘부채를 들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은 자였는데, 검은색과 연한 핑크색이 골고루 섞인 요란한 의상 위로 진분홍의 퍼를 두르고 있다. 순간 이 상점 점원들의 핑크색 옷이 누구의 취향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머어머어머, 이게 무슨 일이라암? 어머나, 모레스 저하! 어쩌면 이렇게 갈수록 근사해지시죠오? 어머, 어쩜 좋아!”
경망스럽게 몸을 배배 꼬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는 마사인 경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다행히 기사단장이 폭발하기 직전에 남자는 성진을 향해 적절한 예를 취해 보였다.
높으신 분의 심기가 언제 불편해지는지 그 선을 잘 아는 노련한 자였다.
“위대하신 성황가에 대대손손 주신의 축복을! 살롱 드메르시의 마담 쥬스티느가 고귀하신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아.”
팔 동작이 크고 고풍스러워 어찌 보면 연극배우처럼 보이기도 하는 시원한 몸짓이다.
반면에 말끝은 또 묘하게 늘어져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혹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성진은 순간 미묘한 이질감에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한 화장과 화려한 의상만 아니라면 잘나가는 전사라 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근골을 가진 자였다. 장대한 체구에 전체적으로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신체 주위에서 오러가 활성화된 느낌은 없었다. 오러 유저가 아니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왜 성진의 감은 이자를 향해 경보를 울리는가. 마사인 경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성진을 향해 귓속말을 해왔다.
“마담 쥬스티느라면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입니다. 황궁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나, 설마 이런 자일 줄이야…….”
“오러 유저는 아니지?”
“예,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기도가 훌륭하군요. 일개 디자이너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남자는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동안 빙그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붉게 칠해진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새끼손톱만 한 미인점이 함께 움직인다.
그가 조용히 서서 용건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성진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으흠, 그… 옷을 좀 지을까 하는데…….”
의상실에서 꺼낼 만한 용건이란 빤한 것.
마담 쥬스티느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오호홍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과한 속눈썹 화장으로 더 부리부리해 보이는 두 눈이 샐쭉하게 초승달을 그린다.
“오호호! 저하께서 살롱 드메르시를 직접 찾아 주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오? 리자베스 황비님께옵서 예전부터 이곳의 단골이셨답니다아.”
“그, 그런가?”
“예에. 매달 저희 점원들이 저하의 의상을 짓기 위해 진주궁으로 찾아뵙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 마담 쥬스티느가 직접 저하를 모실 수 있게 되다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아!”
모레스의 드레스 룸에 있는 옷 대부분이 이 사람의 작품이었나 보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위층의 특실로 가시지요오. 귀한 분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치수부터 피팅까지 모든 과정을 바로바로 맞춰 드린답니다아.”
그래, 일단 이 어수선한 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못 가겠는가.
성진은 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점원들과 일부 손님들을 뒤로하고, 쥬스티느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이왕 의상실에 온 김에 성진은 수련하면서 편하게 입을 만한 옷이나 한 벌 맞출까 생각했다.
그런데 마담 쥬스티느가 들고 온 옷감들과 자수 견본들, 그리고 여러 가지 디자인화를 보는 동안 대화의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호라! 너무 밝은 것도 싫고, 너무 어두운 것도 우중충해서 싫으시다는 거죠오? 확실히 요즘 수도의 유행을 정확하게 꿰뚫는 안목이십니다아! 요즘은 짙으면서도 빛을 받으면 화사하게 빛나는 옷감이 인기랍니다아.”
흰색이나 검은색 둘 다 연무장을 구르다 보면 먼지가 많이 탈 거 같아서 싫다고 했을 뿐인데, 갑자기 무지개 광택이 번뜩이는 요상한 옷감들이 튀어나온다.
“오호호호! 커프스나 수실 장식을 최대한 줄이신다고요! 과연 시대를 앞서가는 과감한 선택이십니다아!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은 손자수를 구석구석 넣어서 그 품격을 드높이시면 어떨지요오? 소맷자락과 바짓단에는 보석과 진주로 고급 자수를 두는 겁니다아!”
과격한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걸리적거리는 것을 빼달라고 했더니, 옷에 보석을 꿰매 넣겠단다. 완성될 옷이 어떤 꼴이 날지, 이제 성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담 쥬스티느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디자인 노트에 잔뜩 뭔가를 갈겨쓰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곧이어 들어온 점원들이 성진의 치수를 잰다고 한차례 부산을 떨었다. 키와 허리둘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성진은, 사람 옷을 짓는데 그렇게 많은 부위의 치수를 재야 하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정신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멍하니 쥬스티느가 챙겨준 주스를 홀짝거리고 있었더니 마사인이 딱하다는 눈초리를 보내온다.
“피로해 보이십니다, 저하.”
성진은 대답 없이 코웃음을 쳤다.
마사인 경, 아까까지 마담 쥬스티느와 함께 공작무늬냐 나비무늬냐를 두고 신나게 언쟁한 주제에.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마사인이 문을 열자 웬 유약한 인상의 청년 하나가 쭈뼛거리며 들어오더니 성진을 향해 절을 올린다.
“델크로스에 영광을. 황금진리학회의 오랜 후원자이신 모레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황금진…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