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4)
성황의 아이들-234화(234/469)
234. 방어전 (7)
“누군가가 글래쳐 트롤을 능숙하게 조종해 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예비된 자]의 소행일거라 의심한단 말이지…….”
황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교외의 한 고택.
때로 불온한 자들의 접선 장소로 이용되는 그곳에서, 늙은 사제 하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형형한 초록의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그자는 바로 [파종].
불쌍한 암흑 교단의 노사제를 로메인에게서 양도받은 후, 지금까지 계약자로 알뜰하게 써먹고 있는 [질병]의 마왕이었다.
“생각보다 북쪽 지방을 손에 넣는 게 어려워질 것 같은데…….”
이윽고 부하와의 연락을 마친 그는 투덜거리며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가 낡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자 풀썩, 매캐한 먼지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예비된 자]가 관여했나?”
먼저 응접실에 자리하고 있던 [탐욕]이 묻는다. 언제나처럼 갈래머리를 한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정말 모를 일이군. 대체 그것이 뭘 위해 움직이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야 델크로스의 궁극적인 파멸을 위해 움직인다. 당연한 것을.”
“과연 그럴까? 딱히 그 로메인이라는 놈의 말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부쩍 [예비된 자]의 존재 의의가 뭔지 강한 의구심이 든단 말이야.”
파종이 어울리지 않게 입을 삐죽거리자, 탐욕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네가 그 작자의 헛짓거리에 장단을 맞춰줄 줄은 몰랐는데.”
베르세우스 다시아노는 ‘6인 회의’의 일원이자 [열쇠]의 소유자.
대륙 북부는 물론이거니와, 델크로스 차원 전체를 갈라 먹을 틈만 노리는 마왕들과는 영원한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자 파종이 주름진 입가를 끌어올리며 킬킬거렸다.
“각자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면 잠시 협력할 수도 있는 거지. [참회]가 예비된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손을 들어주었듯, 우리는 대륙 북부를 차지하기 위해 베르세우스와 버려진 ‘인형’의 손을 들어주는 거야.”
뭐, 델크로스의 수호자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파종이 그렇게 덧붙였다.
“베르세우스 그자의 바람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결국 ‘6인의 회의’의 제재를 받게 될 것이거늘.”
“글쎄, 어떨까. 너도 알다시피 놈들의 규칙에는 제법 애매한 부분이 있지. 놈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니까.”
한때 델크로스와 짝을 이루던 완벽한 세계.
그 이오니아를 철저하게 무너뜨린 [재앙]이 애초에 인과의 불균형으로부터 기인한 까닭이다.
“그래서 놈들은 대륙을 지키려는 수호자의 손발에 족쇄를 채우고, 대륙을 해하려는 암흑 교단의 움직임을 오히려 묵인하고 있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한은 말이야.”
파종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탐욕. [인과]는 우리 같은 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이자, 모든 것이다. 처음부터 차원을 침략하지 않고 먼저 교세를 확장시키려 아등바등 하는 이유가 뭐겠냐? 다 그 인과를 건드리지 않고 세계에 최대한의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겠어?”
“…….”
“아, 맞아. 넌 관심 없으려나? 교단 같은 거 안 키우니까.”
농담처럼 던져진 타박을 무시하며, 탐욕은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염상세계와 본상세계의 마왕들을 끌어모아 뭔가를 획책했음은 알고 있다. 한데 규상세계는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거지? 그 해괴망측한 세계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건만.”
“아, 그거?”
그러자 파종은 어딘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소녀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하. 놀라지 말라고, 탐욕. [애열]이야. 숨어있던 애열이 나타났어!”
“…애열.”
“그래. 그 녀석 요즘 뭐에 정신이 팔려있나 했더니, 규상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는데 푹 빠져있더라고.”
“…….”
“그래서 규상세계의 세력을 좀 모아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만, 냉큼 [퀘스트]라는 걸 만들어내더라고. 그것만으로 삽시간에 엄청난 수의 규상세계가 탄생하더라니까! 정말 그놈답지 않냐?”
파종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탐욕이 살짝 미간을 구겼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런 어설픈 차원의 왕들이 아무리 덤벼든다 한들, 누구 하나 델크로스의 수호자를 당해낼 수 있으리라 보느냐.”
“하하하.”
파종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그거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탐욕.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인간의 정신이 가진 한계라는 게 있어. 계속해서 수없는 난관에 부딪히다 보면, 결국 소모되고 마모되기 마련이지. 그러니 최대한 그자를… 음?”
거기까지 말한 파종은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이렇게 오한이 드는지 모르겠네. 급하게 갈아탄 게 하필 노인의 몸이라 그런가?”
질병의 마왕께서 감기에 걸리다니, 그런 쪽팔리는 일이 생겨선 안 되지.
조만간 건강한 새 계약자를 찾아보든지 해야겠어.
부르르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파종이 중얼거렸다.
한편, 파종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오한을 경험한 자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베르트랑 거리에 죽치고 있던 로메인이었다.
“푸에취!”
어찌나 거세게 재채기를 했는지, 그의 반가면이 들썩하고 얼굴 위로 튀어 오를 정도였다.
덕분에 옆에서 술병을 들고 뒹굴거리던 레오나드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뭐냐? 로메인. 본체가 아닌 그 몸도 감기 같은 거에 걸릴 수 있냐?”
“…그럴 리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로메인이 왕자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최근 황녀의 반응은 좀 어떻습니까, 레오 님. 그녀가 로한과의 국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던가요?”
“글쎄? 지금은 부지런히 꽃만 보내고 있긴 한데…….”
레오나드는 모로 돌아누우며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일단 모레스 황자가 돌아와야 진척이 있을 것 같아. 황녀는 어쭙잖은 연회에는 아예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고. 비싸게 구는 것 하나는 제 아비와 똑같더군.”
그러니 황자를 통해 본격적으로 황녀와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해 볼 생각이야.
왕자는 그렇게 덧붙이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모레스 황자 말입니까.”
과연, 그가 황도로 무사히 돌아오게 될까?
로메인은 비소를 지었다.
모레스 황자는 암흑 교단에 의해 ‘예비된 자’. 얼마 전 고위 마왕에게 노사제를 바치고 얻어낸 정보였다.
만일 그들에게 들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예비된 자는 장차 레오나드의 앞길에 큰 장애물이 될 터. 결코 세상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위 마왕들에게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열심히 설득한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렇다고 압도적인 힘으로 지그스문트령을 통째로 쓸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일에는 어디까지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지요.”
“그건 또 왜?”
레오나드의 천진한 물음에 로메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설마 진심으로 물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지그스문트령이 이대로 쉽게 무너지면, 다음으로 마경의 마수들이 노릴 곳은 단연 로한이 아닙니까.”
“아.”
사실 잘츠호와 국경 일부가 맞닿아있는 로한이 지그스문트령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왕자를 향해, 로메인이 한숨을 쉬었다.
“아멜리아 황녀를 마음에 두신 게 아닙니까?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으시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상식과 교양을 쌓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소문에 총명한 황녀는 어린 나이에도 벌써 아버지를 도와 국정을 살핀다고 하더군요.”
“흠. 그래?”
인상을 쓰며 잠시 고심하던 레오나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상식과 교양도 찬란한 외모 앞에서는 빛을 잃는 법. 나는 그냥 그녀에게 과묵하면서도 미소가 멋진 남자의 이미지로 다가가겠네.”
“…아, 네.”
말을 아껴 무식함을 감추겠다는 거군.
대체 이 사람을 데리고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길게 한숨을 내쉰 로메인은 문득, 시선을 돌려 머나먼 북쪽의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슬슬 전면전이 벌어질 때도 되었군요. 곧 지그스문트령의 운명이 정해지겠지요.”
* * *
성진은 일행을 따라 움직이며 보존식을 씹고 있었다.
틈날 때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이런저런 일들로 하루 종일 먹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어때? 난 맛있는 것 같은데.’
황궁에서 준비해 온 특제 보존식이라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특유의 역한 맛이 덜하고, 오래 씹으면 고급 조미료의 맛이 우러난다.
그 감각을 부지런히 마왕에게 공유해주자, 놈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흥! 그래봤자 소용없어. 오늘은 더 이상 영안을 열지 않을 거라고!]‘어, 그래.’
성진이 자는 동안, 다행히도 마왕 놈은 알아서 염상 결정에 얌전히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성진은 더는 놈을 자극하지 않고 열심히 달래보기로 한 것이다.
‘네 뜻은 잘 알겠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아버지가 고쳐주면 이런 이상 따위는 씻은 듯 없어진다는 거. 지금은 자잘한 이상에 연연하기보다 더 중요한 일에 온 힘을 집중할 때야.’
오늘은 어째선지 도통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조만간에 샤론 경의 몸을 빌려 이곳으로 오시지 않을까? 그럼 회복도 금방이라고.
그렇게 설명하자 마왕 놈이 푹 한숨을 쉬더니, 급기야는 쯧쯧 혀를 차기 시작했다.
[너는 인마. 가끔 생각이 깊은 것 같으면서도 또 아예 생각 없는 놈처럼 굴어. 그 상황을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본 적 있어?]‘응?’
[널 그렇게 멀쩡히 고쳐줄 수 있는 네 아버지 본인의 경우는 어떨까? 만일 그가 금방 멀쩡해진다는 이유로, 혼자서 힘든 일을 떠안으려 하거나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그래도 넌 곧 회복될 테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어?’
순간 번쩍.
성진의 머릿속에 희미한 성황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희게 빛나는 은가시를 겨눈 채 어딘가를 노려보는 모습이.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묘하게도 가슴을 저미는 듯 찡한 감상을 남겼다.
뭐지? 뭔가가 기억 날 듯 말 듯한…….
[알겠냐? 이 사고뭉치야! 넌 인마, 딱밤 하나로 모든 잘못을 용서받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흠…….’
괜히 숙연한 기분이 된 성진은, 마왕에게 더는 영안을 열어 달라 설득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말 급한 상황에서 요청하면, 놈이 못이긴 척 들어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쿵. 쿵. 쿵.
다행히 지금 당장은 영안이 필요하지 않았다. 별다른 명령을 하지 않아도 빙수들이 알아서 성진을 졸졸 따라왔으니까.
‘따라오라’는 명령이 아직은 유효한 모양.
“저하, 다 왔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영지 입구에 마련된 진지에 도착했을 때, 전선은 마침 잠깐 소강상태에 있었다.
한창 병력을 재정비하던 일마 경이, 반가운 얼굴로 성진을 맞았다.
“빙벽이 제법 오래 버티긴 했지만,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라이칸슬로프들이 모두 빙벽을 넘었습니다. 지금까지 놈들과 총 두 차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진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사위가 캄캄한 가운데, 빙벽 기지로 향하는 넓은 비탈길이 수백의 별빛으로 가득 덮여있다. 그 별빛 하나하나가 맹수들의 안광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히 섬뜩한 광경이었다.
진지 내에도 이에 질세라 수많은 횃불을 피워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어지러이 움직이는 불꽃들을 보자, 지끈, 잊고 있던 눈의 통증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눈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마왕 놈의 말이 정말 맞는 모양.
샤론 경과 발레리 경이 번갈아 가며 신성력을 흘려주었는데도 아직 완전히 회복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시신경의 피로만이 아닌, 조직의 영구적인 손상이 병행되었다는 의미리라.
‘아버지가 알면 정말로 화내겠지.’
뭔가 벌써부터 이마가 아파 온다.
“참, 악마를 쫓아간 영감 일은 어떻게 됐나?”
빈센트 영감이 글래쳐 트롤을 조종하던 놈을 잡았을까? 결국 빙벽이 무너진 걸 보면 실패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자 일마 경이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놈을 놓치신 것은 아닙니다만, 과연 잡았다고 해야 할지…….”
“……?”
“일단 지휘 막사로 모시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나누시지요.”
본래라면 외부인인 데다 어리기까지 한 성진이 지휘 막사에 초대되는 일은 없었을 터.
빙벽 기지를 구하며 보여 준 빙수들의 위력 때문인가, 어느새 모두가 자연스럽게 성진 일행을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성진이 도착하자, 마침 변경백의 막사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놈들은 최대한 야간에 승부를 보려 할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오러로 안력을 돋운다 해도, 기본적으로 야간의 시야는 라이칸슬로프들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세바스티안 경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라이칸슬로프들은 체력조차 월등한 데다 숫자도 우위에 있다. 심지어 놈들은 인간들처럼 오러 운용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캄캄한 밤중에 제대로 놈들을 상대할 만한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이야 빈센트 노인이나 일마 경, 세바스티안 경처럼 무력이 월등한 자들 덕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 힘의 균형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터.
“흠…….”
그들의 심각한 회의를 듣고 있던 성진은, 방한복 주머니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어루만졌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 로건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며 쥐여 준 마법의 돌.
[그걸로 뭘 하려고?]불길한 낌새를 눈치챈 걸까, 마왕 놈이 넌지시 물어왔다.
‘뭐, 보고만 있어.’
성진이 입꼬리를 쭉 끌어올렸다.
내 눈이 아프면 적의 눈도 아프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