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236)
성황의 아이들-236화(236/469)
236. 방어전 (9)
부우웅-
중장비와도 같은 육중한 팔이 횡으로 크게 휘둘러진다.
커컹! 켕! 크헝!
여기저기서 라이칸슬로프들의 처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빙수들의 위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한 걸음을 옮기면 마수로 가득 찬 바다가 속절없이 갈라지고, 팔을 한 번 휘적거리면 십여 마리의 라이칸슬로프들이 힘없이 허공으로 튕겨나간다.
섬세한 조종은 필요 없었다.
라이칸슬로프가 지천에 널린 그곳에서, 빙수들은 그저 마구잡이로 사지를 휘두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퍼걱! 퍼걱! 꾸지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이칸슬로프들의 경우는 사정이 더 나빴다.
눈이 멀어 미처 피하지 못한 마수들이, 빙수들의 걸음걸음에 짓밟히며 삽시간에 곤죽이 된다.
수십 톤은 족히 넘어갈 얼음 괴물에게 깔리고도 재생의 여지가 남을 턱이 없었다. 빙수들이 지나가는 경로가 라이칸슬로프들의 선혈과 육편으로 빼곡히 뒤덮여갔다.
“…전해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고 있자니 정말로 경이롭군.”
그 위력에 압도된 세바스티안 경이 검을 휘두르다말고 감탄했다.
진중한 경비대장마저 그럴진대, 이 기적을 목도한 일개 병사들은 어떠하랴.
“아아!”
“사도… 주신의 사도다!”
그들의 얼굴에서 절망의 기색이 사라져간다.
빙벽 기지가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할 때만 해도, 글래쳐 트롤들이 마치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와 같지 않았는가.
한데 막상 그 괴물이 아군이 되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빙벽이 없어도!’
‘…어쩌면, 막아낼 수 있다!’
병사들의 사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가자! 성황가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한다!”
“주신께서 지그스문트령을 버리지 않으셨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라이칸슬로프들 사이로 힘차게 뛰어들었다.
* * *
한편, 정작 그러한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좋지 않아…….”
성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현재 변경백과 함께 후방으로 빠져 있었다. 나지막한 망루 위였기 때문에 전장이 어느 정도 한눈에 들어오는 상황.
지금이야 일견 승세를 잡은 듯 보이지만, 이런 분위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터.
초반의 기책으로 수적 열세를 조금이나 만회했을 뿐, 빙벽으로 이어지는 산비탈에는 여전히 엄청난 수의 라이칸슬로프들이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놈들의 회복도 빠르고.”
벌써부터 하나둘 몸을 추스르는 놈들이 나오고 있다.
재생력이 좋다고 익히 듣기는 했지만, 설마 눈까지 저렇게 튼튼할 줄은 몰랐지.
“아까 썼던 방법을 한 번 더 해 볼 수는 없겠습니까, 저하?”
변경백의 물음에 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지 없는 놈들이라도, 설마 같은 걸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전장 한복판에 내던져버린 마법의 돌멩이를 되찾아올 길도 없었고.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가 너무도 미흡했습니다. 저희에게는 높은 빙벽이 있었기에, 영지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주변에 변변한 성벽 하나 두를 생각을 못 했군요. 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그렇게 한탄하는 헨드릭 변경백의 얼굴은 일견 침통해 보였다.
하지만 성진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여전히 버석하게 메마른 눈동자는 이런저런 계산으로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이번 사태는 예외 중의 예외. 오히려 이번의 준동으로 향후 수년간은 마수들의 활동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는 영지를 재건하기도 자금의 여유가 없을 테니, 그냥 빙벽을 더 강하게 보수하는 쪽이 여러모로 이익이겠지. 차라리 이번 일을 계기로 황실 지원금을 증액하는 방안을…….’
머리를 굴리고 있는 변경백을 힐끔 쳐다본 성진은 내심 혀를 찼다.
이 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세상일이란 좀처럼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으니까.
이대로는 언젠가 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왜 그런 예감이 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찜찜한 기분이 된 성진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전선은 제법 산비탈 쪽으로 밀려 있었다.
“울프 기사단의 무용은 참으로 대단하군. 과연 듣던 대로야. 물론 데카론 나이트에게는 조금 많이 실망했지만.”
멀리서 비틀거리는 빈센트 노인을 노려보며 내뱉듯 말하자, 헨드릭 변경백이 모른 척 속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이 어찌 울프 기사단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글래쳐 트롤을 몰고 와주신 저하의 덕분입니다.”
“흠.”
“거기다 마사인 경의 무위는 참으로 명불허전이군요! 최연소 근위대장이라더니 과연 성황가의 일원입니다.”
그 말대로, 전선의 최전방에서 이따금 밝은 금빛의 오러가 화려하게 번쩍거렸다. 두 말 할 필요 없는 마사인 경의 오러다.
꽈악.
호두까기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는 성진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혼자 뛰어다니는 것보다 빙수 네 마리를 풀어두는 쪽이 효과적이라 판단했기에 얌전히 물러나 있긴 했지만, 기분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저하, 오러의 활성이 대단히 불안정합니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무리십니다.”
성진의 불안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옆에 있던 브루노 단장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현재 성진의 호위로는 브루노 단장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전방에 나가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판단한 마사인이 내린 조치였다.
황자를 어딘가 붙들어두지 못한다면, 차라리 한발 먼저 나서서 최대한 일을 빨리 처리해 버리자. 아마도 최근에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마사인 경까지 말려든 셈인가.’
본래라면 최연소 근위대장으로 폼 나는 인생을 살았을 양반이, 이렇게 최전방에서 험하게 구르게 되다니.
잠시 숙연해져 있는데, 마왕 놈이 머릿속에서 빈정거렸다.
[괜히 후회하는 척하지 마, 이성진. 어차피 넌 금방 잊어버리고 또다시 사고칠 거잖아?]‘…닥쳐!’
사람이 기껏 반성하고 있는데!
한편 바닥을 나뒹굴던 빈센트 노인은 겨우 전선에 복귀했다.
아직도 시야가 엉망이었지만, 그는 무리해서라도 몸을 일으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회복하지 못한 두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고, 폭포수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끄으으! 뭘 어떻게 하려는지 궁금했을 뿐이건만! 오러로 보호하고 있으니 나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모든 것은 자신의 실책.
찌르는 듯한 통증과 시린 감각을 견뎌가며 노인은 입을 앙다물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의외의 효과도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그 자체. 이지가 없는 라이칸슬로프들조차 움찔 놀라게 만들 정도로 흉흉했던 것이다.
“왜 네놈들은 벌써 움직이는 거냐! 난 아직도 아프단 말이다아아!”
노인장은 마치 놈들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뒤늦게 전선을 깊이 파고들며 막무가내로 날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전선 곳곳에 흩어져있는 일행의 안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일행은 생각보다 선전하는 중이었다.
상급 기사인 마리아 경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기에 충실한 클로디아 경이나 칼멘 경 또한 병사들의 틈에 뒤섞여 착실하게 마수들을 베어나가고 있다.
온실 기사라 불리는 황도의 기사들이었지만, 차차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해지자 다들 자신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사인으로부터 ‘전력 외’라는 평을 들었던 발레리 경도 제몫을 잘하고 있고.
“흐흐흐!”
히죽히죽 웃는 낯으로 곡검을 휘두르는 샤론 경은 어딘가 섬뜩하기까지 했다.
특히 클로디아 경과 칼멘 경의 호흡이 의외였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유기적인 공방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호오.”
브루노 단장이 의아한 듯 콧수염을 쓱쓱 쓰다듬었다.
“…마치 오랜 시간 등을 맞대고 싸운 사이 같군요. 그리 살가운 관계가 아닌 걸로 아는데, 참으로 의외입니다.”
“그러게?”
물론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마사인이었다.
쉬익-
금빛의 긴 잔상이 라이칸슬로프들을 길게 베어져 간다 했더니.
콰아앙!
이내 강력한 폭음과 함께 그대로 터져나간다. 전방에 있던 한 무리의 마수들이 위아래로 갈라지며 그대로 절명했다.
오러 폭사.
지그스문트령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하면서도 아름다운 기술이다.
그 뒤를 늦지 않게 울프 기사단이 밀고 들어가면서, 전선이 훌쩍 산비탈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진의 얼굴에서는 초조한 기색이 가지실 않았다.
‘언제 올 거냐…….’
아직 저들에게는 숨겨둔 전력이 있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성진의 예감은 대개가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쿵 쿵 쿵.
잠시 후 빙수들의 진동이 아닌, 먼 곳에서부터 가까워지는 새로운 진동이 감지되었다. 족히 수십은 되는 거대한 거인들의 발울림 소리.
“저건……!”
전선에 있던 아군들 또한 오래지 않아 이변을 감지했다.
땅을 울리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진동.
수년간 마경을 지켜 온 지그스문트령의 병사들이 그 진동의 원인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글래쳐 트롤……?”
새하얗게 질린 그들의 머리 위, 빙벽 기지로 이어지는 완만한 산등성이에서, 곧 수십의 얼음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글래쳐 트롤 25기.
빙수 네 마리의 위용이 단숨에 무색해지는 규모. 분명 얼음 심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최대의 숫자였다.
“역시 협곡 요새를 노렸던 놈이 여기로 온 건가!”
성진은 재빨리 영안을 열어 얼음 심장을 조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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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빙수 1호를 그룹에서 분리하고, 천천히 녀석을 조종해 비탈길을 향해 나아갔다.
이곳에서 조종하기에는 너무 멀긴 하지만, 난전이 한창인 곳에서 날뛰다가는 아군을 밟게 될지도 모르는 거다.
그럴 바에는 움직임이 좀 둔해지더라도 아예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쪽이…….
그러다가 성진은 문득 섬뜩한 느낌에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자세히 들어보니 진동이 들려오는 방향이 하나가 아니었다.
쿵 쿵 쿵.
새로운 기척이 나타난 곳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북쪽 도로.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려니, 놀랍게도 그곳에서 십여 마리의 글래쳐 트롤들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협곡 요새가 가로막고 있어, 공격받으리라 생각지도 않던 방향이었다.
“설마 요새가 당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남서쪽이었다. 역시나 십여 마리의 글래쳐 트롤들이 높은 침엽수를 헤치며 나타났다.
저쪽은 분명 거대한 호수와 절벽이 있어, 마수들이 절대 침입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글래쳐 트롤이 총 50기? 그것도 세 방향에서?’
이런 젠장……!
성진은 이를 악물었다.
[잠깐! 이성진!]화들짝 놀란 마왕이 만류하려 했지만, 성진의 강한 의지가 강제적으로 놈의 감각 공유를 유도했다.
화악.
곧 그의 영안이 열리며 오색의 빛으로 가득 찬 시야가 펼쳐진다.
‘몇 놈이냐! 대체 몇 놈이 얼음 심장을 조종하는 거야?’
지끈지끈.
점점 강해지는 통증을 참아가며 성진은 글래쳐 트롤들의 사념을 찾아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다행히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전장에 뒤섞인 어지러운 오러들 사이에서 성진은 결국 희미한 사념의 선들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결과는 예상외였다.
“설마…….”
[야, 이성진! 너 눈이!]놀랍게도 모든 글래쳐 트롤의 사념이 한 지점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은, 위력적으로 타오르는 짙은 암녹색의 불꽃!
성진의 의지에 따라 시야가 급격하게 확장되며, 산비탈의 광경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진녹색의 커다란 로브를 걸친 여인이었다.
그녀의 양손에 각각 얼음 심장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50마리의 마수를 정말로 혼자서 움직이고 있는 거다.
‘저놈은 악마다! 악마계약자가 아니야!’
성진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하?]그때 성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새빨간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린다.
[누군가 했더니 역시 당신이었군. 예비된 자여.]…예비된 자?
[당신이 영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과연, 협곡에서 얼음 심장을 가로챈 것도 당신이었겠구려. 이 사실을 알려드리면 내 주인께서 무척 흥미로워하시겠소.]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악마!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쿵! 쿵!
빙수 1호가 성진의 의지에 반응해 달리기 시작했다. 라이칸슬로프들도, 글래쳐 트롤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저 암녹색의 불길한 불꽃을 목표로.
[후후후, 어딜!]우어어어-
글래쳐 트롤들이 방해하며 달려들었지만, 성진은 놈들을 대충 피하며 달렸다. 빙수 1호가 자신이 된 듯한, 이전에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그 묘한 일체감이 다시금 그를 찾아온 상태였다.
단지 아까부터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눈의 통증이, 그의 영혼이 몸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지끈지끈.
문득 시야가 흐릿해지며, 볼을 타고 뭔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성진! 그만! 이제는 무리야!]무리인 건 나도 알고 있다, 마왕아.
하지만 여기서 저놈을 해치우지 못하면 어차피 영지는 끝장이야.
[성급하게 굴지 마! 지금 네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그때야말로 영지는 끝장이라고!]하지만 마왕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의 안전도 장담 못 한다고. 마사인 경은 물론이고, 상주기사들도 죽거나 다칠 거야.
게다가 나는 알 수 있다. 델크로스를 위해서라도 지금 지그스문트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걸. 여기서 밀리면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이제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버티면.
빙수 1호는 무서운 기세로 산등성이를 주파했다.
[어, 어떻게……!?]그제야 악마가 흠칫 놀라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친다. 설마 글래쳐 트롤 단기가 이 모든 장애물을 뚫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
‘이제 곧이다! 잡았……!’
그때였다.
후욱.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며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젠장! 조금만 더, 이제 금방이었는데!’
급한 마음에 눈을 마구 비벼봤지만, 한번 사라진 시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이 생긴 것은 비단 시야만은 아니었다. 엄청난 탈력감과 함께 지금까지의 피로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번에도 닿지 못했어. 단 한 걸음이 모자라서……!’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삽시간에 몸이 기울어진다.
그때 턱.
누군가가 넘어가는 성진의 몸을 붙잡았다. 어딘가 낯익은 기척이었다.
“괜찮아, 이성진?”
“……!”
어?
일순 성진의 머리가 멍해졌다.
어째서? 황도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얘가 왜 여기 있어?
“가만히 있어라. 너 지금 오러 흐름이 엉망진창이야. 눈은 또 왜 이 꼴이지?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눈 위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온다. 신성력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마사인 형님은?”
이럴 수가. 정말로 로건이다!
성진은 보이지 않는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로건? 네가 지금 어떻게 여기에…….”
“아아. 멀리서 뭔가가 번쩍이길래 심상치 않다 싶어서 말을 버리고 바로 뛰어왔지. 이런 짓을 할 놈이 너 말고 또 있겠냐 싶긴 했다만, 정말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아까의 그 환한 빛은 대체 뭐였지?”
뭐였냐니, 그야 네가 나한테 준 돌멩이…….
멍하니 생각하던 성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악마!
“로건! 로건!”
성진이 더듬더듬 손을 더듬어 눈을 덮고 있는 로건의 소매를 꽈악 움켜쥐었다.
확신할 수 있다.
이 델크로스 차원에서 깨어난 후, 성황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진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녀석.
이 녀석이라면 할 수 있어!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네가 꼭 그놈을 잡아 줘야 해!”
“너 지금 네 꼴이 어떤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이걸 내버려 두면…….”
“이 멍청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서 그놈을 잡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반은 죽어! 영지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라고!”
“…….”
“잘 들어. 저 산비탈 너머, 거기에 악마가 있다! 후드를 눌러쓴 젊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지금 그놈을 잡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휴우…….”
정신없이 말을 내뱉던 성진이 움찔 놀랐다. 그 나직한 한숨 속에서 전에 없이 깊은 빡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로건은 로건이었다.
금방 동요를 갈무리한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았다.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내가 뭘 하면 될까?”